한국문학, 2013년 겨울호

계간 한국문학은 의외로(?) 알찬 잡지 중 하나인데

이번 겨울호에도 눈여겨볼 만한 것들이 제법 있다.

김윤식 선생의 관심은 지금 전후를 넘어 70년대 가까이에 와 있는 것 같고

짧은 산문으로 씌어진 정한아의 글은 “출산”의 경험에 대한 디테일이 풍부해

꼭 소설로 탄생시켰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여기 실린 소설들은 다섯 편인데 대체로 좋은 작품들이었다.

 

1. 표명희, 심야의 소리.mp3

작가의 이름이 낯설다. 등단은 2001년인데 그동안 그리 주목 받아오지 못했던 것 같다.

흥미로운 초반부에 비해 중후반이 아쉽다.

소리를 만들어내는 일을 직업으로 삼는 사람의 이야기에 더 중점을 두었더라면.

혹은 심야에 발생한 그 사건에 대해 더 구체적인 의미 부여를 했더라면 어땠을까.

“어느 시기가 되면 그 일 외에 다른 일은 할 수 없게 되는 상태, 그 순간이 그 사람의 일이 천직으로 자리 잡는 순간이 아닐까”

라는 문장이 좋았다.

 

2. 김이은, 어쩌면 불가항력

이 작가는 아주 오래 전에 읽었다. <마다가스카르 자살예방센터>라는 소설집이었고,

또 뒤이어 나온 <코끼리가 떴다>도 읽었다.

기본적으로 성실하고 치열하게 쓰는 작가라는 인상이 있다.

그리고 실험성도 겸비하고 있는 느낌.

다양한 소재를 더 다양한 방식으로 보여주곤 하는데 그래서일까.

정작 김이은이라는 작가의 색채는 좀 옅어보이기도.

이번 소설은 섬뜩하면서도 어쩐지 슬펐다.

이 끔찍한 비극의 유전자는 정말로 불가항력인 거 같아서,

이 두 모녀의 삶은 결코 바뀌지 않을 것 같아서.

벌레나 메일국수, 눈물 같은 다양한 이미지들이 실감나게 그려져 있다.

주인공인 ‘너’가 옛 연인(?)의 옆에서 악보를 넘기며 말을 거는 장면은 백미.

 

3. 박솔뫼, 폐서회의 친구들

이 작가에게는 정말로 고맙다고 말하고 싶다.

소설의 형식에 대한 고민, 실험성에 관한 노력 같은 것이 더이상 무의미하거나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는 지금,

여전히 그러한 시도를 보여주는 작가가 몇몇 있는데 박솔뫼가 그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문장 단위의 서술에서 서사 단위의 구성까지 고심한 흔적이 역력하다.

문학적 관습을 단순히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그 관습을 비틀어 자기 서사에 적용하는 기법이 놀랍다.

폐서회라는 소재와 군데군데 드러나는 통찰력 같은 것들이 이 소설을 더 빛나게 한다.

 

4. 박성원, 여름이 가기 전에 해야 할 일 세 가지

내가 읽어 왔던 박성원과는 뭔가 달라진 느낌인데,

그것은 아무래도 유머가 아닐까.

흡사 홍상수의 영화를 연상하게 하는 이 소설의 남자 주인공을 어찌 동정하지 않을 수 있을까.

영화 셰임이었나. “우리 같은 사람들은 잘못된 게 아니라 그저 상처받은 거야.”라는 식의 대사가 있었는데

이 소설이 딱 그렇다.

아마 이 남자는 여름이 가기 전에 바다로 향할 것이다.

 

5. 편혜영, 몬순

이 작품 때문에 <한국문학>을 가장 먼저 읽었다.

2014년 이상문학상 수상작.

좋은 단편은 언제나 그 짧은 소설의 시간을 독자로 하여금 살아내게 한다.

장편이야 어떤 작품이든 끝까지 읽으면 그 시간들을 살게 된다.

그런데 단편은 그렇지 않다. 정말로 단 몇 문장만으로 독자를 끌어들였다가 또 몇 페이지만에 내보내야 한다.

이 작품이 지난 한 해의 한국 단편들 중 가장 훌륭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가장 훌륭한 작품들 중 하나라는 사실은 인정할 수 있을 것 같다.

아이를 잃은 부부의 상태를

“그럼에도 태오와 유진은 책임과 오명을 함께 나눠 갖고 있어서 거기에서 생기는 묘한 동지애를 포기하지 않았다.”

와 같은 문장에 담아내는 솜씨.

삶의 고통스러운 사건들을 태풍이나 몬순 같은 기후에 촌스럽지 않게 빗대는 방식.

묘한 여운과 여러 추측을 동반하게 하는 서사.

좋은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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