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에 읽은 시

그래도 살아간다

(이 글은 월간 <심상> 6월호에 게재될 예정입니다)

 

계간지 여름호에 실린 여러 시를 몇 차례 읽었다.

지난 4월 16일에 있었던 큰 사건이 제법 활자화 되어 실려 있었다.

지난 계절의 잡지에 실려 있던 시들이 사건의 충격으로 인해 제대로 읽히지 않았다면, 이번에는 오히려 그 사건을 다룬 시들이 허공의 메아리처럼 들렸다.

결국 반성과 비판, 추모와 위로 등으로 전개될 수밖에 없는 그 뻔한 말들이 사태를 단순하게 만드는 것은 아닌지, 어쩌면 시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은 아닌지, 그래서 애써 고민하고 다듬었을 그 말들이 무의미하게 흩어져버리는 것은 아닌지 새삼 염려스러웠다.

아마도 시인들은 작금의 현실을 잔혹하게 목도하면서 이를 모른 체 하기 어려웠을 테다.

침묵할 수 있는 자유는 시인들에게 주어지기 어렵다.

그들은 무엇에 관해서건 말을 해야 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의 운명이 어찌 우리와 다르겠는가.

우리 역시 현실의 부정(不淨)을 매순간 느끼면서도 어떻게든 살아나가야 하는 사람들이다.

수십 명의 아이들이 기울어가는 배에 갇혀 가만히 있었던 모습을 자신의 일터에서 화면으로 지켜보면서 그저안타까워 할 수밖에 없었다.

이 거대한 무력감을 잠시라도 잊게 하는 것은 생(生)이다. 그래도 살아간다는 것, 그것만이 우리를 견디게 한다.

 

시간은 남는다 개 같은 고객들을 피가 나도록 사랑하고도 시간은 남는다 시간은 남는다 폭죽 십만 발이 터진 다음에도 남는다 백만 명이 말춤을 한꺼번에 추고도 백만 번씩 추고도 시간은 남는다 골백번 헹궈 쓰는 음호 같은 구호들을 골백번 제창하고도 시간은 남는다 牛舌 수육 대짜배기를 시켜놓고도 시간은 남는다 죽은 소의 더 죽은 혓바닥을 우걱우걱 씹어도 씹어 삼켜도 시간은 남는다 운석인 줄 모르고 맞은 뒤통수들이 맥주 캔처럼 우그러진 다음에도 시간은 남는다 시간은 남는다 폭죽 십만 발이 터지고도 인광 폭죽 십만 발 골분 폭죽 십만 발이 터지고도 시간은 남는다

김언희, 「축제의 밤」, 《한국문학》, 2014년 여름호

 

이 시인은 살아간다는 의미를 알고 있는 듯하다.

“시간이 남는다”는 말들의 반복 속에, 불가항력적인 생의 굴레가 들어가 있다.

이 시는 “축제의 밤”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지만 사실은 축제 이후의 밤들에 대해, 혹은 축제의 이면에 대해 쓰고 있다.

‘고객님 사랑합니다’를 수도 없이 외쳐야 하는 삶에도, “수육 대짜배기”를 시켜놓고 그걸 “우걱우걱” 씹어 삼키는 삶에도, 폭죽과 춤사위와 구호들이 난무하는 삶에도, 시간은 남는다.

“십만”, “백만”, “골백번” 등의 수사는 “시간”이라는 어휘 앞에 의미를 잃는다.

이 시인은 유한과 무한이라는 해묵은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라 끝내 시간은 남아 있으므로, 끝이라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니까 살아간다는 것은 곧 끝내 남아 있다는 것, 다시 말해 그 무수한 굴곡들을 헤쳐나간 뒤 남게 되는 것이 삶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때의 시간이란 물리적인 의미가 아니라 인간의, 실존적 시간을 뜻한다.

죽음에 다다르지 못한 인간에게 시간이란 언제나 남는 것이다. 아니, 죽음에 이르렀다고 해도 시간은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이다.

그 광대무변한 사유 속에서 저기 트럭 한 대가 지나간다.

