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솔뫼, 그럼 무얼 부르지(자음과모음, 2014)

이걸 무어라 부르지

(이 글은 계간 <실천문학> 여름호에 게재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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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신인’이라는 수식어가 어색한 박솔뫼의 첫 소설집이다. 데뷔작 『을』(자음과모음, 2010)이 던진 잔잔한 파문은 이후 이 작가가 발표한 여러 작품들에 이어졌고, 그것은 대개 호의적인 것이었다. 나로서는 이 작가가 배수아와 한강의 중간 정도에 서 있는 것처럼 느껴졌고, 『백 행을 쓰고 싶다』(문학과지성사, 2013)에 이르러서는 조금 무덤덤한 표정을 지었던 것 같다. 그렇지만 이 작가의 단편들에는 계속해서 주목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사유의 깊이나 문체의 새로움 같은 것이 아니라 어떤 ‘세대감’ 때문이었다. ‘무성(無性)’의 인물들이 등장해 ‘무위(無爲)’의 사건을 발생시킨다는 것을 그 특징으로 꼽을 수 있겠으나(박솔뫼를 해설한 몇몇 비평가들이 이미 지적한 바 있다)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이 세대감을 해명하는 것이야말로 박솔뫼를 그 자체로 읽을 수 있게 만들 것이다.

그 전에 “그 자체”라는 수사를 주목해 보자. 이것은 박솔뫼를 읽어내는 데 유효하다. 이 작가의 소설에는 유독 잠과 꿈이 자주 등장한다. 잠이나 꿈은 상당히 독특한 어감을 갖는데, 그것은 소위 동족목적어(cognate object)라 불린다. ‘잠을 자다’, ‘꿈을 꾸다’와 같은 어구에서 동사의 명사형이 그대로 목적어로 가능한 것을 가리킨다. 이것은 서구의 문법 용어를 빌려온 것이고, 실제로 잠이나 꿈은 영어로도 동족목적어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한국어에서 이 현상은 훨씬 독특하게 나타난다. ‘춤’이나 ‘삶’을 비롯해 ‘그림’, ‘걸음’, ‘울음’ 등을 적용해 보라. 아마도 개개인의 어감에 따라 어색하게 느껴지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아무튼 문제는 박솔뫼가 이렇게 서술한다는 것에 있다.

 

사장은 어느 날 나에게 출근하기 전에 무엇을 하느냐고 물었고 나는 잠을 잔다고 말했다. 잠을 잔다. 잠을 자고 꿈을 꾼다. 거기에는 뭔가가 있다. 이불 속에 누나가 있는 것처럼, 이불 속에 누나가 있는 것을 느끼는 것처럼, 잠을 자고 꿈을 꾸는 것에는 무언가가 있다. 꿈을 꾸는 느낌은, 이불 속의 누나와 이야기하는 느낌이다. 꿈에서 깨어 지난밤 꿈을 생각하는 일은 어젯밤 나를 안고 있던 누나의 팔을 생각하는 기분이다. 그 모든 것에는 무언가가 있다.(「차가운 혀」, 15면)

 

잠과 꿈에 관해서라면 『을』이 훨씬 더 유용한 텍스트이지만 이 소설집에서도 잠을 자고, 꿈을 꾸는 것에 “뭔가가 있다”는 사유가 배면에 깔려 있다. 그 “무언가”를 언어화할 수 없음은 당연하다. 그것은 마치 “잠을 자다”와 “꿈을 꾸다”라는 말을 내뱉을 때 느껴지는 기묘한 낯섦과도 비슷하다. 박솔뫼의 작품에서 영화나 연극, 또 극장이나 무대가 중요한 모티프로 기능한다는 것은 새삼스러운 지적이지만 이것이 잠과 꿈의 매커니즘을 공유한다는 지적은 드물어 보인다. 세계를 경험한다는 것은 현실의 직접성뿐만 아니라 환상과 미디어의 간접성으로부터도 오는 것이고, 오히려 그러한 간접성이 박솔뫼의 인물들에게는 더 큰 비중을 갖는다. 그러니 도리어 간접성이라는 말은 어폐를 갖고, 무엇이 직접이고 간접인지 구분하는 것은 무의미할 것이다. 바로 이럴 때 “그 자체”라는 수사가 의미를 가진다. 꿈을 꾸는 인물들, 무대를 바라보는 인물들은 세계의 일부로 그것을 경험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순간 “그 자체”가 된다(이 구절을 인용하지 않을 수 없다. “민주는 어젯밤의 잠처럼, 이것은 어떤 그 자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잠 그 자체의 잠, 꿈 그 자체의 꿈처럼 어떤 그 자체. 민주는 이 시간을 어느 순간에라도 소리 내어 불러내지 않겠다고 안개에 대고 속삭였다. 아무도 듣지 못하게 은밀한 목소리로 말이다. 이것은 실제로 불러내어지지 않는 어떤 그 자체였다.”(『을』, 48면))

따라서 박솔뫼가 꿈꾸는 궁극의 “그 자체”는 당연히 소설이 되지 않을 수 없다(그 시도가 『백 행을 쓰고 싶다』이지 않았을까. 이 책의 해설을 쓴 조효원은 박솔뫼의 글쓰기가 일종의 기로에 서 있으며 그것은 ‘문학’과 ‘세계의 산문’이라는 갈림길 앞임을 언급한 바 있다. 대체로 동의하지만 나는 박솔뫼의 위태로운 균형이 무너지는 순간에 “그 자체”의 글쓰기가 실현되지 않을까 생각한다).「안나의 테이블」에 등장하는 소설가-서술자는 자신이 소설가라는 자각은 뚜렷하지만 나르시시즘에 빠지지 않는다. 소설 그 자체를 위해서는 작가의 특권적 지위를 내려놓는 동시에 자신이 바로 이 소설의 작가임을 끊임없이 되새겨야 한다. 그래야 일곱 살의 조카에게 수수께끼를 내면서 이렇게 쓸 수 있는 것이다.

