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정은, 야만적인 앨리스씨(문학동네,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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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 <문학동네> 2014년 봄호에 실릴 리뷰의 일부입니다.

 

지금, 한국문학에서 가장 주목받는 작가를 한 명만 꼽으라면 조금 망설이는 척하다가 황정은이라는 이름을 꺼내야 할 것 같다. 1976년에 태어나 2005년부터 소설을 쓰기 시작한 그녀는, 채 십 년이 되지 않는 사이에 두 권의 소설집과 두 권의 장편소설을 발표했다. 다작도, 과작도 아닌 작가의 이력을 굳이 상기시키는 것은 『야만적인 앨리스씨』라는 근작이 자리한 위치를 지적하기 위함이다. 이 소설을 읽는다면 황정은의 전작들, 특히 『파씨의 입문』과 모티프, 주제의식 같은 것을 상당히 공유하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들이 하나의 이야기 아래 모였을 때 얼마나 큰 울림을 주는지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야만적인 앨리스씨』는 황정은의 버전 2.0이라고 부를 수 있을, 일종의 완전판이기 때문이다.

처음의 황정은은 곧잘 ‘환상’이라는 키워드로 연결되는 작가였다. 그것은 더할 나위 없이 적확한 지적인 것처럼 보였고, 이 작가도 좀체 그것을 포기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러나 지금의 황정은에게 환상성의 프리즘을 가져다 대면 보이는 색깔이 별로 없을 것이다. 그녀가 천착하고 있는 것은 자신이 발 디디고 있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처음부터 황정은은 현실을 벗어난 적이 없었다. 그저 방향이 달랐던 것이다. 이제 이 작가는 환상에 서서 현실을 보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 서서 환상을 보고 있다(이는 『야만적인 앨리스씨』 이후 발표한 작품들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이 기저에 지금 여기의 현실은 그것 자체로 환상이라는 것, 그렇지 않고는 견뎌내기 어려울 만큼 이 세계가 잘못되어 있다는 것, 끝이 분명한 고통을 어떻게 감당해야 할 것인가에 관한 사유가 깔려 있음은 물론이다.

 

앨리시어는 꿈을 꾼다. 과거의 앨리시어와 현재의 앨리시어, 수면의 바로 위와 바로 밑처럼 순식간에 모든 순간을 오가는 그를 꿈꾼다. 여기 그 순간들이 있다. 앨리시어의 꿈 말이다. 현재의 앨리시어가 불쑥 터져나오는 과거이고 과거의 앨리시어가 창백한 싹처럼 문득 돋아나는 현재이다. 앨리시어는 지금 어디에 있나.(37쪽)

 

어떤 순간에 삶의 시계가 멈추어버린 사람이 있다. 그러나 숨은 멈추지 않아서 그 시간들을 끊임없이 다시 살아야 하는 사람이 있다. 그의 이름은 앨리시어. 앨리시어에게 과거와 미래와 현재는 구분되지 않는다. 봄의 과거가 겨울이 아니고, 여름의 미래가 가을이 아니듯 “환등기처럼 돌아가고 돌아오는” 계절의 시간들이 그에게 반복될 뿐이다. ‘그 사건’이 일어난 순간까지의 시간들은 과거이지만 언제나 현재이고, 동시에 미래이거나 추측의 상태이다. 그러니 이 소설은 “앞으로도 앨리시어는 그렇게 한다”는 진술이 성립되고, “그대는 어디까지 왔나”라고 계속해서 되물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반복, 아니 차라리 반추라고 부르는 것이 적당할 이 되새김의 방식이 만들어내는 어떤 낯섦이야말로 황정은의 것이다. 그것은 고모리에서의 시간들이기도 하고, 여러 명의 앨리시어이기도 하며, 결국 이 소설 속의 이야기들이다.

황정은의 작품들이 대체로 그러하듯 이 소설 역시 기존의 소설문법을 유려하게 뒤흔들고 있는데, 그중 하나가 이렇다. 지금의 앨리시어가 유년의 앨리시어를 이야기하므로 이 소설은 삼인칭이다. 그런데 과거의 앨리시어라고 해도 그 역시 ‘나’이기 때문에 일인칭이 될 수밖에 없다. 동시에 앨리시어는 이인칭의 “그대”를 계속해서 호명한다. 이런 서술자를 지금껏 만나본 일이 있었던가. 요컨대 시제와 시점의 무화. 이럴 때 앨리시어와 그대의 경계는 무너진다. 앨리시어의 과거와 그대의 현재가 ‘우리의 미래’가 된다. 이것이 소설에서, 혹은 소설로 가능한 연대라고 하면 지나칠까.