 

 슬픈 사람들이 트럭을 탄다. 트럭은 정체에 걸릴 때마다 힘겹게 멈췄다. 정체가 풀리면 트럭은 부식된 하체 어디선가 슬픔을 흘리며 느리게 움직였다.

트럭에 올라탄 사람들은 두 손으로 신을 그려보지만 이내 슬픔이 신을 덮는다. 언제나 그랬듯이 그들에겐 이상하게 어깨가 없다.

찌그러지고 때 묻은 트럭은 생의 마지막 질주를 세월에 업혀 갔고, 낙오한 사람들은 트럭에 업혀 갔다. 세월은 다시 사람들의 등에 올라타 있었고.

도시는 어두웠고 트럭은 주저앉았다. 낙오자들은 뿔뿔이 골판지 같은 골목으로 사라졌다. 주저앉은 트럭은 도시와 아주 잘 어울렸다. 그렇게 밤이 왔다. 이미 어두웠지만 트럭은 어두워지지 않았다. 안녕, 트럭.

허연, 「트럭」, 《문예중앙》, 2014년 여름호

 

좋은 시인은 새로운 풍경을 만들어낸다.

허연은 “트럭”을 통해 세계를 바라본다.

트럭에 올라탄 사람들이 가진 생의 무게가 가볍지 않으리라는 예측은 충분히 가능하다.

슬픔은 이들에게 신의 자리조차 허락하지 않는다.

이 슬픔을 가장 훌륭하게 표현한 부분은 “언제나 그랬듯이 그들에겐 이상하게 어깨가 없다”는 것이다.

어깨가 없다는 것, 그것은 생의 더께가 눌러 앉을 공간마저 이들에게는 없다는 의미일 테다.

그 사람들이 올라탄 트럭은 또 어떠한가.

찌그러지고 때 묻어 있는 트럭, 세월에 업혀 생의 마지막 질주를 하고 있는 트럭을 본 일이 있을 것이다.

도무지 굴러갈 것 같지 않은, 녹이 슬대로 슬어서 본래의 색깔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고, 폐가 망가진 환자의 숨소리 같은 엔진을 가진 트럭들.

그 트럭에 업혀 가는 사람들은 그야말로 낙오자들이다.

이윽고 그 트럭이 주저앉아버렸을 때, 낙오자들은 “뿔뿔이 골판지 같은 골목으로 사라”진다.

그들은 살아야 하니까, 트럭이 주저앉았다고 해서 그곳에 멈추어 있을 수는 없다.

그리고 다음날이면 그 트럭은 다시 밭은 숨을 내뱉으며 슬픈 사람들을 태울 것이다.

그러니 도시는 어두워지고 밤이 되었지만, 트럭은 어두워지지 않는다.

“안녕, 트럭”이라고 사뭇 발랄하게 인사를 건넬 수 있는 것도 트럭이 다시 낙오자들을 등에 태워 올릴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계속되는 삶에 대해 인상적으로 노래한 시인이 또 한 명 있다.

 

 바람 부는 날 야외에서 한 접시의 물회를

바람 속에 흔들리는 모든 것들의 친화력과 공평함

그러나 고층 빌딩의 견고함

원피스의 펄럭임은 야외에 달린 커튼

걸어다니는 커튼, 긴 머리의 자유로움과

저 여잔 머릴 기르길 참 잘했다는 생각

바람 부는 날 멀리서 바라보면 바람에 천천히 흔들리고 있는 빌딩 앞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플라스틱 테이블에 올려진 물회에 뜨거운 밥 한 그릇을

소주 한 병을 시키고 잔 세 개를 부딪칠 때 불어오는 바람

바다보다 더 바다 같은

바람보다 더 바람 같은 바람의 통로 안에 담겨 한 접시의 물회를

이제 더 큰 바람이 불어오겠지

암 그렇고말고

바람 속에 흔들이던 것들 죄다 이륙하고 테이블이 뒤집히고 원피스가 팬티 위로 올라가고 술병이 차례로 추락할 거야 만물지중(萬物之衆)이 낙하하고 비행하는 난장판이 펼쳐질 거야 그 전에 딱,

