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간 한국문학은 의외로(?) 알찬 잡지 중 하나인데
이번 겨울호에도 눈여겨볼 만한 것들이 제법 있다.
김윤식 선생의 관심은 지금 전후를 넘어 70년대 가까이에 와 있는 것 같고
짧은 산문으로 씌어진 정한아의 글은 “출산”의 경험에 대한 디테일이 풍부해
꼭 소설로 탄생시켰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여기 실린 소설들은 다섯 편인데 대체로 좋은 작품들이었다.
1. 표명희, 심야의 소리.mp3
작가의 이름이 낯설다. 등단은 2001년인데 그동안 그리 주목 받아오지 못했던 것 같다.
흥미로운 초반부에 비해 중후반이 아쉽다.
소리를 만들어내는 일을 직업으로 삼는 사람의 이야기에 더 중점을 두었더라면.
혹은 심야에 발생한 그 사건에 대해 더 구체적인 의미 부여를 했더라면 어땠을까.
“어느 시기가 되면 그 일 외에 다른 일은 할 수 없게 되는 상태, 그 순간이 그 사람의 일이 천직으로 자리 잡는 순간이 아닐까”
라는 문장이 좋았다.
2. 김이은, 어쩌면 불가항력
이 작가는 아주 오래 전에 읽었다. <마다가스카르 자살예방센터>라는 소설집이었고,
또 뒤이어 나온 <코끼리가 떴다>도 읽었다.
기본적으로 성실하고 치열하게 쓰는 작가라는 인상이 있다.
그리고 실험성도 겸비하고 있는 느낌.
다양한 소재를 더 다양한 방식으로 보여주곤 하는데 그래서일까.
정작 김이은이라는 작가의 색채는 좀 옅어보이기도.
이번 소설은 섬뜩하면서도 어쩐지 슬펐다.
이 끔찍한 비극의 유전자는 정말로 불가항력인 거 같아서,
이 두 모녀의 삶은 결코 바뀌지 않을 것 같아서.
벌레나 메일국수, 눈물 같은 다양한 이미지들이 실감나게 그려져 있다.
주인공인 ‘너’가 옛 연인(?)의 옆에서 악보를 넘기며 말을 거는 장면은 백미.
3. 박솔뫼, 폐서회의 친구들
이 작가에게는 정말로 고맙다고 말하고 싶다.
소설의 형식에 대한 고민, 실험성에 관한 노력 같은 것이 더이상 무의미하거나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는 지금,
여전히 그러한 시도를 보여주는 작가가 몇몇 있는데 박솔뫼가 그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문장 단위의 서술에서 서사 단위의 구성까지 고심한 흔적이 역력하다.
문학적 관습을 단순히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그 관습을 비틀어 자기 서사에 적용하는 기법이 놀랍다.
폐서회라는 소재와 군데군데 드러나는 통찰력 같은 것들이 이 소설을 더 빛나게 한다.
4. 박성원, 여름이 가기 전에 해야 할 일 세 가지
내가 읽어 왔던 박성원과는 뭔가 달라진 느낌인데,
그것은 아무래도 유머가 아닐까.
흡사 홍상수의 영화를 연상하게 하는 이 소설의 남자 주인공을 어찌 동정하지 않을 수 있을까.
영화 셰임이었나. “우리 같은 사람들은 잘못된 게 아니라 그저 상처받은 거야.”라는 식의 대사가 있었는데
이 소설이 딱 그렇다.
아마 이 남자는 여름이 가기 전에 바다로 향할 것이다.
5. 편혜영, 몬순
이 작품 때문에 <한국문학>을 가장 먼저 읽었다.
2014년 이상문학상 수상작.
좋은 단편은 언제나 그 짧은 소설의 시간을 독자로 하여금 살아내게 한다.
장편이야 어떤 작품이든 끝까지 읽으면 그 시간들을 살게 된다.
그런데 단편은 그렇지 않다. 정말로 단 몇 문장만으로 독자를 끌어들였다가 또 몇 페이지만에 내보내야 한다.
이 작품이 지난 한 해의 한국 단편들 중 가장 훌륭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가장 훌륭한 작품들 중 하나라는 사실은 인정할 수 있을 것 같다.
아이를 잃은 부부의 상태를
“그럼에도 태오와 유진은 책임과 오명을 함께 나눠 갖고 있어서 거기에서 생기는 묘한 동지애를 포기하지 않았다.”
와 같은 문장에 담아내는 솜씨.
삶의 고통스러운 사건들을 태풍이나 몬순 같은 기후에 촌스럽지 않게 빗대는 방식.
묘한 여운과 여러 추측을 동반하게 하는 서사.
좋은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