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석제, 투명인간(창비,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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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준하고 성실한 소설가 성석제의 장편이다.

최근에는 단편을 거의 쓰지 않고, 1-2년 간격으로 장편을 발표했는데 사실 썩 만족스럽지 않았다.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에 대한 편애 때문인 듯도 하지만, 소설이 될 만한 이야깃거리라면 뭐든 써내는 작가의 성실함이 나를 질리게 했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이번 소설은 그래서 그냥 지나칠까 하다가, 여론(?)이 좋길래 읽어 보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오랜만에 나온 좋은 ‘한국’ 소설이고, 성석제의 이력에 정점을 찍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소설을 펼치자마자 이 작가의 자신감에 나는 놀랐다.

이 장편은 목차가 전혀 없다.

그냥 단 한 줄의 행갈이만으로 서술자를 바꿔가며 자유자재로 달려간다.

시간에 따라, 일인칭으로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이 방식은 소설이라는 게 무슨 기교가 그렇게 필요하겠냐며 일갈하는 것 같기도 하다.

이 흐름에 한 번 몸을 맡기면 쉽사리 멈출 수가 없는데, 그것은 이 작가 특유의 디테일 때문이다.

원래 성석제라는 작가가 풍속이나 미시사에 강한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 작품은 마치 성석제의 소설적 원천이 모조리 동원된 듯한 느낌이다.

아직도 이런 풍부한 디테일이 남아 있다는 데서, 여전히 더 이야깃거릴 만들어낼 수 있음을 넌지시 내비치는 풍모에서 소설의 ‘고수’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일제시대로부터 시작해 한국전쟁, 산업화시대, 민주화시대 등을 통과해 지금-여기로 도착하는 ‘만수’ 일가의 일대기는 이 땅의 독자라면 어느 누구도 거리 확보가 쉽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형, 동생, 누나, 언니, 삼촌, 이모, 고모, 사촌 등등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이 소설을 앞에 두고 고작 이런 이야기라고 콧방귀를 뀔 수 있는 사람은, 혹은 이 소설을 하나의 객관적 텍스트로 두고 기계적으로 분석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이런 ‘국뽕’이라면 언제든 맞을 준비가 되어 있다.

“투명인간”이라는 모티프를 나쁘지 않게 활용한 것도 장점이라고 생각된다.

이런 리얼리즘 위에 제대로 설명할 수 없는 환상 하나 얹는 것쯤은 괜찮잖아…?

특히 이 소설의 처음과 끝에 그것을 배치한 게 기막힌 선택이었다.

덕분에 소설의 마지막 장면은 오래도록 잊히지 않을 것 같다.

옮기고 싶은 문장이 수두룩하지만 그 마지막 장면을 적어 놓는다.

 

– 무슨 일 있어요?

늙은 운전자는 허공을 향해 장님처럼 외쳤다. 그지없이 날카로운 칼에 베인 상처에 얼마 동안은 피가 보이지 않듯이 내 가슴에도 한동안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마음속에서 무엇인가 뚝, 하고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나는 자전거에 올라 미친 듯 페달을 밟았다. 다리를 더이상 움직일 수 없을 정도가 되었을 때 형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 죽는 건 절대 쉽지 않아요. 사는 게 오히려 쉬워요. 나는 포기한 적이 없어요.

형. 만수 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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