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정은, “양의 미래”에 관해

황정은의 새 소설이 나온 김에, 예전에 써놓았던 글을 하나 업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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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하지 않는 편을 선택하겠습니다

-황정은의 「양의 미래」에 관한 몇 가지 주석

 

 

한 사람의 손이 내게 왔다. 그것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차가웠다. 그리고 나는 생각했다. 양이 없는 하루. 나는 양으로서 녹색 벼랑의 풀을 조금 뜯어 먹었고, 지금 죽어가고 있는 중이다. 내가 죽음을 멈추지 않는다면, 지구는 곧 양이 없는 미래를 맞이하게 될 테지. 양이 없는 지구는 아직도 푸른 지구고, 여전히 사람들은 한 마리의 양 두 마리의 양을 세고 있을까. 거대한 침대에 파묻혀 영원히 깨어나지 않거나, 양이 없는 하루를 맞이하기 위해 두 팔을 활짝 벌릴까. 소심한 사내처럼 양치질을 하고 거품을 뱉고 플라스틱 욕조에 쭈그리고 앉아 울음을 터뜨릴까. 나는 최후의 양으로서 양의 울음을 조금 운다. 유감스럽게도 그것은 오래된 양의 예절, 양의 아름다운 근심. 결국 흰 종이 위엔 이상한 웃음이 쏟아지고 말겠지만, 최후의 양으로서 나는 죽기를 그치지 않겠다. 한 사람의 손에 내게 왔다.

이기성, <양>

  1. 양의 미래?

 

1976년에 태어나 2005년부터 소설을 쓰기 시작해 두 권의 소설집과 두 권의 장편소설을 발표한 황정은이라는 작가가 있다. 처음의 황정은은 곧잘 ‘환상’이라는 키워드로 연결되는 작가였다. 그것은 더할 나위 없이 적확한 지적인 것처럼 보였고, 이 작가도 좀체 그것을 포기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러나 지금의 황정은에게 환상성의 프리즘을 가져다 대면 보이는 색깔이 별로 없을 것이다. 그녀가 천착하고 있는 것은 자신이 발 디디고 있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처음부터 황정은은 현실을 벗어난 적이 없었다. 그저 방향이 달랐던 것이다. 이제 이 작가는 환상에 서서 현실을 보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 서서 환상을 보고 있다. 이 기저에 지금 여기의 현실은 그것 자체로 환상이라는 것, 그렇지 않고는 견뎌내기 어려울 만큼 이 세계가 잘못되어 있다는 것, 끝이 분명한 고통을 어떻게 감당해야 할 것인가에 관한 사유가 깔려 있음은 물론이다.

『야만적인 앨리스씨』(문학동네, 2013)가 거두어들인 성취는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될 터, 황정은 문학의 빛나는 지점들은 오히려 『야만적인 앨리스씨』 이후 발표한 단편들에서 더욱 두드러지는데, 「상류엔 맹금류」(《자음과모음》, 2013년 가을호), 「양의 미래」(《21세기문학》, 2013년 가을호), 「아무도 아닌, 명실」(《한겨레웹진 한판》, 2013년 12월), 「누가」(《문예중앙》, 2013년 겨울호) 등이 그것이다. 이 네 편의 단편들은 각기 다른 이야기를 하고는 있지만, 황정은이라는 이름 아래 씌어졌으므로, 어쩔 수 없는 공유의 영역을 갖는다. 이 글은 그 중 「양의 미래」에 대한 것이다.

그런데 왜 하필 「양의 미래」인지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겠다. 나는 이 소설이 작년에 발표된 단편들 중 가장 탁월하다고 생각했고, 일찌감치 어떤 문학상의 영광을 안았었다. 그러나 몇몇 소란스러운 일들로 인해 이 작가는 수상을 거부했고, 수상작 단행본은 절판되어버렸다. 그래서 「양의 미래」는 작가의 다른 작품들에 비해 오히려 덜 주목받는 결과가 초래되었고, 언급하기 조금 까다로운 텍스트가 되었다. 하지만 이 작품은 훨씬 더 많이 소비되어야 한다. 우리는 「양의 미래」라는 이 불운한 단편만을 두고도 나눌 수 있는 이야기가 무수하기 때문이다.