 

모두 다 함께 이야기해서, 무엇이 무엇인지 말해주면 좋겠다. 조카는 이미 답을 알고 있거나 일곱 살을 일곱 번 살아도 알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어쨌거나 답은 많을수록 좋은 것이지? 그렇다고 대답하고 이제 하나부터 무얼까 생각해볼 시간이다.(「안나의 테이블」, 227면)

 

이 작품의 마지막 문단에서 사용하고 있는 작가의 문체를 주목해야 한다. 조심스러운 전망과 바람, 추측과 질문, 희미한 다짐 같은 것으로 읽히는 어미들이 섬세하다. 그러면서 “무엇이 무엇인지”, “답은 많을수록 좋은 것”이니까 “생각해볼 시간”이라고 작가는 쓰고 있다. 결국 “무엇”이라고밖에 명명할 수 없는 그것, 이미 알고 있는 것이면서도 영원히 알 수 없는 “무엇”, 그래서 하나하나 생각해볼 도리밖에 없는 “무엇”을 그저 “무엇”이라고 쓸 수밖에 없는 것도 어쩌면 당연하다.

 

앞서 언급한 어떤 “세대감”이라는 것이 그저 “무엇”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는 것임을 이야기하기 위해 많이 돌아왔다. 몇 작품을 더 읽어보자.

「해만」과 「해만의 지도」는 “해만”이라는 가상의 섬을 배경으로 한다. 그곳에는 “수도”의 학교로부터, 직장으로부터 떠나온 사람들이 모여든다. 그들은 해만에서 책을 읽고, 요리를 하며, 노래를 부르고, 잠을 잔다. 그리고 부모에게 붙잡혀서 혹은 돈이 떨어져 다시 수도로 돌아간다. 이 인물들에게서 일종의 무기력함을 읽어내는 것은 쉬운 일이지만 이들에게 공감하고 다시 그 인물들을 비평적 언어로 써내는 일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그럼 무얼 부르지」는 조금 더 구체적이다. 이 세대에게 1980년의 광주는 대학의 선배에게 전해 듣는 사건이 아니다. 그렇다고 그것을 책이나 영상을 통해 학습하는 세대도 아니다. 1980년의 광주란 한국어와 한국문화를 공부하고자 하는 외국인을 통해 “아 5·18이 May eighteenth구나”하고 깨닫는 정도의 실감인 것이다. 이는 결코 비판의 지점이 될 수 없다. 세대적 정체성을 형성하는 것은 그 세대들이 아니라 그 세대를 둘러싼 세계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걸 대체 무어라 부를 수 있을까.

이 소설집에 실린 소설들은, 작가의 말에서도 밝혀 놓았지만 “데뷔하고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하던 때의 소설들”이고, 그것은 2010~2012년 정도의 기간에 씌어진 일곱 편이다. 그 이후에 씌어져 여기 실리지 못한 단편들도 그 수를 헤아리면 아마 일곱 편에 가까울 것이다. 굳이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이 작가가 놀랍게도 ‘다시 쓰기’나 ‘겹쳐 쓰기’ 같은 방식을 통해 연작성을 구현하고 있기 때문이다(소설집의 해설을 쓴 손정수 역시 박솔뫼의 소설 전체가 모티프의 공유를 통해 연결 구조를 이루며 그것은 끊임없이 확장되는 양상을 보인다고 설명한다). “해만”, “수도”, “부산” 등의 지명, “영화”나 “극장”, “노래방”과 같은 공간적 알레고리(이 표현은 김형중의 것을 빌린 것이다), “잠”과 “꿈”의 반복, 여러 인물들의 재등장 등이 그러하다. 아마 가장 최근작이라고 생각되는 「어두운 밤을 향해 흔들흔들」(《21세기문학》, 2014년 봄호)조차 “부산”을 공유하고 있다. 그러니 박솔뫼를 읽으려면 ‘전부 다’ 읽어야 한다. 그리고 ‘계속해서’ 읽어야 한다. 무엇이 무엇인지에 대답하기 위해서, 대답은 많을수록 좋으므로.

 

이 지면은 『그럼 무얼 부르지』에 할애된 공간이므로 애써 빼먹은 이야기가 있는데, 그것은 원전 사고에 대한 박솔뫼의 관심이다. 1980년의 광주가 가질 수 없는 실감을 2011년의 후쿠시마가 가져다준다. 게다가 그것은 자칫하면 세계가 ‘망해버린다’는 종말의 실감이다(이에 관해서는 황현경의 「꽃과 총-다시, 멸망 전야의 소설」(《문학동네》, 2013년 가을호)이 자세하다. 박솔뫼의 소설에서 또 하나 주목해야 하는 것이 “노래”인데, 그는 노래로 대표되는 일상의 사소함들이 간신히, 혹은 희미하게 세상을 원래대로 있게 만드는 힘이라 믿고 있다. 그랬으면 좋겠다). 이 지점이 “세대감”을 설명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해묵은 표현이지만 이에 관해서는 지면을 달리할 수밖에 없다. 다만 이 글을 읽게 될 익명의 독자에게 이 ‘사실’만 적시한다.

 

세월호가 침몰했던 지난 4월 16일, 원자력안전위원회는 부산의 고리원전 핵발전소 1호기의 재가동을 승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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