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에 읽은 시

같게 보고 다르게 말하기

(이 글은 월간 <심상>5월호에 실릴 예정입니다)

 

시인들이 바라보는 세상이 제각각이라는 사실은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당연할 것이다.

하지만 다르게 바라보더라도 같게 표현할 수도 있고, 같게 바라보지만 다르게 표현할 수도 있다는 사실은 굳이 언급을 해두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현실을 바라보는 눈에 관해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 사람들에게는 시인이 세계를 얼마나 깊이 있게 이해하느냐가 중요한 잣대가 된다.

냉철하고 예리하게 현실을 읽어낼 때, 혹은 깊숙한 상처를 파헤쳐 희미하게나마 마음의 심연에 다다를 때, 그들은 시인에게 아낌없는 믿음을 보낸다.

또 시를 써내는 방식에 대해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 사람들에게는 시인이 어떻게 한 편의 시를 완성하게 되었는지가 중요하다.

흔한 정서나 감정을 너무도 낯설게 전달할 때, 더 말하거나 혹은 덜 말함으로써 새로운 미적 성취를 이룩할 때, 그들은 역시 시인에게 환호한다.

이를 내용과 형식이라는 낡은 방식으로 부르지 말자.

그것은 적확하지도 않거니와 불필요한 구분이다.

어떻게 내용과 형식이 분리될 수 있겠는가.

형식 없는 내용, 내용 없는 형식은 결코 시가 될 수 없을 테니까 말이다.

또한 이 두 가지 구분이 다분히 자의적으로 이루어졌음도 밝혀야겠다.

이미 눈치를 챈 독자들이 있겠지만 이것은 그저 훌륭한 시를 설명하기 위해 아무런 우열이나 호오(好惡)를 상정하지 않은 개인적인 구분법이기 때문이다.

여기 세 편의 시가 있다.

이 시들은 내용과 형식이라는 면에서 보면 전혀 함께 묶일 이유가 없는 작품들이다.

그러나 조금 과감하게 말하자면 이 시들이 세계를 바라보는 눈은 같고, 이를 말하는 방식은 모두 다르다.

 

손과 발이 어디에도 닿지 않는다

꿈이라면 길고 긴 가벼움

 

유리창은 떠 있다

어제 달을 가두었던 유리창은

오늘 달의 목을 맸다

어제 서쪽에 칼집을 냈던 유리창은

오늘 북쪽에서 핏물을 받는다

유리창을 열면

방이 보인다

닫으면 방은 불투명하다

오늘 유리창은 아이들이 태어났고

오늘 유리창은 짧은 아이의 장례식이 있었다

떠 있다

숨의 가느다란 줄에 단어들을 매다는 하루와

줄들이 엉켜 단어들이 숨 막히는 하루가 겹친다

유리창은 떠다니며

오른쪽과 왼쪽을 바꾸고

위와 아래를 뒤집는다

수시로

유리창을 열고

방의 방향을 바꾸어야 한다

오늘 바다 앞에 선 유리창은

오늘 숲속에서 전진하는 나무들을 따른다

방은 빠르게 이동한다

유리창은 오늘 빗물을 흘린다

유리창은 오늘 비가 거꾸로 온다

방은 구른다

오늘 유리창은 운다

오늘 유리창은 멀리 간다

방은 고요하다

유리창은 오늘 만진 물

유리창은 오늘 헤어진 울

 

신영배, 「공간의 시-유리창 공중」, 《문학동네》, 2014년 봄호

 

시인의 눈은 유리창을 향해 있다.

저 멀리 정지용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유리창의 이미지는 그 자체로 하나의 ‘눈’이다.

이 시인은 그 눈을 여러 ‘공간’으로 배치시킨다.

시의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이 시는 시간을 “오늘”로 고정해놓고 있으며 공간만이 자유롭게 변화한다.

유리창은 서쪽과 북쪽, 오른쪽과 왼쪽, 위와 아래. 바다와 숲 등을 수시로 떠다닌다.

또한 “손과 발이 어디에도 닿지 않”고, “꿈이라면 길고 긴 가벼움”인 이 세계는 유리창을 경계로 “방”이 된다.

유리는 투명함으로 세계의 외부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동시에 방이라는 내부 공간을 확보한다.

