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순례, 낙타의 뿔(은행나무, 2014)

생의 비자를 발급받는 적절한 방식

(이 글은 계간 <문학의 오늘> 여름호 “이것이 문제작이다”에 실릴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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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한국 문학은 단편소설이 그래도 승한 편이고, 장편의 경우도 한창 연재를 진행하다가 출간되는 편이라 신작 장편 소설들을 낯설게 대할 일이 적다. 게다가 대개의 새로운 장편 소설이라는 게 각종 문학상 수상작이다 보니 기대는 잔뜩 커지고, 결국 흡족함보다는 실망감이 더해지는 사례가 많다. 여러 작품들을 읽어나가다 보면 새삼 훌륭한 소설(novel)을 쓰는 일이란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절감하게 된다. 그래도 눈을 크게 뜨고 좋은 작품을 찾기 위해 두리번거리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비평가의 일이다. 지난 계절까지도 이어져 온 장편소설론에 관한 문단의 끊이지 않는 논의는 이러한 고민들이 켜켜이 쌓인 결과라 봐도 좋을 것이다. 그런데 그 논의에 답이 있을 리가 만무하다. 작품을 써내는 것은 결국 작가이고, 비평가들의 주문이 먹혀들 시대도 아니라는 점을 상기하면, 결국 유일한 방법은 더 많이 읽어내는 것만이 아닌가 싶다.

 

2

어떤 소설도 나쁜 것은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다양한 소설들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독자에게는 즐거운 일이고, 그런 소설들을 빼놓지 않고 비평(critic)하는 것이 비평가의 임무라고도, 생각한다. 특히 작가의 이름이나 작품의 후광에 기대지 않고 모험을 한 번 걸어보는 것은 전적으로 비평가의 즐거움이 아닐 수 없다고 생각되는데, 그것은 이른바 전작(全作)이라고 명명되는 따끈따끈한 소설일 경우 더욱 그렇다. 비평가들에게는 자기 앞에 던져진, 정체를 알 수 없는 두툼한 책이 불러일으키는 설렘과 흥분에 몸을 맡길 기회가 별로 많지 않기 때문에 또 그러하다.

이 지면에서 다루게 될 쓴 윤순례 작가는 20여 년 전에 등단해서 10년 전쯤 첫 장편 소설을 쓰고, 이제야 두 번째 소설을 내놓는다. 한 차례 발간된 소설집을 포함하더라도 보통 과작(寡作)이 아니다. 그간 주목을 받지 못한 것은 아니었으나 내놓고 앞서 등장하는 작가도 아니었다. 계간지에 꾸준히 단편소설을 발표하고, 여러 기회를 통해 장편 연재를 진행하는, 그래서 1~2년에 한 권씩 작품을 내는 이른바 문단권 작가와 이 작가는 거리가 멀다. 문단이라는 것 바깥에 훨씬 더 많은 작가가 존재하는 것은 확실하고, 그 작품들에 눈길을 소홀히 했음도 분명하다. 그런 작품들은 대개 전작의 형태로 조용하게 서점에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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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타의 뿔』이 그렇게 조용하게 놓여 있는 한 편의 전작 소설이다. 여기에 문제작이라는 딱지를 붙여 보고자 한다. 문제작이라는 말이야말로 문제적인데, 그것은 대체로 두 가지 상반된 의미를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하나는 문제가 있는 작품이라는 부정적 함의로, 다른 하나는 어떤 식으로든 논의할 가치가 있는, 주목할 만한 작품이라는 긍정적 함의일 것이다. 물론 사전적 의미는 후자를 가리키고, 문제작이라는 수사를 정말로 ‘문제가 되는’ 작품에 쓰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런데 문제라는 단어 자체가 갖는 중립적이거나 약간은 부정적은 의미를 생각해보면 문제작이란 말을 꼭 사전적 의미로만 받아들일 필요는 없어 보인다. 요컨대 문제작이란 결국 문제가 있는 작품이 아닐까. 어떤 소설도 나쁜 것은 없듯이, 어떤 문제작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며, 문제가 있는 작품이야말로 문제작의 가능성을 품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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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설이 길었다. 이제 소설을 읽자.

