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2013년 겨울호

이제 3월이 되었고, 계간지 봄호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또 읽어야 할 생각에 아득해지면서도 이 계절에는 또 어떤 작품이 발견될지 기대하는 마음.

이번 주 <창작과비평>과 다음 주 <자음과모음> 정도를 읽고 봄호들로 넘어갈 듯 하다.

 

창비에는 세 편의 단편소설이 실려 있다.

1. 손홍규, 아내를 위한 발라드

정말이지 ‘아내’를 위한 소설이다. 그밖에 다른 설명은 어려워 보인다.

오로지 아내들만 걸리는 전염병을 상정하고, 이를 아내의 살처분이라는 풍경으로 그리고 있다.

파국의 상상력치고는 소박하고, 로맨스라고 하기에는 좀 지나친, 그러나 그 무엇보다 선명하다.

아내가 없다는 것과 아내를 잃는다는 것은 완전히 다르다는 소설의 진술처럼,  소설은 아내를 지키기 위한 조용한 사투로 전개된다.

아마도 아내들이 걸리는 병은 ‘좀비화’의 증상을 가진 듯 하고, 아내들에게만 전염이 되는 것 같다.

살아 있는 채로 발견되는 아내들은 그러므로 살처분되어 매립되고, 이 처참한 광경을 매일 목도하는 주인공은 아내를 고향에 숨기기로 한다.

숨긴다는 것은 결국 자신의 손으로 아내를 처리하겠다는 방식이고, 그 방식은 아내 있는 모든 남성들이 고민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이 방식이 성공적으로 끝날지는 물론 미지수.

결국 이 소설은 “아내”라는 이름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아내를 잃은 사내들의 동질감 같은 것을 그려내고 있다(소설 속 남성들의 대화가 그 동질감을 잘 나타낸다).

흐트러짐 없는 문장과 선명한 주제를 가졌지만, 항상 손홍규의 작품은 무언가가 아쉽다.

그게 무엇인지는 역시 아직.

 

2. 윤이형, 윈, 캠프 루비

독특한 상상력으로 무장한 작가들의 최전선에 있는 윤이형의 작품이다.

단편치고는 상당히 긴 소설이었고, ‘우주시대’의 이야기여서 모호한 측면이 많았다.

지금으로부터 백 년이 지난, 2110년 정도 되는 배경을 가진 이야기다.

우주시대가 열렸고, 지구인들이 이른바 우주 재개발에 나서는 이야기다.

외계의 여러 문명들이 등장하고, ‘우주적 장치’들도 꽤 선보였지만 결국, 지구의 이야기였다.

등장하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자신의 과거를 들추어내고, 주인공 남녀는 고작(?) 사랑에 빠진다.

고작 사랑이라니. 그러나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요컨대 현실에 대한 문제 제기의 메타포로 우주시대를 설정했다면 그것은 너무 나이브하고,

인간들의 상처와 기억의 문제, 그리고 사랑을 이야기하려 했다면, 왜 굳이 우주여야 했는가 질문하게 된다.

소설의 마지막 장면은 우주의 생명체들이 지구의 ‘생각’을 거부하고 자멸을 막아내는 것으로 끝이 나는데,

결국 이런 것이라면, 훨씬 많이 덜어낼 수 있지 않았을까.

 

3. 이장욱, 기린이 아닌 모든 것에 대한 이야기

이장욱에 대한 나의 기대감이 이 작품을 좀 과대 해석 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그 과대함에서 별로 헤어나오고 싶지는 않다.

소설은 10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중 1장, 그러니까 소설의 시작 부분이 정말로 강렬하다.

기린이 아닌 모든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고 해도 당신은 아마 머릿속에 기린을 떠올리고 있을 것이라고 ‘나’는 이야기한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물론 나는 그 기린에 대해 아무런 권리가 없습니다. 그건 순수하게 당신의 머릿속에서 태어난 당신의 기린이니까요. 이상한 말이지만, 나는 그것이 내 운명이라고 생각합니다. / 운명이라고 나는 말했습니다. 우스운가요? 하지만 믿어주십시오. 나는 진실만을 말하고 있으니까요. 만에 하나 내 말이 거짓말이라고 해도, 그건 진심을 다한 거짓말입니다. 전력을 다한 거짓말입니다.”

나의 과대함은 여기서 소설을 떠올렸다.

그러니까 소설의 속성에 관한 이야기이지 않는가 말이다.

소설은 당연히 거짓말이다. 그런데 또 거짓말은 아니다. 진심을 다한 거짓말이거나 전력을 다한 거짓말이다.

소설가는 그러므로 진실한 거짓말쟁이라는 형용모순에 빠진 사람이다.

기린에 대해서 이야기하겠다고 말하고 기린을 말하는 것은 소설이 아니다.

소설은 기린이 아닌 모든 것에 대해 이야기하겠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 소설의 모든 문장을 메타소설로 읽는다.

기린은 소설이며, 기린을 이야기하는 주인공은 소설가이고, 그 기린을 ‘감정’하려드는 사람들은 독자라고.

이 단순무식한 도식을 한 인물의 여러 이야기들로 풀어내는 솜씨야말로 소설가의 전력이 아닌가.

기린을 이야기하지 않으면서, 기린이 아닌 것들을 이야기함으로써 비로소 도달하는 어떤 진실.

 

자, 이장욱은 이렇게 물으며 소설을 끝낸다.

“그런데 그것은…… / 정말 기린입니까? / 이제 당신이 내게 대답할 차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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