이 소설 속 가족들의 이야기를 잠깐 들여다보자. 아버지에게는 큰아버지의 시체를 찾아다니던 할머니의 이야기가 있다. 모든 생명은 존귀하다는 ‘목숨론’의 근거다. 어머니에게는 징그럽게 사육되어 자신을 잡아먹는 애새끼들의 이야기가 있다. 주체할 수 없는 폭력성을 띠게 하는 ‘씨발됨’의 원인이다. 그러나 목숨의 가치를 말하면서 입이 찢어진 물고기를 도로 놓아주는 인간은 “아무래도 믿을 수 없는 것”이고, 폭력의 행사는 자신의 괴로운 과거나 상처 때문이 아니라 그냥 “때리고 싶어서 때리는 거”라고 앨리시어는 말한다. 이들의 이야기는 그것이 현실이든 꿈이든 학습되거나 경험한 것이다. 그러나 앨리시어의 이야기들은 지어내고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완전히 다르다. 사람에게 시집간 여우의 이야기를 눈치 빠른 동생이 “우리 뒷집 아줌마” 이야기가 아니냐고 의심하기도 하지만 어쨌건 그것은 여우의 이야기이고, 얌들과 네꼬의 이야기처럼 앨리시어가 동생에게 꾸며서 들려준 이야기다. 주어진 이야기와 지어낸 이야기, 이를 조심스럽게 세계와 소설로 바꾸어보면 어떨까. 이를테면 어머니의 꿈 이야기를 앨리시어가 다시 반복하는 장면이 있다. 두 이야기의 결정적 차이는 어머니가 살인자로 “너”를 지칭하고 있는 데 반해 앨리시어는 그를 “쿠키맨”으로 부르고, 자신은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다는 것에 있다. 그렇게 해야만 그 잔혹한 세계를 견딜 수 있는 것이다. 이 방식이 ‘소설적’이라고 말하는 것도 지나칠까.

폭력의 시간들이 지나간 뒤 동생이 앨리시어에게 ‘이야기’를 원하는 것 역시 그 순간들을 견디기 위함이다. 앨리시어는 ‘나는 이렇게 할 것이다’ 혹은 ‘너는 어떻게 할 것이냐’고 끊임없이 묻는 말들에 대항해 “소년이 있었다”라고 시작하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은 것이다. 커다란 나무 아래에서 지루하게 살아가던 앨리스의 이야기. 앨리스는 끝이 보이지 않는 토끼굴에서 떨어지고 있다. 아무리 떨어져도 바닥에 닿지를 않는, 그래서 이게 언제 끝날 것인가 골똘하게 생각하게 되는 ‘낙하’다. 동생은 늘 그렇듯 묻는다. “그래서 어떻게 되냐.” 다른 이야기들과 달리 앨리시어는 이 이야기를 끝맺지 못한다. 동생의 삶이 먼저 끝났기 때문이다. 이것이 동생에게 들려준 마지막 이야기라서, 앨리시어는 앨리시어다. 그는 바닥에 닿기 전까지 낙하를 반복하면서 자신을 반추해야 하는 운명이다. 그러나 언젠가 앨리시어는 바닥에 닿게 될 것이고, “이야기는 언제고 끝날 것”이다. 동시에 그 끝은 아주 “천천히 올 것”이고 또 “고통스러울 것”이다. 이를 소설의 운명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조금 지나친 말이 될지도 모르겠다.

이 책의 3장인 ‘再, 外’는 에필로그이면서, 작가의 말이기도 하고, 한 편의 시처럼 보이기도 한다. 여기에서 황정은은 이 세계의 바깥을 꿈꾸는 것에 대해 이야기한다. 봉준호에게 그것은 기차의 문을 부수는 것이었고(<설국열차>), 김사과에게는 수족관을 깨는 것이었다(『천국에서』). 『야만적인 앨리스씨』의 경우는 어떨까. 커다란 나무 아래에서 그저 무슨 일이 일어나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앨리스 소년의 이야기를 듣고 “나무 바깥으로 나가면 상황 끝, 오케이?”라고 말하는 한 남자가 있다. 그러나 황정은에게 그것은 “마치 갤럭시와도 같은 대답”이다. 그들이 개인의 내면이나 상처, 고통 같은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지금 눈앞의 문제들에 대해 모든 힘을 소모해버려서 분노는커녕 절망조차 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고작 불쾌한 냄새를 풍겨 사람들의 무방비한 점막에 들러붙고자 할 뿐인 앨리시어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계의 바깥으로 나가기 전에 소설이 감당해야 할 일은 “알기 때문에 모르고 싶어하고 모르고 싶기 때문에 결국은 모”르는 존재들에 관해 먼저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것은 하위주체에 대한 일방적인 수긍이거나 세계에 관한 당위적인 희망이 아니라 ‘따뜻한 냉소’ 혹은 ‘긍정적 허무’ 같은 것이다. 그러니 이렇게 말할 수도 있지 않을까. 어쩌면 『야만적인 앨리스씨』는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이후 그토록 기다려왔던 한국문학의 모습이 아닌가 하고. 물론 이건 확실히 지나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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