이 소설은 궁전빌라 301호에서 살아가는 ‘효은’이라는 스물넷의 주인공을 찬찬히 따라가는 소설이다. 상처를 안고 삶을 살아가는 한 인물을 이 작가는 ‘적절한’ 방식으로 비추고 있다. 그것을 최소한의 기교라 표현하고 싶다. 이 소설은 300여 페이지에 달하는 이야기를 흔들림 없이, 꾸준하게 전달한다. 에필로그를 제외한 아홉 개의 장은 대략 10여 개의 끊어질 듯 이어지는 텍스트 조각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 방식은 주인공인 ‘나’에 의해, 그리고 대체로 시간을 역전시키지 않는 선형적 서술들에 의해 차분하게 전개된다. 독특하게 튀어 오르는 장면도 없고, 독자를 자극하는 신파도 없다. 이 응시가 미더운 까닭은 작가가 삶의 불연속성을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끊어질 듯 이어지는” 서사라 언급한 것은 그러한 특징을 염두에 둔 것이다. 잘게 분절된 단락들은 불연속적이지만 또 하나의 큰 이야기라는 측면에서는 연속적이다. 삶에 대한 작가의 관점이 서사적 기법으로 적용되었을 것이란 추측은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달달 외운 사람처럼 낙타에 대해 잘난 척을 하던 구씨가 곧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낙타에게는 아주 오래전 신이 준 뿔이 있었는데 사슴의 꾐에 빠져 뿔을 빌려주고 못 받았기 때문에 우아하게 살 수가 없는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지금도 낙타는 지평선만 바라보며 돌아오지 않는 사슴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란다.(189면)

 

이 작품이 던지는 중요한 메시지 중 하나는 ‘떠나간 것에 대한 그리움’ 혹은 ‘삶의 근원적 공허함’이라고 할 수 있고, 그것은 “낙타의 뿔”이라는 표상에 집약되어 있다. 소설의 제목이기도 한 이 표상은 작품 전체를 지탱하는 역할을 한다. 몽골 설화에서 가져온 이 짧은 이야기가 소설의 전면에 배치되어 있고, 아홉 개의 장 제목 역시 설화의 구절을 따왔으며, 인용한 대로 작중 인물에 의해 다시 한 번 언급된다.

낙타의 이야기가 등장하게 된 것은 한 장의 엽서 때문이었다. 연인이었던 규용의 죽음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효은은 “사막에는 그리움이 모래알처럼 퍼져 있습니다”로 시작하는 엽서를 ‘살아 있는’ 규용이 사막에서 보내온 것으로 ‘착각’한다. 이 엽서는 아마도 죽기 전 규용이 효은에게 주었던 것일 테다. “소인이 지워진 지 오래인, 발신인도 수신인도 없는 엽서”는 동네 문방구에서나 파는 몇백 원짜리 엽서였을 것이고, 거기에 그려진 쌍봉낙타의 모습에 이유 없이 반해 규용이 자신의 이니셜 g를 새겨 효은에게 주었을 것이다. 그 엽서 때문에 효은은 규용의 죽음을 인정하지 않을 구실을 찾게 된다. 매일 우편함을 뒤지는 것은 물론이고, 규용이 몽골의 사막 어딘가를 헤매고 있을 거라 여기며, “나를 두고, 곧 태어날 아이를 두고 규용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리가 없지”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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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환상’을 작가가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에 주목해본다. 작가는 이를 서사적 차원의 환상으로 끌어올리지 않는다. 예컨대 규용에 관한 꿈이라든가 시공간을 달리한 어떤 화소들, 혹은 아포리즘 같은 것을 동원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이를 일상적 차원으로 끌어내리지도 않는다. 그래서 아래의 장면 같은 것이 문제적이다.

 

“우리 규용이놈 위해서 안 그래도 매년 치성을 드렸어. 생때같은 아들놈 죽인 년이 그것밖에 할 게 없어. 이왕 안 가고 버텼으니까, 올해는 우리 규용이 치성 드리는 곳에 나랑 함께 가.”

“규용이는 죽지 않았어요. 사막에서 내게 엽서를 보냈다고요. 사막. 낙타가 많고 건조한 바람이 쉴 새 없이 불어오는 사막에서요.”

