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민석, 시티투어버스를 탈취하라(창비,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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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언과 요설로 점철된 만우절의 소설들

(계간 <자음과모음> 2014년 가을호에 실려 있습니다.)

 

재미있는 소설을 쓰는 작가는 여럿 있다. 성석제를 필두로 이기호, 김중혁, 박민규, 천명관 등이 떠오른다. 그런데 초지일관, 작정하고 찌질한 소설을 쓰는 작가는 단연코 최민석 혼자다. 지질하다고 맞춤법을 따르지 않고 찌질하다고 꼭 써야 할 정도로 이 작가는 찌질하다. 여느 작가였다면 “여기서 말하는 찌질함은 물론 긍정적 의미에서이다”라는 문장을 덧붙였겠지만 최민석은 정말 말 그대로 찌질하다는 의미, 즉 “보잘것없고 변변하지 못하다”라는 사전적 정의와 정확하게 일치한다.

『능력자』(민음사, 2012)와 『쿨한 여자』(다산책방, 2013)로 최민석을 미리 접한 독자라면 이 찌질함의 의미가 어떤 것인지 어렵지 않게 짐작할 듯하다. 그 찌질함의 기원과 행로를 최민석답게 보여주는 것이 『시티투어버스를 탈취하라』(창비, 2014)라고 하면 너무 거창하고, 어쩌다보니 혹은 어쩔 수 없이 가려 모은 이 작가의 민낯 정도로 여기면 충분한 것이 그의 첫 소설집이라 할 수 있겠다(이에 관해서는 “작가의 말(바꾸기)”에 지나칠 정도로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이 책에는 그의 등단작부터 시작해 2014년까지 자신이 써온 일곱 편의 소설이 실려 있다. 작가 스스로 “꼼수”라고 밝힌 보너스 트랙의 「누구신지…」를 제외하면 6번 트랙까지의 소설들은 대체로 일관된 흐름을 갖고 있다(이 흐름에 속하지 못하는 작품 중 하나는 『쿨한 여자』로 확대 개편되기도 했다). 나는 그 일군의 작품들을 “첨언과 요설로 점철된 만우절의 소설들”이라 부를까 한다. 등단작이자 표제작인 「시티투어버스를 탈취하라」는 아무래도 이 소설집의 ‘타이틀곡’이라 할 수 있을 텐데(속편마저 실려 있으니 말이다), 이 소설의 첫 문장이 이렇다. “내 이름은 ‘유리스탄 스타코프스키 아르바이잔 스타노크라스카 제인바라이샤 코탄스 초이아노프스키’다.”(8면) 주인공의 이름부터가 요설이니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이 흥미로운 요설을 늘어놓는 작가의 풍성한 입담이 우선은 가장 눈에 띄는 것이지만 소설가로서 그의 재능은 저 긴 이름의 사나이를 단번에 안산 가발공장의 “최씨”로 만들어버리는 데 있다. 그것은 짐짓 심각해지거나 진지해져서 자칫 비장해질 법한 분위기를 결코 용납하지 않는 이 작가의 자존심과 관련되어 있다. 이 작가가 진지해지는 순간은 오직 사랑 앞에서일 뿐이다(이렇게 말하니 상당히 유치한 느낌이지만 사실이 그렇다). 이를테면 「“괜찮아, 니 털쯤은”」에서 사랑에 빠진 그녀를 대하는 원숭이 주인공의 고민들이 이 책에서 가장 진지하다. 특히 그가 원숭이임을 고백하는 순간, 동시에 이별을 통보받던 소설의 말미는 사랑의 본질에 대해 고심해보지 않을 수 없게 하는 것이다(역시 유치하지만 사실이다). 바꾸어 말하면 그것은 이 작가가 세계나 현실을 대할 때 결코 또는 부러 진지해지지 않는다는 것이기도 하다. 청와대 혹은 국회를 폭파시키려던 외국인 노동자들의 버스 탈취가 마치 ‘없었던 일’처럼 실패하는 것은 그러므로 당연하다. 소설 속에서 그 일아 만우절에 일어나기도 했지만, 이 작가에게 그러한 전복이란 농담과 허풍의 즐거움을 동반할 때라야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위대한 작가가 늘 그렇듯, 이 요설 속에 범상하지 않은 의미가 숨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호객 행위’였다. 그는 슬쩍 대한민국의 현실을 고발하는 포즈를 취해 소설에서 꼭 어떤 의미를 찾으려는 나 같은 순진한 독자를 기대하게 만드는 동시에 “국가는 미워해도, 소녀시대를 미워할 수는 없어.”(30면)와 같은 단호한 말투로 역시 나 같은 순진한 독자를 환호하게 만든다. 시티투어버스에 탑승한 관광객들이 한류에 환호하고, “강남스타일”을 주구장창 불러대는 장면들도 “다이내믹 코리아”를 유쾌하게 풍자하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독자를 붙잡아 두기 위한 술수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소설 속에서 괄호와 주석을 동원해 작가가 이토록 열정적으로 첨언하는 것은 근래에 보기 힘든 작법인데(아마 다른 작가들은 도저히 부끄러워서 쓸 수 없는 방식일 것이다), 이것 역시 ‘끝까지 읽어 달라’는 작가의 술책으로 보인다(아마 내가 아는 작가 중에 끝까지 읽어 달라는 부탁을 가장 많이 하는 작가일 것이다).

