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에 읽은 시

봄날의 황혼을 위한 따뜻한 말들

(이 글은 월간 <심상> 3월호에 게재될 예정입니다)

 

계절이 바뀌어, 온기가 바람에 실려와 볼에 닿는 시간이다. 이런 날들에는 고통과 슬픔으로 가득차기보다 설렘과 기대로 가슴을 채우고 싶은 생각이 든다. 최근에 읽은 시들 가운데 다정한 말들에 귀를 기울여본다.

인간이 가진 삶의 조건에 있어서 시간만큼 근원적인 개념은 없을 것이다. 인간이 살아가면서 하는 모든 고민들의 기저에는 시간이 있다. 그것이 철학적인 문제이든 일상의 것이든 마찬가지다. 저 멀리 “시간 이해는 존재 사유의 근원이다.”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굳이 인용하지 않더라도 시간이 가지는 의미는 어떤 부분에서 절대적인 것이다.

그 중 하루라는 시간은 특히 오묘하다. 일상적으로는 해가 뜨는 낮에서 다시 해가 지는 밤으로 돌아오기까지의 시간이다. 그러나 하루라는 개념은 태양의 움직임보다 인간의 수면과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그래서 하루는 모두에게 다른 시간이다). 인간이 잠드는 행위를 일종의 죽음이라고 본다면, 그리고 잠에서 깨어나는 행위를 탄생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면 놀랍게도 하루라는 시간은 삶의 축소판이다. 각각의 인간들에게 있어 시간이 상대적일 수 있는 이유는 어쩌면 모두가 동시에 잠들지 않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른다. 어찌 되었든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낮과 밤, 두 종류밖에 없다.

 

속삭였다. 이건 비밀이야. 그러니 세상 모든 것이 비밀이 되었다. 발이 닿는 곳마다 버섯처럼, 비밀이 자라났다. 만지는 것들 모두 비밀이 되었다. 맛보는 것들 모두 비밀이 되었다. 보이는 것들 모두 비밀이 되었다. 이 어두운, 비밀의 공장에서 숙련된, 노동자처럼 우리는, 하나씩, 하나씩, 끌러져, 그래, 그러자. 낮은 목소리로, 그저 낮은 목소리로. 드디어 마지막 비밀까지 열어 봤을 때, 우리는, 깔깔 웃어 댔다. 창밖은 언제나 환하고 명료해, 앞뒤로 문을 잡아당기는 것들을 관찰하는 연구자처럼. 그래 침묵, 언제나 침묵. 오후의 빛이 순서도 없이 번져 가고 사소한 개인들을 비추고 있다. 우리는 비밀이야. 비밀이지. 그게 우리가 원하는 거야. 그래, 그러자. 우리는 이 어둑한 비밀의 공장에서. 하나씩, 하나씩,

 

유희경, 「비밀」 전문, 《세계의문학》, 2013년 겨울호

 

밤의 시간은 비밀의 시간이다. 비밀이 되면 보이는 모든 것들은 어둠에 잠긴다. 우리가 비밀의 공장의 노동자라면, 우리도 역시 비밀이고 그곳은 깜깜한 곳일 테다. 그러나 어김없이 햇살은 비추고 그 환한 세계에서 “사소한 개인들”은 발가벗김의 찰나를 경험한다. 비밀과 침묵의 시간이 밤이라면 그것들을 하나씩 끌러가는 시간은 낮일 것이다. 기어코 환하고 명료해지고야 마는 그 시간들 속에서도 비밀은 버섯처럼 자라나고, 우리는 속삭인다. “그래, 그러자.”

 

어느 누구에게도 밤과 낮 중 하나만 존재하지는 않는다. 또 오로지 침묵만이 존재하는 밤도, 변함없이 활기가 넘치는 낮도 없다. 시간은 각자에게 달리 흐르고, 그 시간을 견디는 방법도 모두 다르다. 그러니까 우리는 늘 체리 피킹(cherry picking) 중인 것이다. 한 시인은 이렇게 시간을 골라내고 있다.