나는 발이라도 구를 듯 소리를 높였다.(81면)

 

“규용인 죽지 않았다니까……”

나는 달을 향해 발악하듯 악다구니를 썼다. 생애 처음으로 소리라는 것을 밖으로 내어보는 것처럼 몸이 뒤틀리고 오장육부가 튀어나올 듯 요동을 쳤다.(89면)

 

규용의 어머니를 찾아간 효은은 끝내 자신을 추스르지 못한다. 규용의 어머니를 향한 복잡한 감정들과 그곳에서 지켜본 규용의 마지막 모습들이 그녀를 괴롭히기 때문이다. 규용의 어머니 역시 효은을 바라보는 그 복잡한 감정들 때문에 효은의 방문을 애써 무시한다. 결국 효은이 초주검의 상태가 되어서야 규용의 어머니는 효은을 찾고, 이들의 화해는 이루어진다.

첫 번째 장면에서 효은의 발화는 실제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녀가 소리 높여 말한 것은 자신의 내면에서 이루어진 것이지 현실에서 벌어진 것이 아니다. 그것은 두 번째 장면이 증명하고 있다. 규용의 넋을 기리는 바다 앞 절벽에서야 비로소 그녀는 태어나서 처음 소리를 지르는 사람처럼 규용이 죽지 않았다고 외치고 있다. 규용이 죽지 않았다는 환상을 현실을 차원으로 끌어내렸다면 효은은 허공을 걸어 다니는 유령 같은 인물이 되어야만 했을 것이다. 그랬다면 이 소설은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진행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 작가는 효은이라는 인물을 ‘적절하게’ 통제하고 있다. 그것은 삶에 대한 작가의 통찰력이 반영된 결과다. 인간이 경험하는 삶이란 것은 결국 불연속적인 것이고, 환상과 현실의 중간 정도에 존재하는 어떤 형식이라고 이 작가는 말하고 있는 듯하다. 그리고 이런 방식은 혁신적이거나 획기적이지는 않지만, 말 그대로 너무도 ‘적절해서’ 이 이야기들 앞에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게 하는 힘이 있다. 규용을 기억하는 효은이 회상에 빠지는 몇몇 장면을 제외하면 그저 묵묵히, 툭툭 끊어진 채로 이 소설에 담긴 삶의 이야기들은 전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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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에는 주인공 효은만큼의 비중을 갖는 인물이 있다. 서술자에 의해 ‘여자’(정애선)라고 명명되는 이 인물은 효은의 아버지가 결혼중매업체를 통해 만난 조선족 여자다. 나이가 적지 않고, 삶의 곡절이 상당하다. 효은의 아버지, 즉 남편이 갑자기 죽어버린 후 이 여자가 보여주는 삶의 방식은 동거인 효은에게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 엉겁결에 낯선 두 여자가 한 집에 모여 살게 되면서 이들은 서로를 닮아가며 배운다. 물론 그것은 대체로 여자의 삶으로부터 효은이 생의 동력을 획득하게 되는 과정이다.

중국에서 온갖 고생을 하면서 가게 사장님의 자리에까지 올랐으나 결국 떠돌고 흘러 한국으로 들어온 이 여자의 삶은 고단하고 억척스럽다. “중국년”이라는 소리를 들어가면서도 어떻게든 이 땅에 발을 붙이기 위해 “비자” 획득에 열을 올리는 모습은 여자의 특수한 사정으로만 보아 넘길 수 없다. 왜냐하면 그 모습은 곧 ‘생의 비자’를 얻기 위해 유랑하는 우리의 모습과 닮아 있기 때문이다. 효은으로 다시 돌아가 보면, 그녀는 스물넷의 여자가 겪을 수 있는 상처와 고통을 모조리 짊어지고 있다. 아버지의 친딸이 아니라 고아원에서 입양되었다는 사실을 이제야 알게 되었고, 사랑하는 남자가 바다에 뛰어들었으며, 품고 있던 아이마저 세상의 빛을 볼 수 없게 되었다. 삶의 가치를 모조리 잃어버린 이 인물을 그려내는 작가의 방식은 놀랍게도 ‘경쾌’하다. 그것은 상처나 고통을 희미하고 건조하게 보여주고, 일상과 생활의 모습들은 지독하고 선명하게 그려내는 독특한 방식에 기인한다.

