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용준, 바벨(문학과지성사,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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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소설을 쓰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도대체 어떻게 해야 훌륭한 장편을 쓸 수 있을지 고민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언어에 대한 이 작가의 탐구는 성실하게 집요해서 충분히 깊이가 있다.

말이 사라져버린 세계에 대한 상상력도 흥미롭다.

그런데 왜 이리도 실망스러울까.

기대를 너무 많이 한 게 아닐까 싶다.

프롤로그와 에필로그 간의 간극이 크다.

뒤로 갈수록 힘이 빠진다. 그만큼 에필로그의 ‘얼음의 나라 이야기’가 강렬했다.

차라리 그 강렬함을 그대로 두고, 이야기는 지금-여기에서 펼쳤다면.

이 작가는 언젠가 <세계의문학>에 언어장애를 겪는 아이들에 관한 경장편을 쓴 일이 있는데, 그런 서사를 중심에 두었다면 어땠을까.

말이 사라진, 아니 정확하게는 말의 장애가 인류 모두에게 닥친 바벨이라는 시공간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은 말이 횡행하는 지금-여기의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런 비인간적인 세계에서 벌어지는 이토록 인간적인 서사라니.

애매하게 처리되는 노아와 룸의 관계도, 그냥 ‘정부’로만 통칭되어버리는 ‘악’도, 꼭 그래야 한다는 듯 시위대에 의한 소년의 죽음으로 촉발되는 그 정의심도, 요나와 마리의 정말로 이해할 수 없이 깊어지는 내밀한 관계도, 결국 뭐가 뭔지 알 수 없는 펠릿에 관한 이야기도, 불만이다.

무엇보다도 아마도 이 소설의 핵심어라고 할 수 있을 “공통 감각”이 불만이다.

명확하게 설명할 수 없는, 인간들이 어떤 순간에 느끼게 되는 합일의 상태라고 할 수 있는 그것은, 사실 바벨의 시대를 넘어설 수 있는 열쇠로 볼 수 있다. 그런데 그게 선택받은 자들의 내밀한 대화로만 묘사된 것은 편의적이다. 대부분의 인간들은 시커멓고 악취가 나는 말을 내뱉고, 소수의 깨어 있는 사람들만 아름답고 눈부신 말을 쏟아내는 것처럼 그릴 때, 여기 어디에 희망이 있겠는가. 그러니 이건 우리의 이야기가 아니고 그들의 이야기가 되어버린다.

더 이상 노래를 부르지 못하는 요나의 아버지가 혀를 깨물어버리는 장면만이 선명하게 슬펐다.

되돌아보거나 우두커니 멈추어버려야 했던 문장이 드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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