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세랑, 이만큼 가까이(창비,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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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작가를 알게 되는 계기는 제법 여러 경로가 있는데, 이 작가는 트위터를 통해서였다.

배명훈의 열렬한 팔로워였던 나는 그와 대화를 나누는 한 동업자를 보게 되었고, 그게 이 작가였다.

정세랑이라는 이름의 이 작가 역시 SF 혹은 장르소설과 순수 혹은 본격소설의 경계에 애매하게 서 있는 듯 했다.

그리고 역시 또 배명훈과 마찬가지로 그 경계에 대해 쿨한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이런 작가의 소설이란 언제난 궁금한 법이어서 나는 그때, 그러니까 2년 전쯤인 것 같은데 <덧니가 보고 싶어>를 주문했었다.

그런데 꽤 많은 책들의 운명이 그렇듯, 결국 읽지 못한 채 지나가버리고 말았다.

그래도 이 작가에 대한 관심이 사라진 것은 아니어서 신작이 나왔다기에 얼른 사 보았다.

(밀린 숙제 같은 느낌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고, 수상에 대한 일종의 신뢰 같은 것도, 없었다면 거짓말이겠다.)

 

이 작가의 나이가 나와 같다는 사실을 펼치자마자 알게 되었다.

동시대, 혹은 세대적 공감과는 별개로 같은 나이에서 오는 묘한 동질감이 있다.

김사과의 작품을 읽으면서도 종종 그런데, 특히 우리 세대의 기억이나 현재의 고민 같은 것들을 서술할 때, 무언가 완벽히 공유되는 느낌이 있다.

이 소설이 정확히 1984년생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는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게다가 나는 파주나 일산 같은 기묘한 공간에 있지도 않았고, 남녀가 함께 청소년기를 보낸다는 것은 상상에서만 가능했던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의 어떤 문장들은 정확히 그 시절의 나를 가리키고, 지금의 나에게 쑥 들어와 박힌다.

다른 소설들에서 울림을 가져다주었던 문장과는 상당히 다른 느낌인데, 이를테면 김애란이나 김미월의 문장들과 비교했을 때 그렇다.

세계를 반짝이는 눈으로 명랑하게 바라보는 그런 작가들과 견주어보면, 사실 이 작가가 특별히 도드라 보이지는 않는다.

아니, 오히려 단점들이 눈에 띈다.

()과 추()는 거의 보이지 않는, 한없이 파란 시절과 인물들.

지나간 일들에 대한 과도한 애정(애도)과(와) 이를 뒷받침하는 은근한 세대적 자부심.

드러내지 않으려고 아주 애쓰고 있지만 감출 수 없는 일종의 ‘구별짓기’.

이 정도면 소설을 읽어가면서 내내 실망과 한숨을 동반했어야 정상이다.

그렇지만 나는 이 소설을 따라가면서 가슴이 떨렸다. 그건 정말이지 내가 84년생이라 그랬을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이 소설이 수상을 할 수 있었던 것은 투고작 중 “가장 잘 쓴” 소설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심사위원들이 이 소설을 읽으며 내가 느낀 어떤 것을 함께 느꼈을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니 나로서는 그저 고마워할 수밖에 없다.

이 책 덕분에 나는 내 시절의 이야기 하나를 갖게 되었다.

덧. 이 책의 원제는 <하주>였다고 알고 있다.

소설을 읽어보면 왜 “하주”라는 제목이 붙어야 했는지 대번에 알 수 있다.

제목을 바꾼 것은 아마 출판사의 제안이었을 것이고, 소설의 분위기를 어느 정도 담고 있다고 생각이 된다.

그런데 <언더, 썬더, 텐더>도 괜찮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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