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경 감독의 <만신>.
여기저기서 이런 저런 이야기가 들렸지만, 딱히 관심이 생기지 않았었다.
어제 우연히 시간이 비어 이 영화를 보게 되었고 잘한 결정이었다.
이 영화는 형식에 관해 말할 수밖에 없다.
다분히 형식주의자인 나로서는 이 영화가 보여주는 여러 실험적 시도들을 흥미롭게 지켜봤다.
이를테면 첫 장면은 무당인 김금화가 이 영화가 잘 되라고 고사를 지내는 것으로 시작된다.
심지어 “영화를 보러 오신 관객님들도 만수무강하시오” 하는 식의 대사도(대사라는 말도 어색하다) 등장하니.
나로서는 상당히 당황스러웠지만, 이내 다큐멘터리의 형식이겠거니 마음을 진정 시켰다.
그런데 이게 좀 이상했다.
지나치게 잘 알려진 성우의 내래이션이 깔리더니 ‘재연’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게다가 그 어린 김금화의 모습을 지금의 진짜 김금화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지켜보기까지 한다.
이어지는 장면들은 대체로 김금화의 생애를 따라가면서 재연, 예전의 공연 영상, 각종 인터뷰, 현재의 김금화 등이 뒤엉키며 전개된다.
나는 이 영화가 왜 이런 방식을 사용했어야 하는자 계속 고민했다.
영화를 중간 정도까지 보았을 때, 나는 이 감독이 아마도 김금화라는 사람을 설명해내기 무척 어려워 했겠다고 짐작했다.
만신의 그 독특한 목소리와 행위들을 도저히 하나의 방식으로는 담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던 것 같고, 어쨌든 김금화를 등장시키지 않고서야 이 영화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런데 조금 더 영화를 보니, 이것은 김금화라는 인간의 내면이나 무당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들에 대한 이해 뿐만 아니라 한국 근대사의 질곡마저 다루고 있었다.
결국 만신의 굿은 결국 ‘거의 모든 것에 대한’ 것이며, 그래서 “종합예술”임을 이 감독은 말하고자 한 것이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니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결국 영화가 촬영되는 과정을 낱낱이 드러내버린다.
만신의 굿이 시디를 틀어놓고, 마이크를 사용해도 그 본질이 변하는 것은 아닌 것처럼, 영화 역시 카메라를 어떤 식으로 사용해도 그것은 결국 모두 영화라는 형식임을 이 감독이 보여준다.
삶은 연기이므로 곧 삶이 결국 영화임을 매순간 놀랍게 보여주었던 <홀리 모터스>의 경우처럼, <만신> 역시 굿이라는 퍼포먼스가 영화와 전혀 다르지 않음을, 영화야말로 굿의 한 형식일 수 있음을 흥미롭게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