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에 읽은 시

지옥의 풍경들

(이 글은 월간 <심상> 10월호에 실려 있습니다)

 

이번 계절에는 유독 절망이나 파국을 그린 시편이 많았다. 그런 작품들은 대체로 추상적이거나 관념적이어서 작품의 목적을 알기 어렵다. 어쩌면 결국 그것이 언어로 파국을 그려내는 유일한 방식일지도 모른다. 근원적인 절망에는 어떤 이유도 찾기 힘들고, 파국이란 우리가 알고 있던 어떤 실체가 사라져버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작품들 사이에서 메시지가 분명한 시를 골라 보았다. 메시지의 분명함이 시의 우수함을 보장해주는 것은 결코 아니지만, 메시지가 분명하면서 시적으로 우수할 수 있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여자는 식탁 위에서 자꾸만 늙어갔다

오래된 허공을 걸어왔으니

저녁은 발목이 아픈 여자의 형식이 되었다

서랍에 넣어야 할 몽키스패너를 설거지통에 던져버리고

입술에서 발밑까지 흘러내린 악몽

왼쪽 어깨를 들썩이며 여자는 몇 번이나 고쳐 앉았다

인생은 어디에나 있어요

하지만 물이 새는 집에서 살 순 없죠

사방에 흩어진 페이지들

대체로 그런 동정은 접시에 담을 수도 없다

그녀가 물려받은 거라곤 쓸데없는 책들과 슬픔

어쩔 수 없는 몽키스패너

물끄러미 바닥에 앉아서 여기가 바닥이야,라고 말하는

여자의 등을 아무도 쓸어주지 않는다

맨날 체하고 지랄이야

소화가 되지 않는 저녁에

약도 없이 찬물만 마시다가 여자는 가만히 들썩인다

이유가 없어도 창문은 삐걱대고

7월의 느티나무가 부엌까지 가지를 늘어뜨렸다

살면서 고장 하는 것들은 언제나 고장이 나선 안되는 것들이다

시들어버린 손목과

고무패킹이 망가진 수도꼭지

언제부턴가 여자는 시집조차 읽지 않는 가장이 되었고

수선할 곳이 많은 엄마가 되었다

인생은 어디에나 있어요

하지만 모두가 떠난 곳에서 기다릴 수는 없죠

세상에 없는 당신

저만치 내려앉은 나뭇잎

한밤의 깊은 공중에 대고 여자는 힘껏 웃었다

 

이용한, 「한밤의 몽키스패너」, 《창작과비평》, 2014년 가을호

 

시인이 섬세하게 고른 이 시어들 속에서 “여자”의 사연을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다. 삶이 폐허가 되고, 생활이 지옥이 되는 것은 정말로 한 순간이어서 이 여자는 지금 “가장”이자 “엄마”의 이름을 달고 있다. 아마 몽키스패너를 들고 물이 새는 곳을 수리해야 할 누군가는 “세상에 없는 당신”이 되었으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생은 어디에나 있는 것이어서 어떤 7월의 저녁에 여자는 망가진 수도꼭지를 고쳐야만 한다. 그 저녁을 설명하는 도입부가 이 시에서 눈을 뗄 수 없게 만든다. “여자는 식탁 위에서 자꾸만 늙어갔다/ 오래된 허공을 걸어왔으니/ 저녁은 발목이 아픈 여자의 형식이 되었다” 한 사람의 결여를 오래된 허공으로 묘사하고, 그것을 오래도록 걸어 발목이 아픈 저녁의 이미지로 표현해내는 시인의 감각이 탁월하다. 이 부분을 읽으면 식탁 위 허공에 떠 있는 한 늙은 여자가 무표정한 얼굴로 발목을 휘젓는 장면을 떠올리게 된다. 그리고 그 이미지 때문에 어쩌면 뻔해 보이는 이 순간이 심상하지 않은 의미를 띠게 된다. 고장이 나선 안 되는 것들이 늘 고장 나는 것이 인생이고, 그것은 어디에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이 여자도 알고 있다. 자기의 사연이 특별할 것이 없다는 것을. 하지만 수도가 터져 사방으로 물이 튀고, 소화도 되지 않는 저녁에 어쩔 수 없이 몽키스패너를 들고 “여기가 바닥이야”라고 무심코 내뱉고 마는 순간이 찾아오는 것이다. 아무도 여자의 등을 쓸어주지 않는 이 순간은 오로지 그녀 혼자만의 것이고, 서랍에 넣어야 할 몽키스패너를 설거지통에 던져버리는 이 악몽은 결코 깰 수 없는 것이어서, 여자는 그저 힘껏 웃고 만다.

 

 

주저앉아 있었다. 넘어진 채로 스쿠터 바퀴는 돌고 있었다.

버스 승객들이 창밖으로 머리를 내밀었다. 버스들이 잘 비켜서 지나갔다. 부모는 아이의 눈을 가려주며 조용히 지나갔다.

땅을 더듬거리며 잘려나간 발목을 찾고 있었다.

 

주저앉아 있었다. 흙을 움켜지고 있었다. 손아귀 바깥으로 길게 삐져나와 꿈틀거리는 것들을 다시 흙에다 비볐다.

지지야, 먹으면 안 돼, 손바닥을 털어내며 일어섰다.

지렁이 조각들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기어갔다.

 

주저앉아 있었다. 꽁초를 주워 물고 있었다.

다가와 라이터를 건네주었다. 혼자니? 잘 데 있어? 지금 집에 가려고요. 그러지 말고. 도와주려고 그래. 옆에 앉았다. 무릎에 손이 올라왔다.

