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 2014년 봄호

봄호 계간지는 여기까지 읽고, 일일이 챙겨볼 수 없었던 다른 잡지들의 몇몇 소설들을 훑어본 후 여름호로 넘어가야겠다.

내가 생각하는 메이저 계간지(?)가 몇 개 있는데, <한국문학>은 <21세기문학>과 더불어 준메이저급(?)으로 올라섰다고 봐도 좋을 거 같다.

좋은 작가들의 좋은 작품들이 꾸준히 실리고 있다.

 

1. 박덕규, 조선족 소녀

그러나 좋은 작품만 실리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이 작품이 보여준다.

처음 접하는 작가이지만 이력이 다채로워서 기대했는데, 실망만 컸다.

말 그대로 “조선족 소녀”가 등장하는 것까진 뭐라 할 수 없지만 그 소녀를 바라보는 시선이 참 당황스럽다.

한국의 대표 소설가로 설정된 ‘나’는 완벽히 제국의 시선으로 ‘용옥’이라는 소녀를 바라본다.

소수자에 대한 근거 없는 안쓰러움과 동정, 그리고 그것을 느끼고 실행할 수 있는 자신에 대한 확신으로 가득 차 있다.

거기에 소설 자체도 나쁜 의미에서 에세이나 수필에 가까워 보인다.

인물과 작가의 거리가 전혀 느껴지지 않고, 불필요한 묘사가 많다.

자신이 쓴 탈북자 아이에 관한 동화를 친구들 앞에서 읽다가 일종의 망신을 당한 조선족 소녀를 두고,

그 “두터운 장벽” 앞에서 “통곡”하고 싶다는 ‘나’의 모습은 너무도 단순한 결론이고, 소설의 결말로도 전혀 적절하지 않다.

 

2. 하성란,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

소설집 <여름의 맛>이 나온 뒤 첫 작품일까.

이 작가는 요즘 ‘맛’에 관심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카레 온더 보더>라는 작품에서 “카레”라는 이미지가 주었던 강렬함이 이 소설에서는 ‘설렁탕’으로 이어진다.

이야기가 크게 두 축으로 펼쳐지는데, 하나는 명희라는 출판사 직원과 최 원장이라는 건강음식 책의 저자.

다른 하나는 그 명희와 또 다른 친구 명희이다.

현재의 어떤 만남이 과거의 어떤 기억을 ‘음식’을 매개로 소환한다는 설정이 <카레 온더 보더>와 정확히 일치하는데,

이 작품은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한 듯 하다.

이야기의 두 축이 별로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작가는 능숙하게 두 이야기를 오가며 소설을 흥미롭게 이끌어가지만, 여운이 길지 않다.

제목에서도 그런 느낌이 들었지만, 어쩐지 좀 급하게 쓴 거 같은 작품이다.

 

3. 한유주, 한탄

자기 색깔이 분명한 한유주의 작품이다.

꿈과 현실, 그리고 소설의 경계를 무너뜨리려는 노력을 계속 하고 있다.

예컨대 이런 문장.

나는 무언가를 보여주고 싶기도 하고, 아무것도 보여주고 싶지 않기도 하다. 나는 무언가를 드러내고 싶기도 하고, 아무것도 드러내고 싶지 않기도 하다. 나는 보여주지 않는 것으로 보여주고 싶고, 보여주지 않는 것으로 보여주고 싶다. 고갈된 기분이다. 그러나 나는 고갈이 무엇인지 정확히 모른다. 어떤 단어들은 함부로 써서는 안 되는 것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나는 항상 모든 단어들을 함부로 써왔다. 함부로 쓰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쓸 수가 없다. 모든 단어들이 함부로 써서는 안 되는 것처럼 여겨진다. 나는 의심의 대상이다. 나는 늘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나는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의심의 대상이다. 나는 지금도 거짓말을 하고 있다. 아무것도 쓸 수 없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쓸 수 없다는 말을 나는 이렇게 끝없이 이어갈 수 있다. 내게는 반복을 반복하는 능력이 있다. 제거하고 싶은 능력이다. (76)

방심하다가도, 방심할 수 없게 하는 이런 문장들이 이어진다.

소설 속에서 “그리고 나는 잠에서 깨어난다”라는 문장이 반복되고, 그러므로 앞선 문장들은 꿈이라는 의심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이야기는 이어지고 있으므로 마냥 꿈이라고만은 할 수 없다. (물론 꿈일 수도 있다.)

그러니 이건 소설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밖에.

 

4. 김이설, 아름다운 것들

이 소설이 꿈이었으면 좋겠다.

그런데 지독하게도 이것은 현실이다.

이제 흔하다면 흔한, 일가족의 자살을 기록하고 있다.

이 작가가 현실의 지독함을 결코 외면하지 않고, 냉혹할 정도로 직시하고 있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이번 작품은 특히 심하다.

한 여자가 있고, 남편이 있었고, 딸아이가 둘이 있고, 남편의 어머니가 있다.

남편은 노조 활동을 하다가 자살했고, 가계는 기울 대로 기울었으며, 시어머니는 치매에 걸리고, 자신도 어떤 병에 걸린 상태.

이 여자가 맞닥뜨린 현실은 저 문장보다 훨씬 끔찍한 것이었고, 그녀는 결국 아이 둘을 죽이고, 자신의 “차례”를 준비한다.

그러나 이 잔인한 현실을 그려내는 것이 독자에게 일종의 죄의식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것말고, 어떤 의미가 있을까.

순간의 반성이나 한숨, 안타까움 같은 것들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서 더 그렇다.

이 여자가 자살을 결심할 때, 나는 차라리 안도했다.

한국은 그런 사회다.

 

5. 손보미, 상자 사나이

언젠가 손보미에 관해 짧게 쓴 적이 있는 거 같은데, 요약하자면 이런 거였다.

‘뭐, 잘 쓰는 거 같긴 한데 좀 과대평가된 거 아닌가?’

그러니까 손보미가 갖는 장점은 ‘불안의 서사화’ 같은 것인데, 그것 말고 또 뭐가 있나 했던 것.

그랬는데, ‘뭐’가 더 있었다.

손보미가 이런 작품도 쓸 수 있구나, 하는 신선한 느낌을 받았다.

물론 <그들에게 린디합을>이라는 작가의 첫 소설집을 보면 온통 불안으로만 가득 차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작품만큼의 흥미를 주지는 못했다.

사랑하는, 혹은 사랑했던 그녀의 결혼소식을 듣던 마지막 밤의 이야기를 ‘상자 사나이’라는 요설로 풀어내는 방식이 꽤 재미있다.

이런 방식의 다양한 시도가 계속된다면, 손보미라는 작가를 믿고 읽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답글 남기기

아래 항목을 채우거나 오른쪽 아이콘 중 하나를 클릭하여 로그 인 하세요:

WordPress.com 로고

WordPress.com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Google photo

Google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Twitter 사진

Twitter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Facebook 사진

Facebook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s에 연결하는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