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에 읽은 시

먹고사는 일, 그리고 시

(이 글은 월간 <심상> 7월호에 실려 있습니다)

 

인간이 가진 삶의 조건들에 대해 생각해본다. 인간에게 무엇이 꼭 필요한가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것을 포기할 수 있느냐의 문제로 좁혀보면, 우리는 어떻게 대답할 수 있을까. 의식주로 분류하는 것이든, 인간의 5대 욕구 운운하는 것이든 아마 사람마다 모두 다른 선택들을 하게 될 것이다. 결코 잠을 포기할 수 없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안락한 내 집만이 최상의 가치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당연히 있을 것이다.

그 중 ‘먹는 것’에 대해 잠깐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식욕을 참는 것은 사실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니다. 물론 여기에서 말하는 수준은 한 끼의 식사를 건너뛰는 정도, 혹은 정말로 먹고 싶은 음식이 아니라 다른 것으로 배를 채우는 정도의 행위를 의미하는 것이고, 그것은 꽤 자주 발생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식욕을 참는 것은 정말로 어려운 일이다. 저항의 극단적 형태가 ‘단식’임을 상기해 본다면 이것은 죽음에 가까운 고통을 감내하겠다는 태도이며, 그래서 결코 쉽게 할 수 없는 선택이다. 요컨대 ‘먹는다’의 스펙트럼은 일상의 밑바닥에서부터 생존을 가늠하는 수준에까지, 광범위하다.

‘먹는다’는 동사는 여타의 삶의 조건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 우리의 일상과 너무도 밀접하다. 우리가 영위하는 삶은 ‘먹기 때문에’ 혹은 ‘먹음으로써’ 가능하다. 먹지 않으면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일상의 절대적 양부터가 확연하게 줄어든다. 그러니 “먹고살다”라는 말은 한 단어가 될 수밖에 없다. 그것은 ‘살다’라는 단어가 결국 ‘먹는다’가 전제되어야만 가능한 행위인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해서, 간단히 치부해버리고 넘어가기 어려운 문제이다.

 

오늘은 아내와 등촌동에 들러 청소기 가져오고 택시 운전수에게 언성을 높이고(그가 잘못했지만 언성을 높인 나도 문제가 있다) 국민은행에 들러 돈 찾고 편의점에서 신문 사고 순이네 고릴라에 들러 어제 못 준 삼천오백원 주고(카드 안 되었음) 걸어서 합정동까지 가 남산찌개에서 밥 먹고(짰다) 홈플러스에 들어가 물과 탄산수 사 마시고 다시 걸어 망원시장에서 제라늄 화분 두 개 사고 시장 길에서 사랑과 평화의 보컬리스트를 보고 바나나 먹고(오늘은 유난히 바나나를 많이 먹었다) 망원유수지운동장으로 가 축구 연습하고 밥 먹고 씻고 담배 두 갑 사오고 목련 쳐다보고 씻고 트위터하고 이제 이렇게 시를 쓰고 예쁜 아내도 피아노 음악을 들으며 옆방에서 시를 쓰고 가끔 좋아하는 러스크를 바삭바삭 먹기도 한다.

봄밤은 흩날리는 꽃잎 같고, 나는 자꾸 어려져 눈물이 앞을 가리고.

바보야, 바보야,

바보야

이준규, 「바보야,」, 《문학동네》, 2014년 여름호

 

“오늘”이라는 시간의 일상을 말 그대로 ‘일상적’으로 기록한 이 시를 보면, 그는 “밥 먹고”, “물과 탄산수 사 마시고”. 다시 “바나나 먹고”, “밥 먹”었다. 열심히 먹으며 그는 또한 열심히 살았다. 해야 할 일들을 했고, 하고 싶은 일들도 조금 했고, 기분이 상하거나 불만이 생기기도 했지만 어른스럽게 그런 것들을 잘 넘겼다. 그런데 이 빼곡한 일상의 어느 부분에서 알 수 없는 구멍이 생긴다.

