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재, 내 이름은 술래(한겨레출판,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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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접하는 작가이고, 첫 장편이라고 한다.

제목이 <내 이름은 술래>여서, 또 프롤로그의 미묘함 때문에 오르한 파묵의 패러디인가 했으나 그건 아니었다.

이 소설은 두 명의 주인공을 갖고 있으며, 이 둘의 시점에서 병렬적으로 소설이 진행되다가 어느 순간 그 둘이 만나게 되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한 사람은 어떤 ‘나쁜 일’로 죽음을 당한 열 살의 소녀(실제로는 여덟 살에 죽었지만), 다른 한 사람은 지독한 과거를 가진, 죽음을 목전에 둔 노인이다.

연재소설이었기 때문인지 지나치게 구성에 몰두한 느낌이다.

프롤로그와 1, 2, 3부, 그리고 에필로그로 이루어진 이 소설은 또 여러 개의 장으로 나뉘어져 있다.

두 개의 목소리를 담아내기 위한 고심이었다고는 생각되나 조금 아쉽다.

자꾸 핵심을 감추고 숨겨서 후반부에 공개하고 있는데, 이게 좀 밀도를 떨어뜨린다.

특히 사실은 굉장히 단순한 서사인데, 이를 지나치게 비틀고 꼬았다는 인상이다.

독자가 중반부까지 상당한 공력을 동원해 읽어나가다 보면 후반부의 ‘급전’에서 남아 있는 힘이 별로 없다.

이 좋은 이야기를 왜 ‘반전’의 형식으로 풀어내는지 모르겠다.

저 두 주인공은 훨씬 더 일찍 만났어야 하고, 이들의 ‘사건’은 더 자세히 묘사되었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은 정말이지 영복이와 광식이 때문에 충분히 읽은 가치가 있다.

요컨대 사건보다는 인물에 초점이 가 있는데, 탈북 소년인 영복과 치매 노인 광식이 행하는 ‘조력자’의 방식은 많은 울림을 준다.

술래와 박필순이 완전한 죽음에 다다를 수 있었던 건 오롯이 저 두 인물들 덕분이다.

그리고 저들 덕분에 우리도 너그럽게 이 소설을 덮을 수 있다.

“보는 게 많아지니까 필요한 것도 점점 많아지더란” 영복의 말이나, 죽음을 준비하는 것은 “매일매일 빤스만 잘 갈아 입으면 된다”는 광식의 말들이 그렇다.

 

황정은이나 최진영이 그랬듯 김선재에게도 일종의 경향이 보인다.

보이지 않는 존재들, 너무도 사소해 들리지 않는 목소리들, 같은 것에 관심을 두고 있다.

술래라는 이름부터가 그러한데, 작가가 이렇게 써 놓았다.

“술래는 숨은 걸 찾는 사람이잖아. 그러기 위해서는 잘 안 들리는 소리나 잘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고 들을 수 있어햐 해.”

나는 이것이 “소설이 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혹 단순하게 치부되진 않을까 염려스럽다.

그러니까 치유나 회복의 과정이 이야기로 가능하다는 식의 설정.

이야기가 “이 어둠을 견딜 수 있게 하는 유일한 힘”이라는 술래의 말이나, 결국 마지막 치유의 과정으로 “고백의 글쓰기”를 선택한 박필순의 모습 같은 게 그렇다.

그러니까 소설은 왜 이야기가 그러한 힘을 갖는지를 이야기를 “통해” 보여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게 없다면 이렇게 긴 이야기를 쓸 이유가 없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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