「양의 미래」는 중학교 때부터 학교보다는 일터에 가까웠던 한 여성의 이야기이다. 그 여성의 성이 양 씨여서, 주인공의 미래에 대해 서술하는 작품이었다면 이 글은 불필요했을지 모르겠다. 그런데 끝내 주인공의 이름은 나오지 않아서, 아니 양 씨의 인물이란 도대체 등장하지를 않아서, 작품을 읽고 먹먹해진 뒤, 머릿속에 남은 생각은 도대체 “양의 미래”가 무슨 뜻일까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끈덕지게 이를 해명하고 싶었다.

앞서 언급한 작가의 다른 작품, 「누가」라는 제목도 마찬가지다. 우선은 ‘who’의 의미로 읽힌다. 집에 초인종이 울리고 누구냐고 묻는 장면이 몇 차례 그려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황현경 평론가의 말처럼 이 소설 속에서 집의 주인이 바뀌고 그것이 어떤 사람에게서 다른 사람으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累家’로도 읽을 수 있겠다. 나는 그저 ‘누추한 집(陋家)’으로 읽을 수도 있을 것이라 생각했었다. 이 작품은 다른 사람의 흔적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타인의 취향에 고스란히 노출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겪는 ‘층간소음’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이 소설에 관해 길게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고, 다만 황정은이 짓는 소설의 제목이 심상하지만은 않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중의적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소설의 제목은 흥미로운 해석의 발단이 된다. 황정은이 자신의 소설 속에서 ‘이름 짓기’에 얼마나 공을 들이는지는 따로 설명을 하지 않아도 될 정도이니, 소설의 제목이야 오죽하겠는가.

그러니 “양의 미래”란 도대체 무엇인가.

 

  1. 양(孃)의 미래

 

이 소설의 주인공이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잠시 이야기 하자. 어머니는 몇 년째 간암으로 누워 있고, 아버지는 그 어머니를 돌보는 데 모든 삶을 소모하고 있다. 그들의 딸인 주인공은 상업계 고등학교를 다녔지만 언제나 늘 일을 했던 기억밖에는 없다. 열일곱에 그녀가 일했던 곳은 한 옷가게였다. 그곳에서 그녀는 최초의 수치를 경험한다.

 

검은색 스웨터와 흰색 스웨터를 두고 망설이는 듯한 그녀에게 나는 흰 쪽을 권했다. 따뜻한 색이라서 손님에게 잘 어울린다고 말하자 그녀는 양손에 스웨터를 쥐고 정색하며 나를 바라보았다. 흰색이 어째서 따뜻한 색이죠? 그녀는 내게 물었다. 흰색은 차가운 색이야, 아가씨, 차가운 색이라고. 백색은 한(寒)색, 미술 시간에 못 배웠어요?

나는 얼굴이 빨개졌다. 이미 빨개졌는데 더욱 빨개지는 것을 느끼며 그냥 서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벌거벗고 선 기분이었다. 나의 무식이나 부주의를 창피한 방식으로 깨달아서가 아니었다. 아가씨, 라고 불렸기 때문이었다. 학생 아니고 아가씨, 그게 그렇게 부끄러웠고 왠지 모르게 눈물이 고였다. 나는 얼마 뒤 그 가게에 나가는 것을 그만두었고 다시는 돌아가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녀는 일을 하다 또래의 동급생들을 마주할 때가 있었는데, 그때는 “부끄러웠어도 대수롭지 않다고 여길 수 있는 부끄러움”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 부끄러움의 출처는 “아가씨”라고 불린 데서 온 것이었다. 황정은의 소설에서 양이라 불리는, 곧잘 성 씨나 ‘미스’라는 접두사와 결합되어 통용되는, 여성 하위 주체들의 이야기가 등장하는 것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그렇다면 당연하게도 여기 ‘양’이라는 것은 ‘김양, 박양, 최양’ 할 때의 그 양일 것이고, 그렇다면 “양의 미래”란, 이 주인공, 혹은 ‘양’으로 불리는 무수한 주체들의 미래를 지시하는 것일 테다. 그리고 그 미래란 부끄러움을 느끼면 바로 그곳을 떠나버리고 다시 돌아가지 않는, 그녀가 가진 삶의 태도를 의미할 것이다.

 

  1. 양(量)의 미래

 

그렇다면 아래의 언급은 어떠한가.