 

주저앉아 있었다. 시든 자운영을 뽑았다. 그 자리에 해바라기를 심었다.

수고했다, 금세 예뻐졌네, 선생이 다가와 꽃밭을 바라보았다.

바깥에 내다놓은 걸상들이 비를 먹었다. 가만히 뒤틀려갔다.

 

나는 증오합니다. 이런 짓은 그만두어야 해요. 레바논 사람이 말을 걸었다.

나도요. 접시를 들고 서서 대답했다.

송아지 바비큐에서 맛좋은 냄새가 풍겼다.

 

국도에서 눈이 마주쳤다. 끌면서 몇 걸음을 걸어갔다.

흘리고 온 내장을 바라보며 주저앉기 시작했다.

돌아섰다. 좋은 사진을 얻었으니까.

 

임솔아, 「케빈 카터」, 《문학동네》, 2014년 가을호

 

이 시인이 그리고 있는 세계의 풍경은 그야말로 역설적이다. 주어 없는 저 여러 문장이 가리키듯 주저앉아 잘린 발목을 찾는 이도, 흘린 내장들 사이에서 사진을 찍고 돌아서는 이도 우리의 모습이다. 그리고 그것은 이 세계가 지옥의 풍경에 가깝다는 사실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이 시의 제목인 케빈 카터는 남아공 출신의 사진작가 이름이다. 사진작가의 이름은 생소할 수 있지만 이 작가가 찍은 한 장의 사진과 그와 관련된 일화는 널리 알려져 있다. 앙상하게 마른 한 아이가 땅바닥에 엎드려 있고, 그 뒤에 독수리 한 마리가 마치 아이의 죽음을 기다리는 듯 앉아 있는 한 장의 사진이 그것이다. 그리고 그 사진으로 케빈 카터가 퓰리처상을 받고, 그와 동시에 아이를 구하지 않고 사진을 찍었다는 비판에 시달리다가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한 이야기는 접해본 기억이 있을 것이다. 이와 관련된 여러 추측과 진실 공방 등이 있지만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이 시인이 그로부터 무엇을 가져왔느냐는 것일 테다. 그리고 아마도 그것은 타인의 불행이나 세계의 비극을 마치 렌즈를 통해 들여다보고 있는 우리의 모습일 것이다. 그 모습이 얼마나 진실된 것인지와 관계없이 다만 우리는 관찰자 혹은 방관자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이 시는 다채롭게 보여준다. 곤혹스러운 것은 그 다채로움이 지옥의 풍경이라는 것이다.

 

 

원자력발전소가 보이는 해변에서 수영한다. 바다 수영은 위험하다. 어머니요? 내 손으로 못 죽인 게 한이오. 사람은 위험하다. 서해안은 파도가 얕다. 얕은 파도는 위험하다. 어디든 인간의 발이 닿는다. 어머니는 보상금을 두고 동서들과 생선처럼 싸웠다. 땅바닥에 닿은 물고기처럼 온몸을 파닥거리며 잘못 구운 조기처럼 속까지 타서는. 원자력발전소의 등 뒤에서 연기가 피어오른다. 어머니요? 내 손으로 못 죽인 게 한이 된다오. 살인범들은 굴비처럼 포승에 묶여 말했다. 말린 생선 같은 표정으로. 사람 고기 먹어 봤소? 냄새가 날까 봐 육 고기를 같이 구웠어. 사람은, 위험하니까. 원자력발전소가 보이는 해변은 위험하다. 보상금을 받으러 온 인간들이 바닥을 샅샅이 뒤진다. 피폭된 어머니가 누워 있는 바닥을. 어머니는 우리를 위험에 빠뜨렸다. 나는 참을 수 없다. 그 곁에서 생선의 살을 발라 먹는다. 에너지, 그래 에너지가 솟아난다. 나는 그저 효도를 위해 농장 지하에 아지트를 만들었을 뿐이다. 어머니요? 사람은 위험하다. 사람을 먹어서는 안 된다. 더 이상 우리는 사람을…… 해변에 서서 연기가 나풀거리는 원자력발전소를 본다. 엄마의 젖무덤이,

 

서효인, 「영광」, 《세계의문학》, 2014년 가을호

 

지금 지옥이 되어가는 세계를 단번에 보여줄 수 있는 단 하나의 소재를 찾으라면 “원자력발전소”만한 것이 없을 것이다. 2011년 후쿠시마 원전사고 이후 세계의 종말에 관한 상상력은 실감의 차원으로 옮겨 왔다. 이 시인이 동원하고 있는 어휘들을 유심히 보라. 모두가 “영광”의 것들이다. 원자력발전소도, 바다와 파도와 굴비도, 그리고 보상금 문제까지 얼기설기 얽혀 있는 곳이 저기 영광이다. 어디든 인간의 발이 닿는 곳은 위험하다는 시인의 말이 수사적으로만 들리지 않는 것은 이 지옥을 만들어가고 있는 것이 바로 우리이기 때문이다. 보상금 문제를 두고 동서들과 “생선처럼” 싸우는 어머니, 어머니를 죽이지 못한 것이 한이라는 살인범들, 그리고 피폭된 나의 어머니. 이 모든 풍경이 혼란스럽기 그지없는 지옥이 아니고 무엇일까. 이 지옥 속에서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결국 이것이지 싶다.

그러니까 우리는 더 이상 사람을 먹어서는 안 된다.

 

 

답글 남기기

아래 항목을 채우거나 오른쪽 아이콘 중 하나를 클릭하여 로그 인 하세요:

WordPress.com 로고

WordPress.com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Google photo

Google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Twitter 사진

Twitter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Facebook 사진

Facebook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s에 연결하는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