효은의 가족사와 관련해서는 그녀가 입양되었다는 사실 정도만 진술될 뿐이고, 친부모를 생각한다든지 아버지를 원망하는 장면은 특별하게 조명되지 않는다(심지어 어머니의 존재는 놀랍도록 무시된다). 또한 연인 규용의 죽음은 그것이 자살인지조차 사실 불분명하며 뱃속의 아이는 유산되었을 것이라는 짐작 정도만 가능하다. 반면 효은이 궁전빌라 301호에서 먹고, 자고, 생활하는 모습들은 아주 섬세하게 묘사된다. 그녀가 오늘은 무엇을 점심으로 먹었는지, 몇 시간을 잤는지, 다른 사람들과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 손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일례로 이 집의 보일러 고장에 관한 이야기는 소설의 첫 장에서부터 마지막 장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이어지며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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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기법은 2014년의 한국사회라는 디테일과 결합하면서 주제 의식을 부각시키는 데 기여한다. 좁디좁은 골목에 줄줄이 늘어선 “진성빌라”, “현대빌라”, “우람빌라”, “궁전빌라” 같은 이름의 건물들은 이곳이 얼마나 역설적인 공간인지를 대번에 보여준다.

 

“하나은행과 롯데리아 보이지? 위로 쭉 걸어 올라와. 현대패션 보이잖아. 김밥전문점도 있고. 그 골목으로 걸어 들어와. 가방 파는 집 있지? 옆으로 신발가게 있고. 쭉쭉 걸어와. 대각선으로 보면 뚜레주르 있지? 아니라니까 골목 잘못 들어왔네. 아니라니까. 하나은행 앞으로 가서 다시 전화해요.”(246면)

 

명동에 있는 가발가게의 위치를 설명하는 주인 여자의 저 말들이 지금 한국 사회의 풍경이 아니겠는가. 온갖 미사여구를 갖다 붙이지만 이 땅의 부박한 삶은 결코 가려지지 않는다. 이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내뱉는 말들, 그러니까 “벌렁벌렁 뒤집히는 게 기집년들 치맛속뿐이 아니다”, “머리 검은 것들은 그래서 거두는 게 아냐”, “남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정수리가 비면 모든 게 허물어진다”. “무슨 영광을 보겠다고”와 같은 말들은 여전히 이곳을 떠돌아다닌다. 이런 말들을 동시에 주무르며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소설가의 작업은 ‘원숙하다’라고밖에는 달리 표현할 도리가 없다. 그리고 이런 숙련된 소설은 언제나 필요하다.

 

9

구씨라는 인물의 입을 통해, 또 에필로그에서 효은의 서술을 통해 이 소설의 핵심을 기록해둔다.

 

“한곳에서 우글거리면 다 죽는다. 사방 천지 깔린 것이니, 하늘이 준 것이지. 네 것 내 것이 없지. 어디 임자 있는 흙이 있나. 남는 땅이 있으니 옮겨 가서 좀 비비적거리다 뿌리 내리면 되는기라”(230면)

 

몸을 놀려 일을 할 때면, 생을 굴릴 묵직한 톱니바퀴 하나쯤 내 손으로 짜 넣는 것을 막을 만큼 운명이 내게 가혹하지 않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세상 한복판에 굳건히 설 수 있을 만큼 강해진 두 발을 쳐들고, 트럼펫처럼 활짝 입을 벌려 서역 잔치를 위한 노래를 부를 수도 있을 것 같았다.(30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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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삶은 계속 되고, 집을 나간 여자를 기다리는 효은의 모습처럼, 우리도 결코 알 수 없는 희망 같은 것을 기다리며 살아야 하지 않을까. 이런 노래를 들으면서, 경쾌하게.

 

 

 

아홉 색깔 무지개가 있던

아주 먼 옛날에

달도 두 개 해도 두 개

반짝이는 별도 없던 시절

 

화창한 어느 봄날에

코가 길던 독수리가

날개 달린 코끼리를

찾아와서 부탁하는 말이

 

날고 싶은데 나는 날개가 없어

멋진 그 날개를 딱 하루만

나에게 빌려주렴 오오

 

맘 착한 코끼린 날개 빌려주고

매일 매일 기다렸어

하지만 해가 다 가도록

독수린 나타나질 않아

 

불쌍한 우리의 슬픈 코끼리는

그 날 이후로 그랬어

독수리가 주고 갔던 그 코가 손이래

<코끼리> (코끼리 1집,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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