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에 읽은 시

오독으로 애도하기 – 이성복의 시들

 

(이 글은 월간 <심상> 4월호에 실릴 예정입니다)

 

4월이 잔인한 달이라고 말한 누군가가 있었다지만, 그런 말조차 조심스러운 시절이다.

큰 사건이 있었고, 모두의 마음속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상처를 남겼다.

무엇 하나 문제되지 않을 것이 없어서 이 난국을 도대체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할지 막막할 지경이다.

무수한 허언(虛言)들이 세상을 떠다니고, 서로 다른 숫자들이 매일 변해가는 세계를 우리는 끔찍하게 목도하며 살고 있다.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

이 단 한마디의 말은 우리로 하여금 얼마나 참담하게 만드는지.

어떤 정치인의 말은 우리를 분노하게 하고, 또 어떤 앵커의 말은 우리를 주저앉게 만들며, 또 어떤 유가족의 말은 우리를 정말로 슬프게 만든다.

세상의 잔인하고 끔찍한 단어들이 모두 모여 연일 우리의 눈앞을 어지럽게 만들 때, 우리는 어떻게 버텨야 할 것인가.

봄에 쏟아져 나온 수많은 시들을 일별하면서, 새삼 한국의 시인들이 얼마나 현실에 천착하고 있는지를 느꼈다.

그냥 지나치기 쉬웠던 말들이 하나하나 폐부를 찔렀다.

시인들은 지금 우리의 현실이 얼마나 비인간적인지, 그래서 현실의 어법으로는 도저히 말할 수 없음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 중 이성복을 읽기로 했다. 최소한으로 말하며 애도하기에 가장 적절했기 때문이다.

 

 

 

 

1

저 여자를 보면 막 눈물이 난다 아까 방금 전철에서 만난 여자였는데, 내가 울어야 할 아무 이유가 없는데, 그냥 저 여자가 반월당 가려면 어디로 가야 하는지 물은 것뿐인데 갑자기 반월성이 무너지고 겁에 질린 사람들 비명 지르며 몰려나오고 그 가운데 저 여자가 나를 돌아보며 겁에 질려 부들부들 떨 때, 내 몸 똬리 풀리며 가엾은 여자를 덮치려 할 때, 나도 몰래 눈물 흘리며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를 때!

 

2

지금 내 앞에서 목도 머리도 없이 절룩이며 걸어오는 저 사내는 내가 靈界에서 올라올 때 앞을 가로막기에 무심코 베어버린 녀석, 그런 식으로 내가 잠 깰 때마다 얼마나 많은 살생을 저질렀던가 또한 오늘 내가 먹은 음식들, 돼지 삼겹살과 닭갈비는 지금 내가 이 삶에서 몸부림치며 깨어나기 위해 피눈물도 없이 행하는 屠戮, 그러니 그 불쌍한 것들을 쳐 죽이며 예끼 成佛하거라! 하는 농담은 하지 말자, 아 부끄럽지 않은가, 부끄럽지 않은가, 이 삶이란 것!

 

이성복,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를 때」 전문, 《문학과사회》, 2014년 봄호

 

 

 

이제 한국 시단의 거목이 되어버린 이 시인이 내던진 말들은 마치 이 비극을 예견이라도 한 듯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이 땅의 삶 자체가 이미 비극이었음을 말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우리가 이 비극의 세계를 이제야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행여 내쳐질까봐 숨죽여 살아 왔던, 그래서 이것이 나라냐고도 묻지 못했고, 모든 것이 망해버렸다는 것을 알면서도 아직 희망이 있다고 믿어 왔던 ‘미개’한 우리가 비로소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우연히 마주친 여인이 길을 묻는 순간에 시인은 이미 재난을 본다.

이 재난은 물론 반월성이 무너지는, 환상의 감각에 기초한 것이다.

그러나 잘못 읽어 보기로 하자.

알 수 없이 눈물이 난다.

내가 왜 이러는지 당연히 알 수 없다.

나는 그저 길을 알려준 것뿐이고, 그마저도 무너진(질) 성곽이 아니라 평범한 동네 이름이었다.

