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동네, 2014년 봄호

어느덧 6월이 되었고, 계간지 여름호가 쏟아져 나오고 있다.

딱히 바쁜 것은 아니었는데, 그래서 괜히 여유를 부린 때문인지 여전히 봄호를 읽고 있다.

문학동네는 뭐랄까, 약간의 변화가 필요한 것 같다.

새로운 기획이나 참신한 시도가 요즘 거의 보이지 않는다.

<리뷰좌담>이라는 코너가 형태와 멤버를 약간 변화시켰는데, 썩 긍정적이진 않아 보인다.

지난 계절에 발표된 단편들을 모아 읽고 그 중 논의할 만한 작품을 이야기하는 코너인데, 이걸 조금 더 ‘가볍게’ 바꾼 것 같다.

기존에도 “대화”의 형식이긴 했지만 사실 그건 줄글로 다시 씌어진 것이었는데, 이제는 정말로 대화에 가깝다.

일반 독자와의 거리를 좀 좁혀 보려는 시도로 보이고, 괜히 심각하게 무게를 잡지 않으려는 노력도 보인다.

근데 이걸 좀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대부분의 독자는 여기에서 다루어지는 소설을 읽지 않았을 것이다.

아주 소수의 독자만이 계절 단위로 단편을 읽고 이 코너에 관심을 둘 것이다.

그러니까 <리뷰좌담> 코너야말로 소설 한 편, 한 편을 아주 세밀하게 파고 들어야 하는 것이 아닌지.

오히려 일반적인 <리뷰>에서 다루고 있는, 특히 독자들의 호응을 얻는 작품에 관해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이야기를 나눠보는 것이 더 적절하지 않을까.

아무튼 나로서는 작년의 형식이 좋았다는 것이고, 전체적으로는 다채로운 시도가 이루어졌으면 더 좋겠다는 것이다.

 

이번 호에는 소설이 두 편밖에 실려 있지 않다.

(자전소설을 포함하면 세 편이다.)

 

1. 김훈, 명태와 고래

오랫동안 사실상 절필에 가까웠던 김훈이 지난 겨울호에 <손>이라는 작품을 발표하더니, 다시 한 편을 써냈다.

김훈은 그동안 더 묵직해져서 돌아온 것 같다.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다양한 방면으로 직간접적 공부를 한 것 같고, 상당한 소설이 이미 준비되어 있는 듯 하다.

여름호에도 단편을 발표했는데, 이런 정도면 아마 곧 소설집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이 소설은 김훈이라는 작가의 역량을 유감없이 발휘한 작품이다.

향일포라는, 태백산맥이 바다로 흘러드는 자락에 위치한 지역의 역사를 소개하면서 시작하는 이 작품은

주인공의 이름인 이춘개가 꽤 뒤늦게 등장할 정도로 묘사에 공을 들인다.

그도 그럴 것이 이춘개의 고향, 그러니까 함경남도 동해안의 어래진과 향일포는 놀라울 정도로 닮아 있기 때문이다.

한국전쟁 때 어래진에서 향일포로 떠밀려온 이춘개의 삶은 명태와 같은 것이었다.

그저 떠밀리고, 대가리와 내장까지 모두 다 내어주고, 순하게 아가미 덮개를 닫고 죽음을 받아들이지만 눈빛은 오래 살아 있는 명태.

그 명태처럼 이춘개는 남으로 떠밀렸고, 다시 북으로 떠밀렸다가, 또 남으로 떠밀려왔다.

그리고는 향일포의 지도를 북에서 그려줬다는 죄목으로 13년을 교도소에서 보낸다.

그저 자기가 살아온 동네를 그림으로 그렸다는 것, 어촌 마을이란 게 다 거기서 거기라는 것,

크레파스를 빼앗긴 자신의 아들이 끝내 크레파스를 다시 ‘사’ 와서 ‘때리지 마’라고 엄마에게 말했던 것처럼,

이춘개는 맞지 않기 위해 그림을 그렸을 뿐이라는 것.

