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민석, 혀끝의 남자(문학과지성사,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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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간 <세계의 문학> 2014년 봄호에 실릴 리뷰의 일부입니다.

모두들 그렇게 말하듯이, 이렇게 시작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그는 찔끔했다. 찔끔해선, 하마터면 커피 포트를 발등에 떨어뜨릴 뻔했다. 가슴에서, 덜커덩 소리가 났다. 비명이 터져나오고 거실로 뛰어가 형사의 목을 조를 뻔했다. 회계사가 돌아왔다고? 언젠가도 그 비슷한 소리를 들었었다. 펫숍에서 직원이 전화를 하며 불쑥 내뱉은 소리였다. ‘삼촌이 돌아왔습니다.’ 어떤 상황의 어떤 맥락인지도 모르면서도, 그저 ‘돌아왔다’는 것일 뿐이었는데도, 그 소리는 한없이 끔찍하게 들렸었다. (『목화밭 엽기전』, 문학동네, 2000, 223면)

그래, 백민석이 돌아왔다. 2003년 절필과 잠적 이후 십 년만의 귀환이니 모두가 “돌아왔다”고 환호할 만하다. 이천 년대 중후반의 문학적 세례를 집중적으로 받은 우리 세대에게 백민석은 일종의 신화나 전설처럼 남아 있었고, 그래서 그의 귀환은 “어떤 상황의 어떤 맥락인지도 모르면서” 일단 환영해마지 않을 수 없는 사건이었다. 동시에 “그 소리는 한없이 끔찍하게 들렸었”는데, 그가 돌아왔으니 이제는 더 이상 그를 마주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사실 지난 십 년 간 백민석의 빈자리는 여러 작가들이 너무도 훌륭하게 메워주었다. 그를 찾는 목소리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결코 크지 않았다. 그러므로 우리가 백민석의 귀환을 주목하는 이유는 그가 한국문학사에 ‘필요한 존재’라서가 아니다. 그의 절필과 잠적, 그리고 복귀가 문학적 수사의 차원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언제든지 “작가로서의 나”를 죽이고 “나머지의 나”를 살릴 사람이기 때문이다(「사랑과 증오의 이모티콘」). 이런 단독자적 돌올함이야말로 우리가 정말로 환영해야 할 작가정신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단호하고 정직한’ 문학적 스탠스를 가진 사람들을 나는 형이라 부른다. 그리고 펄펄 끓어오르고 있던 지난날의 백민석을 곱씹으며, 다시 혀끝에서 불을 이고 걸어가는 그를 만나보니 이제 정확히 알았다. 이 형은 진짜다.

소설집 『혀끝의 남자』에는 총 아홉 편의 작품이 실려 있다. 처음과 끝의 두 작품이 신작, 나머지 일곱 편은 예전에 발표했던 것들을 고쳐 쓴 것이라 한다. 그러나 굳이 그렇게 경계 지을 필요가 없을 듯하다. 이 작품들은 모두 ‘백민석의 기원과 행로’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기발표작들이 <믿거나말거나박물지> 연작으로 기획된 것이었다고 밝혔고, 실제로도 그러한 제목으로 발표된 적이 있었으나 “지금 여기의 시점으로 모두 고쳐 썼다”는 작가의 말에서 알 수 있듯, 개개의 소설들은 지금의 백민석과 과거의 백민석이 기묘하게 만나는 장면을 보여준다. 「폭력의 기원-작은 절골에서」의 유년기로부터 「혀끝의 남자」의 2013년 서울시 사당으로 이어지는 이 반추는 날것의 세계로부터 도서관 소년을 거쳐 문학적 바리케이드를 쌓아올리던 그가 정서의 마비 상태인 “무표정(∵)”에 이르는 과정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그 무표정은 절필과 잠적이라는 “연옥(煉獄)”을 낳았다(제목만으로 본다면 이 소설집의 표제작은 오히려 「연옥 일기」가 어울린다). 그리고 다행히도 그는 그 십 년 간의 연옥 속에서 말은 잃되 글을 잃지 않았다. 온갖 말들이 횡행하는 연옥에서 일기를 쓰는 주인공의 모습(「연옥 일기」)은 “그래도 책은 계속 읽었다”(「사랑과 증오의 이모티콘」)는 작가의 자기 고백과도 맞닿아 있다. 그리고 무수한 인터뷰와 질문에도 끝내 자신의 절필과 잠적에 대해 말로 답하지 않고 ‘소설에 다 써 놓았다’고 눙치는 것이 실로 형의 풍모가 아니겠는가.

“글쓰기란 혼잣일이 아니다”라고 말했던 1997년 『16믿거나말거나박물지』의 정반대에서 그는 “가장 소중한 독자는 나 자신”이라고 이 소설집의 마지막 문장을 기록해두었다. 『혀끝의 남자』는 백민석이 백민석에게 쓴 책이고, 백민석이 읽어야 할 백민석이다. 보라. 폭력으로 점철된 자신의 고향과(「폭력의 기원」) “신데렐라 게임”을 하던 기이한 책방(「신데렐라 게임을 아세요?」), 그 앞을 지나갈 때마다 늘 재채기가 나던 어떤 여인의 집(「재채기」), 이제는 인터넷에서도 구할 수 있는 바리케이드(「일천구백팔십 년대식 바리케이드」)를 이야기하는 방식을. 십여 년 전의 백민석이 펼쳐놓은 이야기에 지금의 백민석이 논평을 가하는 일률적인 갈무리다. 혹 백민석을 그리워했던 사람이라면 6년차의 지루한 예비군 훈련이 실제 전쟁 상황으로 변해버리고(「항구적이며 정당하고 포괄적인 평화」), 몸이 “이 센티미터” 정도로 줄어든 채 시속 800km로 달리고 있는 인물(「시속 팔백 킬로미터」)이 등장하는 작품들에서 일종의 반가움을 느낄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이 책은 읽을 필요가 없다는 것인가.

「혀끝의 남자」가 이 책의 표제작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것은 신작이라는 딱지 때문이 아니라 백민석의 앞날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 짧은 인도 여행기로부터 나는 백민석의 변화를 읽는다. 그것은 인간과 신에 대한 존재론적 사유의 태동 같은 것이 아니라 긍정적 의미에서의 서사적 태만 같은 것이다. 십 년 전의 백민석은 이야기를 꽉 틀어진 채로 독자를 끌고 갔다. 당장 이해가 되지 않더라도 곧 설명해줄 테니 멈추지 말라고 주문하는 듯한 무시무시한 장악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이 백민석을 코너로 몰고 갔다고 생각한다. 새로운 백민석은 조금 느슨해져도 좋다.

자서전과 에세이가 뒤섞이고, 이력서와 사유서, 그리고 출사표가 소설이라는 형식으로 공존하는 이 독특한 책을 심각하게 들여다 볼 필요는 없다. 다만 백민석이 돌아왔다는 것만 기억하라. 그리고 이제는 좀 큰소리로 외쳐도 되지 않을까. 형, 이제 가지 마요.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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