이 시인에게 그 시간은 혼잡했던 하루를 정리하는, 언뜻 보면 가장 행복해 보이는 “봄밤”에 찾아 왔다. 자신은 시를 쓰고, 예쁜 아내는 옆에서 음악을 들으며 러스크를 먹는 그 순간, 불현 듯 찾아온 ‘어린 나’가 눈물을 흘리게 한다. 이 시인이 보냈던 오늘 하루는 철저하게 어른의 시간들이었다. 일을 처리하고, 마무리하고, 늘상 해오던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 비루하지만 안온한 삶. 그런데 우리 모두가 그렇듯이 내 안의 ‘어린 나’는 사라진 것이 아니다. 어른의 외피를 쓰고 있는 나에게는 철들고 싶어 하지 않는 습성이 군데군데 숨어 있다. 그 ‘어린 나’가 문득 “바보야”라고, 그 어린 어휘로 자신에게 속삭일 때, 눈물은 속절없이 쏟아진다.

시인은 굳이 제목에 쉼표를 붙여 놓았다. “바보야”라는 말 뒤에 아직 다른 말들이 남은 것이다. 혹은 단 한 번의 “바보야”가 아니라, “바보야”의 순간은 언제고 계속해서 찾아올 것이라는 시인의 생각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 “바보야”의 순간은 일상과 함께 존재하는 것이지 따로 떼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어린 내가 어른인 척하는 나에게 “바보”라고 말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곧 삶이 아니겠느냐고, 이 시인은 말하고 있는 것 같다.

 

감자와 양파와 돼지고기를 반듯하게 썰고 카레 가루를 갠다

집 안 가득 퍼지는 강황 냄새와 양파 냄새가

마침맞게 익어간다

죽을힘을 다하다 죽어버리는 사람은 있지만

죽을힘을 다한 시는 이 세상에 없었다

죽을힘을 다하다가 죽어가는 화분이 하나 둘 세엣 네엣……

어떤 신호음은 죽은 사람을 살리러 달려간다

어떤 확성기는 싱싱한 야채를 싣고 달려온다

비닐봉지에 사과와 식빵을 담고서 현관에서

신발을 벗을 때 발목에 걸리는 자책들을 털어낸다

아름다움에 매료되다니

아픈 부위에 티스푼을 찔러 넣어 한 숟갈 퍼먹는 푸딩처럼

아름다움이 간식이 되다니

아프리카 사람들의 노동요에 바흐의 곡을 입혀

프랑스 사람은 아름다운 음악을 팔았다

아름다움을 다하여 나는 시를 쓰는 중이다

죽이는 소리에 죽는 소리를 입혀서

주저하는 것과 주저할 수는 없는 것

집 안 가득 시들시들함이 시름시름 앓는다

마침맞게 익어간다

김소연, 「밀고」, 《실천문학》, 2014년 여름호

 

한 끼의 식사를 준비하는 이 시인의 말들에 주목해보자. “카레”라면 우리는 모두 그 독특한 향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 향은 숨을 곳 없이 집안을 가득 메우고 시인은 시에 관해 생각한다. 그것은 “죽음”과 “아름다움”에 대한 것이었다.

죽을힘을 다해 시를 써 본 일이 있는지 시인은 묻고 있다. “죽을힘”이라는 것은 삶의 무게와 힘겨움을 드러내는 말에 다름 아니다. 곧 시와 삶을 앞에 두고, 이 시인은 시가 삶보다 먼저일 수 없음을 “밀고”하고 있다. 사람을 살리는 “신호음” 소리, 싱싱한 야채를 제공하는 “확성기” 소리와 “시”의 소리를 비교하면, 시인은 자책들이 발목에 걸리곤 하는 것이다.