 

마음은 이미 콩밭

작은 잎 하나도 버거운 시간의 연속

길을 걷다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는 순간

구름이 모였다 흩어지는 동안

걸음을 멈춘 발 끝에 후두둑 떨어지는 햇살

아프리카나 네팔, 안데스를 걷는 마음

발걸음마다 툭툭 떨어지는 생각

고르고 고르고 또 고르는

몸속 붉은 그것

톡톡 튀는 고통 속 고통

아픈 자리는 마음 아닌 몸

흔적이 없으면 상상되지 않는 몸

 

길을 걷는다

지도 위에 밤하늘을 그리고

별 몇 개 반짝 새기며

걸음을 재촉한다

해발 1,500미터의 도시에서

길을 잃는다

상처를 소독하는 것처럼 깊어지는 아득함

한 아름 안기는 어둠

 

반짝 빛나는 붉은색 체리

어둠이 걷히지 않아도

고르고 고른 별빛을 따라

경쾌하게 걷는다

그뿐

걸으면서 걷고 어둠에 안겨서 걷는다

어딘지 몰라도

걸음이 멈춘 곳이 길 끝이다

붉은 고른 튀는

밤 걸음

 

최규승, 「커피 체리 피킹 파킹」 전문, 《문예중앙》, 2013년 겨울호

 

인간의 고통을 커피와 체리에 비유하고 있는 이 시는 경쾌하고 가벼워서, 또 슬프다. 우리 몸에 있는 상처나 고통은 나무에 매달린 열매만큼이나 다양하다. 이것을 커피콩이나 체리를 골라내듯이 ‘내’가 고르고 고를 수 있다면. 그렇다면 “작은 잎 하나도 버거운 시간의 연속”일지라도, “발걸음마다 툭툭 떨어지는 생각”들을 골라가며 우리는 걸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낮을 걷던 우리가 이윽고 밤의 시간을 걸어갈 때, 그 길이 어둡고 아득하더라도 밤하늘의 별빛 몇 개를 골라 그것을 따라 경쾌하게 걸어가면 “그뿐”이라고, 시인은 말한다. 그렇게 걸어가서, 그러니까 커피나 체리를 피킹하면서 걷다가 걸음을 멈추는 순간, 그곳이 곧 길의 끝이자 파킹이라는 것. 삶에 관한 이 톡톡 튀는 시는 “붉은 고른 튀는 / 밤 걸음”이라는, 제목 “커피 체리 피킹 파킹”과 묘하게 어울리는 멋진 운율도 담고 있다.

 

겨울이 지나가고 봄이 오면 나는 길어지는 낮에 대해서, 또 짧아지는 밤에 대해서 생각한다. 앞서 인간에게는 밤과 낮밖에 없다고 했지만 그런 계절에는 늘 새벽과 황혼이라는, 또 다른 시간들이 마술처럼 찾아온다. 그 둘은 이런 계절에 모두 길어진다는 공통점을 갖지만 그 느낌은 사뭇 다르다. 새벽이 아직 걷히지 않은 밤의 공기를 힘겹게 밀어내고 있는 안개라면 황혼은 낮의 열기를 능숙하게 가라앉히는 소나기 같다. 낮이 생(生)이고 밤이 죽음(死)의 표상이라면 새벽은 탄생과 유년의 시간이고, 황혼은 말 그대로 말년의 시간일 것이다. 그러나 그 탄생은 우리가 의도했던 것이 아니므로 새벽은 자연의 시간이다. 반면 어떤 형태로든 우리가 죽음을 맞이할 순간을 기다려온 것이라 할 때, 황혼은 인간의 시간이다. 그리고 봄의 황혼은 마치 안락사를 앞둔 인간에게 적당할 법한 시간이다.

 