 

나는 그곳에서 하루 열 시간씩 일했다. 매일 엄청난 양의 물건을 계산대 위에서 끌어당기거나 밀쳤고 엄청난 양의 사람들을 계산대 바깥으로 서둘러 내보냈다. 사소한 시비 끝에 계산대를 넘어온 손님에게 뺨을 맞거나 하는 일도 있었는데 자주 있는 일은 아니었다. 별다르게 기억할 일이 없었다.

 

그녀는 다시 일터로 나갔다. 이번에는 마트의 계산대였다. 황정은은 “폐결핵 진단을 받고 잘리듯 계산대 일을 그만둔 것이 5년째 되는 해였다”라는 단 하나의 문장으로 주인공의 무수한 시간을 요약해버리지만 그녀가 보낸 마트에서의 저 시간들은 실로 “엄청난 양”일 것이다. 인용한 부분에서도 반복되는 저 “엄청난 양”이라는 어휘에 주목해 보자. 이 경우 양은 ‘量’이겠다. 하루에 열 시간씩 마트에서 찍어대는 바코드의 양, 그녀가 맞이하는 사람들의 양, 별달리 기억할 일이 없는 지긋지긋한 반복의 시간들. 이 때 양은 자본주의의 표상에 다름 아닐 것이고, 우리는 이 작품을 자본주의의 미래, 혹은 우리 사회의 미래로 고쳐 읽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저기 그녀와 같은 ‘양’들일 것이다.

 

  1. ‘-양’(어떤 모양을 하고 있거나 어떤 행동을 짐짓 취함을 나타내는 말)의 미래

 

이 소설에서 주인공이 겪는 가장 큰 사건은 ‘진주’라는 여자아이의 실종이다. 그녀는 서점에서 일하고 있었고, 그 서점에서는 담배를 팔았다. 그녀는 늘 신분증을 확인했고, 진주라는 아이가 왔을 때도 그렇게 했다. 진주는 저기 위에 있는 남자가 시켰다고 말했다. 그녀는 그렇다면 직접 오시라고 말씀드리라 했다. 결국 그 남자는 직접 내려와 위협적 태도로 담배를 사갔고, 다시 서점 입구에서 진주와 이런 저런 말들을 주고받는다. 그녀는 그 모습을 지켜보았고 그게, 세상에서 본 진주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비정한 목격자”, “보호가 필요한 소녀를 보호해주지 않은 어른”이 된다.

이후 그녀는 진주 어머니의 방문을 매일 겪는다. 진주의 어머니는 서점으로 와 실종 전단지를 돌리면서 그녀에게 끊임없이 그 날 보고 들은 것에 대해 물어본다. 이윽고는 아예 서점 앞에 돗자리를 펼치고 진주의 사진들을 걸어 놓는다. 서점 주인의 종용으로 그녀는 진주 어머니에게 다가간다.

 

아줌마 어쩌라고요.

내가 얼마나 바쁜지 알아요? 내가 여기서 얼마나 많은 일을 하는지 알아? 날씨가 이렇게 좋은데 나는 나와보지도 못해요. 종일 햇빛도 받지 못하고 지하에서, 네? 그런데 아줌마는 왜 여기서 이래요. 재수 없게 왜 하필 여기에서요. 내게 뭘 했느냐고 묻지 마세요. 아무도 나를 신경 쓰지 않는데 내가 왜 누군가를 신경 써야 해? 진주요, 아줌마 딸, 그 애가 누군데요? 아무도 아니고요, 나한텐 아무도 아니라고요.

 

그녀는 결국 이 말을 속으로만 한다. 마치 그녀가 “아무도 없고 가난한다면 아이 같은 건 만들지 않는 게 좋아”라고 어떤 책에 몰래 적어 놓듯이, “어머니가 이제 죽었으면 좋겠어. 아버지도”라고 남자친구인 호재에게 말했는지 기억하지 못하듯이, 그녀는 저 말들을 하는 척만 한다. 하지만 그런 말들을 하는 ‘양’ 진주의 어머니를 내려다보는 것만으로도 그녀는 그 서점을 떠날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된다. 그녀는 다시, “빠르게 걸었고 다시는 그곳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1. (고)양(이)의 미래

 