게다가 그 그림이라는 게 그저 바다가 있고, 마을이 있는, 말 그대로 “바다와 마을”이었다는 것.

그 바다와 마을에서 그는 모든 것을 잃고 결국 물에 떨어져서 죽었다.

 

-바위는 좋았어. 이 점들은 뭐냐?

-고래요.

-고래는 왔다갔다하는 거니까 그릴 필요 없잖냐. 야, 지워. 헷갈린다.

이춘개는 지우개로 고래를 지웠다. (178-9)

 

흰 겨울 산맥이 뼈를 드러내며 이춘개의 화폭 위쪽으로 흘러갔다. 아침바다는 빛과 어둠이 섞여서 출렁거렸다. 빛 한 가닥이 향일천 물줄기를 거슬러서 상류로 올라가며 고래 그림 바위 쪽을 향했다. 화폭에 보이지 않지만, 바위 속의 고래들이 깨어나고 있을 것이었다. 이춘개의 화폭 가장자리에서, 작살을 쥔 사내가 고래 등 위에 올라서서 일출의 바다로 나아갔다. 작살은 사내의 키보다 크게, 길게 그려져 있었다. 고래떼의 항적이 빛의 궤적을 그리며 길게 이어졌고, 마을이 시간 위로 말갛게 떠오르고 있었다. (185)

 

그런데 이춘개의 삶은 사실 명태가 아니라 고래에 가까운 게 아니었을까.

혹은 고래를 작살로 꽂아 잡던 저 7천 년 전의 강력한 인간은 아니었을까.

단편 하나에서 이토록 많은 이야기를, 이토록 힘 있게, 이토록 군더더기 없이 쓸 수 있는 작가는 아마 김훈이 유일할 것이다.

 

 

2. 이승우, 복숭아 향기

이 작품 역시 이승우만이 쓸 수 있는 소설이다.

다른 작품들에서도 그렇지만 여기서도 이승우의 플롯은 좀 작위적인 측면이 있다.

좋아하는 과일이 뭐냐는 질문에 복숭아라고 대답하곤 했던 이유를 알 수 없는 ‘나’가 역시나 알 수 없는 이유로 직장의 근무지를 자신의 고향인 M시로 택하는 이야기다.

M시는 고향이라고 하기엔, ‘나’에게는 거의 기억도 없는 곳이므로, M시를 택한 것은 그곳에서 자신을 낳아 아버지 없이 길렀던 어머니 때문이겠다.

그 어머니에 대한 기억들이 상당 부분 희미하고 흐릿했던 ‘나’는 외삼촌을 통해 죽은 아버지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지역의 유지였던 남자가 자신의 아들을 결혼시키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고, 어머니가 선택되었다는 것.

그리고 그 노력의 이면에는 남자의 아들이 정신병을 앓고 있었다는 것.

문제는 어머니가 이미 그것을 모두 알고 있었고, 정말로 아버지를 받아들였다는 것.

아버지가 자신의 아버지를 칼로 찌르던 그 순간에도, 그러므로 어머니는 버틸 수 있었다는 것.

결국 어머니가 아버지를 받아들이겠다고 결심한 그 순간에 2층 양옥집 마당을 뒤덮던 복숭아 향기가 두 모자의 삶을 지배했던 게 아닐까.

다소 작위적인 이 플롯을 받아들이게 해주는 복숭아 향기는 이승우의 문장들이다.

앞의 문장을 그대로 이어받아 뒷문장을 쓰는 방식의 전개는 독자로 하여금 거의 공백을 느끼지 못하게 함으로써 굉장한 흡인력을 느끼게 한다.

김훈도 그러했지만 오랜만에 중견 남성 작가의 힘있는 문장을 읽으니 신선하기까지 했다.

 

 

+ 김훈은 “향일포”, “여래진” 같은 지명을 창조해낸 것 같고, 이승우의 남서쪽에 위치했다는 M시는 아무래도 무진이 아니려나, 추측만.

++ 조해진은 ‘정통파(?)’답게 자선소설도 자전소설처럼 썼다. <문래>로부터 글(文)이 왔다고(來)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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