이 화려한 호객 행위에 넘어가 책장을 덮지 못한 독자들이 대부분일 것이다. 그게 ‘얼마나 더 웃기나 지켜보자’의 심정이든 작가의 애원에 마지못한 것이든 혹시나 감동에 젖어서이든 중간에 버려두긴 어려웠을 테다. 그러니 숨을 한 번 크게 쉬고 이렇게 써본다. 이 소설집을 아예 읽지 않은 사람은 있어도 한두 편만 읽은 사람은 없다. (아, 역시 부끄럽다. 최민석의 위대함을 새삼 느낀다.)

마음을 가다듬고 다른 작품들을 좀 살펴보자. 「국가란 무엇인가」와 「독립운동가 변강쇠」는 작정하고 쓴 한 편의 활극들이다. 「국가란 무엇인가」가 뜬금없이 세르반테스를 빌려와 한국의 단편소설의 장르적 성격을 운운하는, 국가관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는 “대하 막장 단편소설”이라면, 「독립운동가 변강쇠」는 제목에서 확인할 수 있듯 변강쇠라는 인물을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로 설정한, “애국보수SF소설”이다. 이 기이한 장르 설정에서 이미 요설의 풍모를 느끼며 만면에 웃음을 짓기 시작했다면 이제 당신도 최민석의 독자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최민석의 독자라면 이 ‘희화화’의 행렬에 흔쾌히 동참할 수 있어야 한다. 변강쇠가 자신의 “그것”을 무기로 사용해 독립운동을 펼친다는 이야기를 정색하고 읽어갈 독자라면 아예 읽지 않는 편이 좋고, 대적관이 투철한 세르반테스의 팬이라면 넓은 아량을 미리 준비해야 할 것이다. B급이나 삼류라는 등급을 여전히 가치 평가의 우열로 여기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것은 이제 장르적 다름을 지시하는 말이고, 최민석은 기꺼이 그 자리에 서 있을 작가다. 이 소설집에 실린 작품들이 전혀 재미있지 않다면 독자는 아직 B급 정서에 대한 수련이 부족한 자신을 자책해야 할 것이고, 그것도 아니라면 자신의 유머 감각이나 개그 코드에 대한 심각한 회의를 가져보는 게 좋을 성싶다.

그러나 이 ‘본격세속’ 소설에서도 어쩔 수 없이 작가가 가진 문제의식이 눈에 띄는데, 그것은 소설이라는 장르에 대한 고민이다. 「부산말로는 할 수 없었던 이방인 부르스의 말로」는 「시티투어버스를 탈취하라」의 외국인 노동자를 외계인으로 바꾼 버전이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비트켄슈타인의 “내 언어의 한계가 내 세계의 한계”(80면)라는 전언을 한국에서 사용되는 여러 언어의 층위로 소설화하고 있는 이 작품은 사투리와 서울말, 한국어와 영어의 위계질서를 온갖 요설로 보여주는데, 아래의 대목은 이 소설을 그저 웃어넘기기만 할 수는 없게 만든다.

 

하지만 내게도 진실이 있다. 내가 품고 있는 단 하나의 진실. 내가 외계인이라는 사실이다. 물론 어느 누구도 진실을 진실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히려 나의 무수한 거짓들을 진실로 받아들였다. 사람들은 그들이 이해하고 싶은 말들만 진실이라 했다. 그들에게 받아들일 수 없는 사실은 듣기 전에 이미 거짓이 되어 있었다. 자신들의 경험과 가치관에 부합하면 그것은 진실이고, 불편하면 거짓이다. 이 나라에서 소통이라 일컬어지는 거의 모든 것이 이러한 식으로 작동되고 있었다. 간편하고, 이기적인 방식이다.(43면)

 

최민석이 실컷 희화화하고 있는 한국의 현실을 논하기 전에 우리는 사실과 진실, 허구와 거짓이라는 해묵은 소설적 논의를 꺼내야 할지 모르겠다. 최민석이라는 외계인은 간편하고 이기적인 방식의 소통을 추구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민낯을 극단적으로 드러냄으로써 동시에 자신을 감춘다. 이런 소설이란 조금만 방심하면 금세 바닥이 보이는 ‘불편한 소통’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 방식을 선택했고, 현실과 허구 사이의 묘한 경계지점에 서 있는 “에세이 같은 소설”을 쓰려고 노력한다. 그러니 어찌 이 작가를 응원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그래서 그가 최세속이든, 최민석이든, 최순결이든, 한 사람의 소설가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그러나 나는 결국 우리가 눈물을 흘리고 상처를 받고 웃음을 터뜨리는 건 모두 현실의 세계이고, 허구의 이야기는 충족시켜줄 수 없는 궁극의 벽 같은 게 있다는 걸 느꼈다. ‘허구의 이야기는 완벽하지만 심장을 어루만져주진 못한다. 반면 현실의 이야기는 초라하고 식상하고 때론 진부하기까지 하나 내장을 운동케 한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중략) 그래서 말인데 혹시 내가 소설을 쓴다면 에세이 같은 소설을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현실의 사건이란 개연성도 부족하고, 일관성도 부족하지만 엄연히 우리를 살게 하고 멈추게 하고 나아가게 하고 죽게 하는 그 무엇이 있다. (최순결, 『4월의 공기』, 곰, 2014, 15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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