그런데 나는 이유 없는 눈물을 흘릴 뿐만 아니라 겁에 질려 떨고 있는 여자를 “덮치려”고 한다.

이것을 ‘고통에 공감하는 가해자’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혹은 상처를 덮어버리고 재빨리 일상을 회복하고자 하는 우리의 모습일지도 모르겠다.

문제는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다시, 삶은 너무도 부끄러운 것이 된다.

내가 꿈과 현실을 가리지 않고 저질러온 “도륙(屠戮)” 때문이다.

삶에서 ‘깨어난다’라는 시인의 표현에 주목한다.

깨어나는 것이 왜 “잠”뿐이겠는가.

영계(靈界)로 들어가는 과정 역시 삶에서 깨어나야 가능하다.

이 무너진 경계에서 살생의 의미는 독특하다.

내가 누군가를 죽여서 잠에서 깨어난 것이 아니라, 잠에서 깨어나기 위해 어떤 남자를 죽였다는 것이다.

이를 삶의 차원으로 옮기면 살기 위해 삼겹살과 닭갈비를 먹는 행위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러니 너무도 부끄러울 수밖에.

내가, 아니 우리가 왜 이러는지 모르는 지금, 삶이란 결국 다른 이의 죽음을 먹고 이어진다는 것에 끝없이 부끄러워 할 수밖에.

 

 

 

이상하다 개가 짖지 않는다 앞집 개가 짖지를 않는다

한번 짖기 시작하면 일 분 간격을 두고 두세 시간을

내리 짖던 녀석이 짖지를 않는다 손님 온 것도 아니고

도둑놈 온 것도 아닌데 무슨 外傷이 있어서가 아니면

그렇게 짖을 이유가 없는 놈이 설 쇠고 며칠 사무실을

나오지 않다가 나와보니 딱 짖지를 않는다 며칠 전

들른 내 친구가 저 녀석은 아무래도 동물병원 가서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될 것 같다고 했었는데 정말

정신과 치료를 받았는지 짖지를 않는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간혹 짖기도 한다 짖기는 짖지만 한두 번

컹컹거리다가 딱 그치고 만다 아무래도 저 녀석이

달라진 게 틀림없다 그렇다면 제 주인이 정신병원에

데리고 갔거나 아니면 제가 그토록 못 잊어하거나

아파하던 문제가 해결되었거나, 해결은 안 되었어도

제 스스로 마음을 고쳐먹었거나 어떻든 달라졌다

달라진 건 좋으나 나는 왠지 마음이 불편하다 조금

편하기도 하지만 어딘가 불편하다 제가 한참 짖어

댈 때 내가 저를 많이 미워했기 때문이다 저렇게

짖자면 저는 얼마나 괴로울까, 생각을 안 한 것은

아니지만 아휴, 저놈의 개 어디 나가 죽었으면, 하는

마음이 없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건 누구나

그렇지 않을까 남들 괴로워하는 모습 보면 당연히

같이 힘들어야 할 텐데, 자꾸 미운 마음이 드는 건

왜일까 미운 정도가 아니라 아예 없어졌으면, 아니

당장 없애버리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건 왜일까 문제는

그런 마음이 들고 나면 그런 마음을 가졌다는 것

때문에 또 괴로워지는 것이다 그러니까 미워하는

것은 미워한 것에 대한 죄책감도 포함하는 것이다

그러나 다시 저 개가 짖기 시작한다면 나는 녀석을

사정없이 미워하리라 혼신의 힘을 다해 미워하리라

불구대천의 원수처럼 미워하리라 젖 먹던 힘을 다해

미워하리라 그리고 후회의 구렁텅이에서 주님, 나의

주님을 부르리라 그분은 나를 미워하지 않으리라

 

이성복, 「참회」 전문, 《문학과사회》, 2014년 봄호

 

 

 

 

미워해야 할 사람이 많다.

미워하는 것으로는 부족할 사람들도 많다.

하지만 미움에는 괴로움이 따른다.

마음껏 미워한다는 것은 그러므로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미움에는 타인을 이해하려는 마음이 전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그 미움의 대상이 미움의 행위를 중지한다면 그때 미움은 자리를 잃고 “죄책감”을 동반한다.

