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동네, 2013년 겨울호 / 세계의문학, 2013년 겨울호

조금은 갑작스럽게 라섹수술을 해버려서 한동안 읽을 수도 쓸 수도 없는 상태였다.

지금도 모니터 앞에 바짝 붙어 앉아 흐린 글자들을 바라보며 행여 오타가 날까 초조하다.

<문학동네>는 요즘 엄청난 두께로 다른 문예지들을 압도하고 있는데

여러 특집이 많아서인지 오히려 소설은 그리 많이 실리지 않는다.

겨울호에는 세 편의 단편소설이 실려 있다.

 

1. 김훈, 손

아직도 원고지에 육필로 작품을 보내온다는 이 노작가의 단편은 여전히 힘이 있다.

김훈 소설의 힘은 간결하면서도 정확한 문장에서 나온다.

그리고 결코 고개를 갸우뚱 하지 않게 하는 선명한 서사에도 그 힘은 들어 있다.

영화평론가 정성일은 이 잡지에서 김훈의 산문집 <풍경과 상처>를 두고 이렇게 썼다.

“소설가들은 이상하게도 풍경 앞에 가서 자기가 알고 있는 것들을 설명하기에 급급했다. 나는 그들이 그 풍경 앞에 갔을 때 거기서 맛보는 감각의 문체를 보고 싶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나는 문체를 읽는 대신 그 안에서 보고 싶었다. 김훈 작가의 문장 안에서, 혹은 인용을 경유해서, 가끔은 과도할 정도로 산만하게 이리저리 산길을 떠들고 언덕을 헐떡거리며 올라서다 말고, 아, 나는 그것을 보았다, 라고 풍경을 건드릴 때마다 서둘러서 짐을 싸들고 거기에 가서 나도 그걸 보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284)

풍경을 맛보는 감각의 문체라니, 정성일이 이토록 헌사를 바치는 문장이라면 더 이상 군말은 필요없을 것 같다.

한편 문학평론가 황현산은 역시 이 잡지의 지면에서 이런 말을 했다.

“한국소설 읽기가 너무 힘든 거야. 너무 어려운 작가가 많다 이거야. 물론 내 나이가 많고 내 시대마다 감성의 기준이란 것이 있으니까 내 안의 보수를 느낄 때마다 문학은 자유다, 라고 깨려고 노력은 하는데 역시 구세대 감수성이라 새로운 걸 이해하기 힘들 때가 많아. (중략) 또하나는 한국어에 대한 작가들의 성찰이 많이 부족한 것 같아. 한국어의 시제는 대단히 불확실해. 아직도 시간 개념이 제대로 정착되지 않았다는 느낌이야. 그러다보니 독자들은 소설을 읽으면서 시간의 미로 속을 불필요하게 헤매다가 그만 질려서 책을 덮어버려. 정말 어렵거든. 명징하지 않아서 말이야. 안 읽혀. (중략) 맥락 없이 어렵게, 불필요한 불친절을 혁신이라고 오해하는 작가들이 있는 건 아닐까? 특히 젊은 작가들의 단편들, 읽기 참 어려워. 앞뒤 관계를 노트에 메모해가면서 읽지 않으면 도저히 표면적 논리도 이해하기 어렵도록 괜히 난해한 작품들도 꽤 많아. 이렇게 되면 선의의 독자들도 떠나가버려.”(69)

이 인터뷰는 되새겨 볼 말이 꽤 있는데, 차치하고 여기에서 그가 말하는 단편소설의 “명징함”을 곰곰이 음미해보면 그것이 김훈이 보여주는 어떤 선명함과 맞닿아 있음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손>은 어떤 119구조대원의 짧은 기록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작가가 쓰고 있다.

강물로 뛰어든 여자를 구한 직후 접혀 있는 손을 펴보니, 아직 숨이 붙어 있던 그 여자가 무언가를 잡으려는 듯 손을 다시 움츠렸다는 기록.

강간을 당한 경험이 있는 어린 여자가 강물로 뛰어들었을 때, 누구나 자살이라고 이야기할 때,

그 무언가를 잡으려 했던 손 때문에 자살이 아니라고 말하는 아버지가 있다.

그리고 그 소녀를 강간했던 소년의 어머니가 있다. 그녀가 주인공이다.

1인칭으로, 중년의 여성을 그려가는 김훈의 서사는 그리 낯선 것이 아니다.

삶의 고통에는 성별이 없다는 식의 단호함 같은 것이 여전히 담겨 있다.

이 여자의 쓸쓸한 삶은 단단한 문장 속에 들어 있어 손쉽게 열어볼 수 없다.