그러니 이 시를 읽으며 사면이 유리로 둘러싸인 방이나 아이가 누워 있는 유리관을 생각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 방에서 우리는 태어나고, “숨의 가느다란 줄에 단어들을 매다는 하루”를 살아가다가, 헤어진다.

시인의 눈은 아마도 비가 내리는 유리창을 바라보고 있었으리라.

그 유리창을 타고 내리는 빗물에 생(生)을 흘려 보았을 것이다.

이윽고 시인은 삶은 시간을 따라 흘러가는 것이라 아니라 공간을 따라 이동하는 것이라 깨달았는지 모른다.

그리고 그것을 담아낼 수 있는 방식은 오로지 시일 수밖에 없어서 “숨의 가느다란 줄에 단어들을 매”달게 되었을 것이다.

 

서울은 살아 있다 공기가 면도날처럼 얼굴을 스친다

걷잡을 수 없이 많은 사건이 일어나도

외톨이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거리 곳곳을 누빈다

 

금과 옥으로 만든 잔들이 광고탑 속에서 돌고 있다

천리안 속의 바빌론

꽉 쥐어지지 않는 손으로 나는 아는 사람과 악수도 하고

나 자신에게 화도 내면서

서울광장을 뚜벅뚜벅 걸어간다

 

알코올 속에 잠긴 인삼, 도라지, 갖가지 과일들과

파리가 득시글거리는 가게에서

커피를 마시며

실패를 만회하기 위해 성실히 살아볼 것을 결심한다

 

서울은 살아 있다 오싹하게

새장은 비어 있고 십자매는

새장 밖 고리에 올라가 앉아 있다

나를 원하지 않으세요?

집회 때문에 가로막힌 외길 차도로 아무 소용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SM3 한 대가 진입한다

 

이런 대도시에서는 배울 필요가 없는 것조차

저절로 배우게 된다 일본인 관광객 한 쌍이 잠시

서울의 왕과 왕비가 되어 사진을 찍는 동안

외톨이는 쓰레기통에서 남은 음식물을 찾아 뒤지는

또다른 외톨이를 발견한다

 

박판식, 「종점」, 《문학동네》, 2014년 봄호

 

신영배의 시가 삶의 근원적 비극을 탐구한다면, 박판식은 현실의 비루함으로 곧바로 뛰어든다.

시인이 바라본 서울이라는 도시는 말 그대로 “살아있다.”

무수한 사건들이 일어나고, 온갖 화려한 광고들이 거리를 수놓으며, “집회”와 “관광”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공간이 대도시 서울이다.

이 공간을 휘적거리며 걷는 “외톨이”들이 있다.

이 외톨이들은 노숙자나 히키코모리를 형상화한 것이 아니다.

마지막 부분에서 쓰레기통의 남은 음식물을 뒤지는 외톨이의 모습은 그것을 비유적 표현으로 읽을 때라야만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여기 외톨이는 결국 우리 모두의 모습이다.

우리는 아는 사람을 만나면 악수를 하고, 또 서울광장에서 목도하는 이 사회의 현실에, 또 그것을 스쳐 지나가는 나 자신에게 화도 내면서 “뚜벅뚜벅 걸어간다.”

스스로 “성실히 살아볼 것”이라 결심하기도 하지만 또 참담하고 오싹한 현실 앞에서 무너지게 마련인 우리 모두가 곧 외톨이인 것이다.

새장을 벗어나도 그 옆의 고리에 앉아 “나를 원하지 않으세요?”라고 묻는 십자매의 모습이나 집회로 가로막힌 도로로 “아무 소용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진입하는 차량의 모습이 결국 이 세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그 속에서 아등바등 하는 외톨이들의 모습일 것이다.

시인의 눈은 서울 한복판에서 “또다른 외톨이를 발견”하고 있다.

이 외톨이들은 삶의 “종점”에 서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시인이 애써 감추고 있듯 종점은 곧 시점이기도 하다.

끝내 덜 말함으로써 이 시는 뻔한 말들로 이루어져 있지만 뻔하지 않은 시가 되었다.

 

더 많은 색깔이 필요합니다. 닫혀 있는 필통을 참을 수가 없어요.

우리는 오색 손톱에 공을 들이고 점심시간마다 연필심처럼 끝을 다듬었습니다.

날카로워진 두 소녀가 서로에게 가운뎃손가락을 날렸습니다.

 

극적인 악수란 그렇게 시작되죠.

가장 긴 손가락부터 내민다는 것.