시인이라면 누구나, “아름다움”에 매료되지 않을 수 없다. 동시에 그 아름다움이 세계나 현실을 외면한 “간식”이 되어버리는 것은 아닌지 염려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니 시인은 아름다움에 관하여 시를 쓴다면서 그것을 “죽이는 소리에 죽는 소리를 입”히는 일이라 말한다. 죽인다는 말은 긍정적 의미에서 쓰이기도 하지만, 말 그대로 죽임을 실행한다는 의미로 볼 때, 시인이 내뿜는 소리들이 비윤리적임을 다시 “밀고”하는 대목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시인은 주저한다. 이 세계에서, 이 무거운 현실 앞에서 시를 써야 하는가. 아름다움을 노래한답시고 언어를 조탁하는 자신의 모습을 인정할 수 있는가. 그러면서 동시에 시인은 주저할 수는 없다고도 얘기한다. 그래도 쓰지 않으면, 시들어가는 세계를 시름시름 앓지 않으면 시인일 수 없기 때문이다(시들시들, 시름시름이라는 이라는 부사가 시(詩)와 연결되어 있음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감자와 양파와 돼지고기를 반듯하게 썰”어 넣은 카레가 “마침맞게 익어”갈 때, 시를 쓴다는 건 어쩌면 맛있는 한 끼 식사를 먹는 것과 같지 않은지, 그러니까 누구든 어차피 먹어야 하는 거라면 아름답게 먹고 싶은 게 아닌지, 때로는 그것이 비윤리적임을 자각하고 있다고 해도 말이다.

 

당신은 식당 앞 노상에 앉아 흐느꼈다

옆에는 당신의 키보다 더 큰

조개껍질이 가득 든 비닐봉지가 있었다

안에는 탁자마다 조개무지가

소주병 옆에서 할복한 바다처럼 굳었다

저녁 영업시간이 시작되기도 전에 손님은 밀려왔고

당신은 조개를 켜켜로 포개고 뜨거운 가스불에 올렸다

조용히 조개는 몸국물을 내어놓았다

바다의 뿌옇고도 농익은 젖 같았다

젖먹이를 남겨두고 일 나온 당신의 젖가슴에서도

이런 빛은 나왔지

주방 한 켠에서 당신은 푸른 비닐봉지에

다 내주고 껍질로 남은 무덤을 담았다

비닐 집단 무덤 무게가 저보다 무거운데 어쩌겠어요

조개가 입을 벌리며 국물을 내어놓을 때

나는 눈을 감았는데

뚝뚝 떨어지는 소금 바다를 어쩌겠어요

태양은 당신 같은 밤을 낙태하고는 가버렸다

바람은 발자국 속의 몸국물을

훌훌 들이켜며 지나갔다

숙취에 라면 먹던 밤의 붉은 얼굴들은

무장무장 취해가며 봄의 미라가 되어갔다

허수경, 「몸국물」, 《문학과사회》, 2014년 여름호

 

이제 조갯국을 파는 식당의 밤으로 옮겨 가보자. “당신”이 일하고 있는 이 식당에 찾아와 조개의 “몸국물”을 들이키는 남자가 있다. “젖먹이를 남겨두고 일 나온 당신의 젖가슴에서도 / 이런 빛은 나왔지”에서 짐작할 수 있는 사연은 그냥 그대로 두고 읽기로 하자.

패류(貝類)를 다루는 식당에서라면 징그럽게 쌓인 껍질들을 본 일이 있을 것이다. 탁자마다 형성된 조개무지를 본 일도, 어쩌면 있을 것이다. 시인은 그 수많은 조개의 무덤들을 삶의 모습들과 섬세하게 겹쳐 형상화 하고 있다. 푸른 바닷물에 잠겨 있던 조개들은 이제 “푸른 비닐봉지”에 무덤을 만든다. 그렇게 껍질을 담는 “당신”은 “비닐 집단 무덤 무게가 저보다 무거운데 어쩌겠어요”라고 말한다. 모든 걸 다 내줘버린 조개의 껍질들이 ‘나’의 무게보다 무거울 때, 삶은 그저 “어쩌겠어요”라고밖에 말할 수 없는 것이 된다.

“당신 같은 밤을” 태양이 낙태하고 가버린 뒤, 조개의 몸국물을 훌훌 들이켜며 “무장무장‘ 취해가던 봄밤의 풍경은 짐작할 수 없는 이들의 사연처럼 흐릿하게, 애잔한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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