한 문장 한 문장이 분명 단호하고, 정확한 것들인데 그 사이에 알 수 없는 것이 끼어든다.

못한 말들이 많아 보이기도 하고, 너무 많은 말들을 한 것 같기도 한 이 소설이 왜 지금 씌어졌는지 다행히도 짐작해볼 수 있을 것 같다.

다음 봄호에 또 김훈의 단편이 실리는 것으로 알고 있다.

 

2, 김인숙, 아홉번째 파도

‘늙은 연인’이거나 ‘낡은 연인’인 두 남녀를 그리고 있는 소설이다.

헤어지고, 다시 만나고, 다시 헤어지고, 또 다시 만나는 연인들에 관한 이야기다.

뒤늦게 깨달은 사실이기도 했지만, 충격적인 것은 이들의 이런 만남이 각자의 결혼, 육아, 이혼따위와 관계 없이 일어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걸 눈치채지 못할 만큼, 이 소설은 여러 디테일로 무장하고 있다.

특히 오래된 연인들이 보여주는 어떤 감정들, 태도들, 대화들이 그러했고, 낚싯대와 핸드폰이 교차하는 ‘두’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그녀가 끝내 하지 못한 말, 그리고 결국 하지 못할 말.

“너 아니. 난 단 한 순간도 널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었어.”

이들에게 아홉번째 파도가 닥친다면 이 말을 할 수 있을까.

 

3. 강화길, 굴 말리크가 잃어버린 것

신인작가의 소설.

공교롭게도 앞선 작품과 같이 오래된 연인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이 연인 사이에 잠깐 끼어들었던 한 인물, 굴 말리크의 사랑 이야기가 교차적으로 서술된다.

신분을 뛰어넘은, 금지된 도피의 사랑. 그것마저도 세월의 무게에 권태로워지고, 삶의 무게에 뒷전이 되어버린다는, 이야기.

이 소설 역시 여러 디테일들이 살아 있는데, 특히 스무살 남짓한 나이에 상경한 두 남녀가 서울의 길을 헤매는 장면은 너무도 ‘리얼’해서 오랜만에 감탄했다.

그 외에도 인상적인 장면들이 여럿 있었으나 결국 시간에 따라 변해가는 사랑의 색깔이라는 주제가 다소 도식적으로 제시된 것은 아닌지.

특히 마지막 장면의 ‘환상성’은 불필요한 것이 아니었을지. ‘그들’에서 ‘우리’로 언술 주체가 바뀌는 것이 과연 설렘과 피로와 포기가 공존하는 마지막의 감정을 더 잘 드러낼 수 있는 것이었을지.

 

+ 염승숙, 청색시대

<문학동네>에서 매호 게재되는 젊은작가특집에는 반드시 “자전소설”이 한 편 실린다.

이번 호의 작가는 염승숙이었고, 그녀 역시 <청색시대>라는 이름의 자전소설을 실었다.

자전소설이라는 이름이 붙은 작품들은 언제나 좀 독특한 느낌을 주는데, 이 작품을 읽으니 염승숙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까지 알아버린 느낌이다.

그녀가 그리워하는 것들, 그녀가 바라보는 세계, 그녀가 하고 싶지만 할 수 없는 것들. 이런 것들이 그득하다.

아무래도 이 작가는 지금보다 더 우울해질 것 같다.

 

 

계간 <세계의문학>은 150호 특집으로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을, 정말 “지금”의 하루키를 실어 놓았다.

참 어쩌면 하루키는 그렇게도 하루키스러운지. 인간의 내면을 서로의 대화를 통해 찬찬히 풀어내는 방식이나 하루키가 좋아하는 기호들, 이를테면 수동운전 같은 것들이 잔뜩 들어 있다.

하루키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여기에는 한 편의 한국 단편소설이 실려 있다.

 

1. 김중혁, 뱀들이 있어

단호하게 말해 김중혁스럽지 않다.

김중혁스러운 게 물론 항상 좋은 것은 아니지만 김중혁스러울 뻔 했는데 김중혁스럽지 못한 것은 유감이다.

소재에 대한 독특한 상상력을 발휘하기보다는 인물들의 관계에 조금 더 집중한 모양.

할머니의 이야기들, 구슬점, 게임 개발자, 지진. 이런 좋은 소재들이 세 인물의 관계맺음에 그다지 밀착되지 못했다.

소설의 마지막 장면은 정말로 알 수 없는 방식으로 그려지고 있는데, 더 깊이 생각하기 전에 내가 알던 김중혁을 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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