그녀는 서점에서 일하던 게 좋았다고 했다. “입은 흔적이 있는 팬티를 환불해달라며 내미는” 고객도 없었고, 서점 계산대에서 바라보는 바깥의 풍경도 마음에 들었으며, 무엇보다 서점 입구 화단에 살고 있는 고양이들 때문이었다. 그 고양이들에게 “시루, 인절, 콩”이라는 이름을 붙여준 것은 호재라는 인물이었다. 호재는 “대다수가 적어도 학사인 나라에서 학사도 받지 못한 남자는 곤란하다, 라는 것을 절감했다”고 말하는 그녀의 남자친구였다. 또 “좋은 일자리를 잡으려면 더 많은 것이 필요하다고”, “자신의 이력엔 특별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말했고 그것을 절감했다”라고 다시 말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이 두 남녀의 사랑이 서로에게 상처를 남기고 끝날 것이라는 사실 역시 “절감”할 수밖에 없는 일일 것이다.

 

화단엔 늘 고양이가 몇 마리 있었다. 고양이들은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고는 하며 밥을 먹고 갔다. 화단에서 밥을 먹고 자란 암컷들은 새끼를 배면 화단으로 돌아왔다. 어미 고양이와 새끼들, 그들이 대를 바꿔가며 어디론가 갔다가 돌아오곤 하는 동안 호재의 우산은 그대로 관목 위에 펼쳐져 있었다.

 

다시 이 서점 앞의 고양이들을 지켜보자. 이 고양이들은 사라졌다가도 어느새 다시 나타나서 밥을 먹고, 또 새끼를 낳기도 한다. 아이 같은 것은 낳지 않겠다고 무수히 다짐하는 그녀가 이 고양이들에게 마음을 쏟게 되는 것은 짐작하기 어려운 일이 아니다. 고양이들은 그녀처럼, 사라지고 돌아오길 반복한다. 다른 점이 있다면 고양이들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반면, 그녀는 완전히 새로운 곳으로 가버린다는 것이다. 그것이 “새끼”들을 낳아 “대를” 이을 수 있는 고양이들과, 그럴 수 없는 그녀의 이유일지도 모른다. 그녀는 서점을 떠난 뒤 여전히 궁금했다. “어미 고양이는 계속 새끼를 낳았을까. 그 새끼들도 새끼를 낳을까.” 아마 그럴 것이다. 그래서 ‘(고)양(이)의 미래’와 ‘그녀의 미래’는 달라질 것이다. 그녀는 “병신 같은 건 싫다고 생각”할 테니까. 만약 그녀가 죽음을 눈앞에 두면 “걱정이 될 테니까 말이다. 세상에 남을 그 병신 같은 것이.”

 

  1. 양(兩)의 미래

 

그녀가 일하던 서점은 지하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그 지하에는 또 한 층의 지하에 창고가 있었다. 그 창고에서 작은 문을 통해 또 한 계단을 내려가면 서점의 면적만큼이나 넓은 지하 공간이 나타났다. 그 지하 공간에서 늘 쪼그려 앉아 점심을 먹으면서 그녀는 생각한다. ‘저 벽 뒤에는 무엇이 있을까.’ 재오라는 인물은 그녀에게 그 벽 뒤에 거대한 터널이 있다고 알려준다. 아파트 단지 주민들이 유사시에 대피할 수 있도록 지은 방공호 같은 터널이라고 말이다. 이후 그녀가 아파트 관리인에게 그것에 대해 얘기했을 때, 관리인은 벽 뒤엔 아무것도 없다고, 그저 곰팡이가 심해서 일종의 가벽을 세워 놓았을 뿐이라고 말한다. 진주라는 소녀가 사라져버린 지금, 그녀는 그 벽 뒤에 무엇이 있는지 궁금해진다. 그래서 그녀는 어느 날 망치를 찾아내 벽을 뚫어 보려고 한다. 나무로 만들어진 그 벽은 망치로 몇 번만 휘두르면 쉽게 부서질 것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 때문에 그녀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터널이 있는 것과 터널이 없는 것.