우리는 그래서 미움의 순간에서조차 자기 검열을 작동시킨다.

하지만 이 시인은 “사정없이” “혼신의 힘을 다해” 미워해 볼 것이라 다짐한다.

그리고 그 극단적인 미움의 끝에서 주님을 부르겠다고 말한다.

결코 미워하지 않는 주님에게 나의 미움을 고백하는 일을 “참회”라고 부를 수 있다면, 그리고 그 참회를 통해 “후회의 구렁텅이에서” 빠져 나올 수 있다면 마음껏 미워해 보고 싶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을까.

그러나 우리는 그럴 수 없다.

시인이 “미워하리라”, “부르리라”, “않으리라” 등의 표현을 쓴 것은 그 불가능성을 염두에 둔 것일 테다.

이런 마음은 언제나 다짐으로 그치고 말 것이다.

미움의 극단을 혐오라고 명명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집단은 그러한 ‘마음껏 미워하기’, 그러니까 ‘극혐’을 실천하고 있는 듯하다.

그들에게 몇몇 사람과 특정 지역 등은 “불구대천의 원수”라서 “젖 먹던 힘을 다해” 미워하는 것 같다.

이들의 행위가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다면 이런 구절 때문일 것이다.

“남들 괴로워하는 모습 보면 당연히/ 같이 힘들어야 할 텐데, 자꾸 미운 마음이 드는 건/ 왜일까 미운 정도가 아니라 아예 없어졌으면, 아니/ 당장 없애버리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건 왜일까.”

누군들 이렇지 않겠는가. 그 대상과 상황은 각자 다를지라도 마음껏 미워하고 싶은 마음이야말로 우리 모두의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런 마음이 들고 나면 그런 마음을 가졌다는 것/ 때문에 또 괴로워지는 것이다 그러니까 미워하는/ 것은 미워한 것에 대한 죄책감도 포함하는 것이다.”

죄책감 없는 미움, 순수한 미움이란 존재할 수 없다.

하물며 그것이 인간의 관계에서라면 더더욱 그렇다.

그러니 이렇게 말해주어야 할 것이다.

당신들에게 주님 비슷한 것이 있더라도, 그래서 참회가 가능하더라도 그 미움은 가짜다.

또 우리는 이렇게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미워하는 것으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

 

 

 

 

봄에 무언가 싹이 푸르렀는데 오빠가 올 것 같았는데 내게 오빠 같은 것은 없었는데 오빠는 자꾸 올 것 같고 눈물은 안 나고 마지막 기차가 떠나기 전에 오빠가 올 것 같았는데 꼭 내 오빠가 아니라도, 네 오빠 그 오빠라도 오빠라는 사람은 기어코 오고야 말 것 같았는데 아, 해가 가고 달이 뜨지를 않더라도 나는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 옛날 신라 때 사람 고려 때 사람 다 지나가도 오빠는 오지 않고, 비록 어느 오빠가 오더라도 영영 나를 알아보지 못할 것 같았는데 이 눈물 콧물 다 마르고 나면 이산저산 기슭에서 죽지랑이나 기파랑이나 나를 보고 반갑게 인사할 것 같아서, 나는 패랭이꽃 같은 것도 한쪽 귀에 꽂아보려 하지만, 텅 빈 두개골엔 살얼음 끼고, 나는 또 거기 먹다 남은 라면 국물이나 퍼다 버리기나 하고

 

이성복, 「오빠를 기다리며」 전문, 《문학동네》, 2014년 봄호

 

 

 

 

슬픔은 한 문장이다. 슬픔에 마침표가 어디 있겠는가, 쉼표뿐이다.

이렇게 이 시의 형식을 지적하고.

 

슬픔은 구체적인 감정이다. 흐릿하고 희미한 슬픔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신라”, “고려”, “죽지랑”, “기파랑”과 같은 어휘들은 “라면 국물”이라는 단어를 만나 비로소 실감을 획득한다.

또 이렇게 이 시의 성취를 말하는 것으로 그만둔다.

 

 

그저 이 시에 “세월호”라는 부제를 붙여, 읽고 또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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