 

발육이 남다른 우리는 가운뎃손가락이 멈추질 않아서 비행소녀가 되었어요.

침을 뱉을 때도 진심을 담아야 합니다.

가래침엔 인격이 없어요. 그러나 끈기와 몰입은 배울 만합니다. 이념 말고 일념,

그것도 아니면 무념.

 

스타킹을 벗듯 머리끝부터 허물을 벗고 싶어요.

턱관절이 나가도록 생고무를 씹는 인생의 맛. 콘돔을 찢고 나오는

아기들은 쓴맛에서 시작합니다. 버림받은 기억보다 무서운 건 반복되는 예감.

 

슬픔의 지식이 쌓이면 더듬이는 탈부착이 됩니다.

거기서부터 길고 긴 독서를 시작하고 싶어요.

 

길고 긴 햇빛이 꺼지고 나면 밤거리를 뛰어다니며 타인의 일기장을 훔쳤어요.

밑줄을 그으며 나를 예습하고 싶어요. 낯선 냄새를 이해한다는 것.

팬티를 빨면서 생각하죠. 누군가를 벗기는 것 말고

빨아 준 적 있었나. 자만과 기만.

 

당신이 부끄러움을 보여 준다면 진심을 다해 빨아 주고 싶어요.

혀를 갈고닦아서 손가락의 본보기가 되고 싶어요.

 

우리는 왜 손을 씻는가.

손을 자를 수 없다는 깨달음과 손을 잡아야 한다는 가르침 속에서

 

까만 게 좋아, 하얀 게 좋아? 그러면 빨간 헬맷을 고르고

오토바이 소년의 허리를 붙잡고 내가 없는 곳으로 되돌아가는 일.

거기서부터 길고 긴 걸음마를 시작하고 싶어요.

 

길고 긴 행군을 끝내고 나면 기념일에는 지붕 위의 소녀들과 에어쇼를 합니다.

오토에서 스틱으로 손가락을 바꾸고 좌익과 우익

날개를 맞추는 소녀 비행단의 대열 속에서

 

오색 연막탄을 토하며 유종의 미를 연마하죠.

일필휘지로 하트를 띄우고 요조숙녀로 거듭난다는 것.

 

소녀들이 차례로 폭발하고 남아 있는 군번줄처럼

길고 긴 더듬이를 어루만지며

한 쌍의 어른이 거울처럼 앉아 꿀차를 마시는 저녁,

 

손톱을 깎으며 연필을 깎으며 우리는 경청하죠. 탈피 후에

날아다니는 농담에 대해.

고독의 만찬이 끝나면 동면의 계절이 옵니다.

 

이민하, 「나비論」, 《세계의문학》, 2014년 봄호

 

이민하는 자신의 스타일을 끝내 고수하는 몇 안 되는 시인 중의 하나다.

박판식의 시가 뻔한 말들을 뻔하지 않은 방식으로 보여주었다면, 이민하는 결코 뻔한 말들, 뻔한 이미지를 갖다 쓰지 않는다.

소녀들의 삶을 나비의 이미지와 병치시켜 혼란스럽고도 환상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이 시는 멈추지 않고 단번에 읽어 내려가야 한다.

질주하는 이미지들을 놓치게 될 것을 염려한다면 이 시를 끝까지 읽어나가기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시인의 눈이 세계의 비극성을 바라보고 있다는 점에서 앞선 작품들과 같이 놓을 수 있겠지만 이를 표현하는 방식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다르다.

그것은 이 시인이 시작(詩作)의 첫 자리에서 다짐했던, “음악처럼 스캔들처럼”의 방식이다.

이때의 음악이라는 것은 시의 운율 같은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가 필요하지 않은 대화, 의미를 찾지 않아도 되는 이미지라고 할 수 있겠다.

지퍼로 입을 꾹 잠가도 복화술로 대화가 가능한, 음악처럼 그저 들리는 대로 듣고 스캔들처럼 흘려버려도 되는 그런 시를 이 시인이 꿈꾸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이 시의 이미지들을 하나하나 설명하는 것은 고될 뿐만 아니라 그다지 의미 있는 작업이 되지 못할 것이다.

그저 「나비論」이라는 제목을 상기하면서 시를 한 글자씩 읽어내는 것만이, 그리고 그 이미지들의 혼란을 나름대로 감당하는 일만이 가능한 최대한의 방식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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