요즘도 나는 그 순간에 내가 어느 쪽을 더 두렵게 여겼는지를 생각해보고는 한다. 나무 벽의 구멍을 통해 검은 공동을 확인하는 것과 진물 같은 곰팡이로 덮인 또 다른 벽을 확인하는 것. 어느 쪽이 더 섬뜩하고 소름 끼치는 일일까. 나는 그걸 알 수 없었고 아마 앞으로도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녀는 결국 선택하지 못했다. 그 ‘양’ 극단의 결과를 모두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어떤 것을 선택하더라도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할 게 뻔했다. 그녀가 살아온 삶이 그러했기 때문이다. 모든 선택의 순간들에서, 그녀는 차라리 선택을 하지 않고 피하는 게 나았다. 어차피 “검은 동공”이거나 “진물 같은 곰팡이”의 상태 중 하나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에게 주어진 미래란 언제나 양(兩)의 미래이다. 그녀는 벽을 부술 ‘양 망치를 들어 보이지만 결국 그 순간을 피해 달아나고, 항상 ‘양’쪽 모두를 염려하는 사람으로 남을 것이다.

 

  1. 양(羊)의 미래

 

이제 그녀를 다시 한 번 따라가 보자.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일을 했다”고 했다. 자신의 어릴 적을 회상하면 언제나 햄버거 체인점, 패밀리 레스토랑, 도서 대여점, 전단을 돌리던 거리, 시식용 새우를 튀기던 마트 모퉁이 따위가 생각난다고 했다. 가끔 동급생을 일터에서 마주치더라도 잠깐 부끄러웠을 뿐이라고 했다. 겪고 나면 잊을 수 있는 부끄러움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 시절을 억울하다거나 아깝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도 했다. “그랬네” 정도로 잠깐 깨닫고 마는 것이라고 했다. 이 “그랬네”의 정서야말로 황정은 특유의 것이다.

황정은이 같은 계절에 발표한 「상류엔 맹금류」 역시 비슷한 맥락에 있다. 그냥 그렇게 되었다는 것, 별다른 수가 없으니 그냥 산다는 것. 이 “그냥”의 태도는 자조도 체념도 아닌, 독특한 감성이다. “어쩌라고” 하는 식의 분노도, 입을 꾹 닫고 자기 안으로 파고들어가는 방식도 아니다. 이를테면 「아무도 아닌, 명실」에서의 이런 문장 같은 것이다. “점차로 없고 점차로 사라져가는 것이 있다. 그뿐이다.”

그것은 ‘양(羊)’의 방식이다. 맞다. 몸은 회백색의 털로 덮여 있고, 대개 흰 뿔이 있으며, 털은 직물의 원료로 쓰이고, 고기나 젖, 가죽도 이용하는 그 가축이다. 이 동물은 먹이를 찾아 끊임없이 이동하며, 위협이 닥치면 그저 높은 곳으로 도망갈 뿐이다. 그 유약한 속성을 가져와 인간들은 이미 자신들을 ‘길 잃은 어린 양’이라는 수사로 표현하기도 했다. 이를테면 황정은의 텍스트는 ‘증상 없는 자’들의 조용한 행렬이다. 그리고 황정은은 이들을 따르는 목자(牧者)의 역할을 자청한다.

프로이트가 보여준 개체의 사유를 사회로 대입시키고 있는 지젝의 논의를 참고해보자. ‘증상’은 지금의 사회가, 현실이 올바르지 않다는 것을 드러내는 일종의 기표이다. 증상은 ‘나타나야’ 한다. 발현되지 않는 증상은 당연히 분석될 수도 치료될 수도 없다. 그런데 오히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증상으로 드러나지 않는 사회의 모습이 아닌가. 절망하고 분노하는 하위주체가 아니라 당장 눈앞의 생활에 모든 힘을 소모해서 절망하거나 분노할 여력조차 없는, 그래서 보이지 않는 존재들 아닌가. 이들은 증상이 드러나기 전에 ‘사라져버린다.’

 