한 접시의 물회를

바람이 사라지기 전에 어서 마지막 잔을 비우고 그 속에 한 잔의 바람과 평화를

이 세상 모든 바람이 지금 여기로 불고 있다는 착각

지금 이 바람은 우릴 모른 척하고 지나간다는 확신

이 모든 접시들과 수저들이 처음 보는 우릴 기억하고 있다는 믿음

이 모든 게 바람이 하는 젓가락질이라는 망상

그 와중에도 이 골목은 계속 길어져서 아무리 긴 바람도 결국 빠져나가지 못할 거란, 그러나 바람에는 길이가 없을 거란

헛된, 몽상

그러나 얼음이 다 녹기 전에 한치 학꽁치 미주구리 문어대가리

바람 속으로 날아드는 새들이 생선을 다 채가기 전에 쌈장을 찍고 마늘을 올려서

김에도 싸서 너의 입에 한번,

나의 입에 한번

바람 속에 흔들리는 모든 것들의 친화력과 공평함

오늘 왜 난 자꾸 눈물이 날까

이봐 그러고 있지 말고 저길 좀 봐

어느새 일렬로 늘어선 소주병들이 진한 방풍림색으로 물들어 있었고

이봐 앞에 앉아서 자꾸 핸드폰이나 쳐다볼 바엔 차라리 지나가는 여자 다리를 쳐다보지 그래

난장판이 되기 직전 빈 접시의 바람을 집어먹는 나무젓가락의 튼튼함

우리가 이제부터 불어올 모든 바람을 이 한 잔의 공간 속에 모두 쑤셔 담을 순 없겠지만

마침표같이 눌러놨던 돌멩이들 죄다 굴려 버리는 바람

그러나 어딘가에선 반드시 멈출 돌멩이들을 바라보며

바람 부는 날 바람 속에 흔들리는 모든 것들의 취기에 시원한 사이다 한 잔씩을 따라 주며

너도 한 잔,

나도 한 잔

빈 잔은 이제 그냥 빈 잔으로 남겨 두고

 

황유원, 「바람 부는 날」, 『세계의문학』, 2014년 여름호

 

이 시를 읽고 나는 조금 놀랐다.

짧지 않은 시에서 이처럼 시적 긴장을 유지하면서 별로 특별할 것도 없는 이미지들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시인을 만났기 때문이다.

이미지에 치중하다보면 메시지를 잃고, 메시지에 중점을 두면 이미지가 결여, 과잉되는 양상을 무수히 보아왔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 시는 “바람 부는 날”이라는 정말로 심상한 표제를 달고 있는데, 물회 한 그릇을 눈 앞에 두고 불어오는 바람을 벗삼아 세계의 풍경을 담담히 그리고 있다.

이 물회를 먹는 공간은 너무도 보잘 것 없는, 도심 빌딩 사이의 플라스틱 테이블과 의자 위이지만(그것마저 시인의 ‘바람’일지 모르지만) 순간 “바다보다 더 바다 같은” 바람이 되기도 하고, “이 세상 모든 바람이 다 여기로 불고 있다는 착각”을 주기도 한다.

그런 착각과, 확신과, 믿음과, 망상과 몽상들이 바람처럼 스쳐지나갈 때 시인은 “그러나” 눈 앞에 있는 술잔과 안주와 나무젓가락과 종이컵 같은 것들이 “모든 것들의 친화력과 공평함”을 만들어주지 않느냐고 덤덤하게 말하고 있다.

그래, 삶이란 바람 불어와 이 소박한 술자리가 난장판이 되기 직전 접시를 눌러주는 나무젓가락 같은 것이 아닌가.

또 오른 취기에 마시는 시원한 사이다 한 잔 같은 게 아닌가.

너도 한 잔, 나도 한 잔, 하다가 끝내 이제 빈 잔은 그냥 남겨두기로 하는 그 순간이 아닐까.

사실 같은 지면에 실린 이 시인의 다른 시가 더 훌륭했음을 살짝 밝혀두어야겠다.

그 시는 너무 길어서 차마 소개하지 못했으나 이 시인이 보여주고 있는 “서정”과 “미래”의 유려한 조화는 주목할 가치가 충분히 있어 보인다. 다음 작품을 고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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