저녁에도 여전히 그는 루체나를 생각하고 있다. 황혼이 천문학적으로 규정된 것보다 훨씬 길게 느껴지는 봄날 저녁이 있다. 그럴 때면 엷은 안개가 자욱히 도시 위로 내려앉아 축제 전날의 자유로운 저녁처럼 약간 긴장이 풀어진 분위기를 감돌게 한다. 또한 불빛은 그 아스라이 초록으로 반짝이는 안개 속에 사로잡혀 있는 듯이 보인다. 안개가 이미 검은 비단처럼 되었다 하더라도 여전히 밝은 빛살이 그 속에 있는 것이다. 이런 황혼은 아주 길다. 가게 주인들이 상점 문을 닫는 걸 잊을 정도로 길다. 그들은 경관이 지나가며 문 닫을 시간이 지났음을 미소로 깨우쳐 줄 때까지 문 앞에서 여자 고객들과 잡담을 나눈다. 그런 후에도 여전히 많은 상점에서 불빛이 반짝거리며 새어 나온다. 가게 뒤쪽께에서 가족이 저녁 식탁에 앉아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여느 때처럼 덧문을 입구 앞에 내놓는 것이 아니라 의자 하나를 그 앞에 세워 둠으로써 고객들에게 봉사가 끝났음을 보여 준다. 식사가 끝나면 그들은 밖으로 의자들을 가지고 나와서 가게 문 앞에 앉아 휴식을 취할 것이다. 거처가 점포 뒤에 있는 저 소상인들과 장인(匠人)들은 부러워할 만하다. 겨울이면 부러워할 만하다. 그들은 무거운 덧문을 앞에 쳐놓음으로써 이중으로 보호된 따뜻하고 밝은 방을 소유하게 되고, 크리스마스 때가 되면 그곳 유리문을 통해 장식된 나무가 가게를 향해 미소 짓는 것이다. 온화한 봄날 저녁과 가을 저녁엔 부러워할 만하다. 그들은 고양이를 무릎에 올려놓거나 강아지의 부드러운 목덜미를 어루만지며 문 앞에 앉아 있다. 마치 정원의 테라스에 앉아 있는 양.

 

헤르만 브로흐, 『몽유병자들』 중에서

 

나는 황혼에 관한 이보다 더 멋진 묘사를 알지 못한다. 봄날의 저녁들은 대체로 “천문학적으로 규정된 것보다 훨씬 길게 느껴지”고, “축제 전날의 자유로운 저녁처럼 약간 긴장이 풀어진 분위기를 감돌게”한다. 이 황혼의 시간을 “환한 저녁”이라 그리는 시인이 있다.

 

무거운 비구름 달 넘게 하늘을 닫았다 힐끔 열었다 닫았다

어두운 비 내리다 내리다 꾸물꾸물, 다시 뿌리다

불현 듯 환해진 이 저녁,

바람이 구름장 놓아주듯 삶이 나를 놓아주면

저녁 빛 속에 헐겁게 나르는 저 구름 조각처럼

가볍게 날아가버리자, 다짐하며 살았지만

이 저녁엔 굳이 이곳에 남아 있을 거다.

 

베란다도 밝아졌다. 혼자 피어 있는 베고니아

분홍빛 세 면이 속에 든 흰 씨 은은히 비추는 멋진 씨방에

볼품없이 붙어 있는 다섯 꽃잎 중에서도 눈에 안 띄게 숨은

조막손 꽃잎으로라도 붙어 있을 거다.

 

빗물 잔뜩 머금은 언덕을 오르다 발 비끗하더라도

오랜만에 환한 이 저녁

산책을 접을 수야 없지 않은가?

 

우산 쓰고도 아랫도리 흠뻑 젖은 어제 늦은 저녁

서교동 술집에 올라가 달마 그림 앞에서 옷과 마음을 말리다

난간 잡고 내려오던 가파른 나무계단,

 

문득 난간 놓고 인력(引力)에 몸 내주려 했던 손

찬찬히 들여다본다. 순간

공중 면벽(面壁)할 뻔했지.

 

(2013. 8.)

황동규, 「이 환한 저녁」 《문학동네》, 2013년 겨울호

 

불현 듯 환해진 저녁은 황혼의 다른 이름일 것이다. 설령 그것이 하얗고 노란 불빛으로 물들어가기 시작하는 저녁일지라도, 이젠 가볍게 날아가겠다는 꿈은 버리고 “굳이” 여기에 남아 있고자 하는 마음은 황혼의 것이다. 어떻게든 붙어 있는 꽃잎처럼 우리는 이 땅에서 중력에 몸을 내주고 있다. 그러다보면 “오랜만에 환한 이 저녁”을 맞이하는 순간도 찾아온다. 그 순간에 산책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 삶을 대하는 한 자세가 아니겠는가. 그러니 우리도 굳이 여기에 남아 봄날의 황혼을 맞이하자. 비밀을 속삭일 우리만의 시간을 고르자. 그리고 결코 산책을 포기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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