서점엔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하는 직원이 넷이었고 오전과 오후에 일하는 아르바이트 직원들이 있었다. 서점 주인은 채용 정보를 인터넷 커뮤니티에 올렸다. 그걸 보고 더 좋은 직장에서는 아마도 자신을 받아주지 않을 거라고 여기는 아이들이 왔다. 멍한 눈길로 사방을 둘러보고 시키지 않은 일은 하지 않고 실수해서 혼을 내도 특별하게 더 주눅 드는 기색 없이 다만 물끄러미 이쪽을 보는 아이들. 그런 아이들은 급여를 받고 나면 이튿날엔 출근을 하지 않고 연락도 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양의 미래」에서 그녀는 이들처럼 스스로 입을 막아버린 주체이다. 이들은 어떤 문제에 봉착했을 때, 그리고 그것이 증상으로 나타나려고 할 즈음에 그 상황을 피하거나 도망간다. 다른 방식은 결코 없다. 이런 인물들에 관해 우리가 어떻게 이야기 할 수 있을지, 황정은이 하나의 전범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또 그것이 지금 소설이 감당해야 할 문제라고도 생각한다. 증상은 어찌 되었든 드러나게 되어 있고, 그 증상에 대해 분노의 방식으로 대응하는 것이 김사과라면, 그것에 대해 침묵 혹은 혼잣말로 일관하는 것이 김숨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 황정은은 증상이 되지 못하는 자들이 있음에 주목하고, 다시 강조하거니와 이들을 따라가는 목자의 역할을 자청한다.

 

나는 여전하다. 여전히 직장에 다니고 사람들 틈에서 크게 염두에 두지 않을 정도의 수치스러운 일을 겪는다. 못 견딜 정도로 수치스러울 때는 그 장소를 떠난 뒤 돌아가지 않는데, 그런 일은 물론 자주 일어나지는 않는다. 다음에 다른 동네로 이사를 가게 되면 그 동네에도 아카시아 나무가 많기를 소망하고 있다. 그러나 아카시아가 단 한 그루도 없는 동네에 살게 되더라도 나는 별 불편 없이 잘 적응해갈 것이다.

나는 여전하다.

 

  1. 양(陽)의 미래

 

그녀는 여전히 살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누구도 신경 쓰지 않기 위해, 걱정하지 않기 위해 혼신의 힘으로 노력할 것이다. 하지만 진주라는 소녀는 그녀의 마음속에 어쩔 수 없이 남았다. 그래서 소설의 마지막은 이렇게 이어진다.

 

나는 여전하다.

그리고 가끔, 아주 가끔, 밤이 너무 조용할 때 진주에 관한 기사를 찾아본다. 어딘가에서 진주를 찾았다는 소식을 말이다. 유골이라도 찾아냈다는 소식을 밤새, 당시의 모든 키워드를 통해서 찾아다닌다.

나는 이런 이야기를 어디에서고 해본 적이 없다.

 

당연히 그녀는 이런 이야기를 어디서도 해본 일이 없을 것이다. 누군가를 신경 쓰고, 걱정하는 일은 그녀의 몫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는 호재도, 고양이들도 아닌 진주라는 단 한 번 마주한 소녀를 오래도록 근심하며 음지에서 지낼 것이다. 이런 그녀에게 ‘양(陽)’의 미래가 올 것이라 상상할 수 있을까.

 

맑은 날도 흐린 날도 유리 너머에 있었다. 햇빛은 하루 중 가장 강할 때에만 계단을 다 내려왔다. 유리를 경계로 바깥은 양지, 실내는 어디까지나 음지였다. 수많은 형광등 불빛으로 서점은 좀 지나치다 할 정도로 밝았으나 조도가 질적으로 달랐다. 나는 뭐랄까, 창백하게 눈을 쏘는 빛 속에서 햇빛을 바라보는 일이 많았다. 어느 날의 일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오후에, 유리를 통해 노랗게 달아오르고 있는 계단을 바라보다가 저 햇빛을 내 피부로 받을 수 있는 시간이 하루 중에 채 30분도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햇빛이 가장 좋은 순간에도 나는 여기 머물고 시간은 그런 방식으로 다 갈 것이다. 다시는 연애를 못 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런 기회를 더는 상상할 수 없었다.

 

황정은은 입이 없는 사람들이 단 한 번도 해보지 못했던 이야기를 말로 길어 올리는 작가다. 마치 소설 속의 그녀처럼, 황정은도 이들의 미래에 관해 ‘선택’하지 않는다. 그래서 황정은의 소설들은 어설픈 동정이나 허무한 체념으로 귀결되지 않는다. ‘미래가 여전할 것이다’라는 말은 슬픈 자조처럼 들리기도 하지만 더 나쁘지는 않을 것이라는 작은 바람으로 여겨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런 방식의 수사법이 황정은의 것이라는 점을 인식한다면 왜 이 소설의 제목이 「양의 미래」여야 하는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을 것도 같다.

그러나 역시, 아직도, “양의 미래”란 도대체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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