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정은, 계속해보겠습니다(2014, 창비)

 (이 글은 계간 <문학의 오늘> 겨울호에 실려 있습니다)

x9788936434151

 

 

사려 깊은 세 가지 목소리

 

 

소설은 결국 언어의 예술이라 같은 이야기를 하더라도, ‘누가’ 하느냐에 따라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 ‘어떻게’가 아니라 ‘누가’인 이유는 소설이 또 결국 화자의 예술이기 때문이다. 소설은 문자로 이루어져 있지만 그 문자들 속에서 우리는 어떤 목소리를 듣게 된다. 소설 속의 인물들이 목소리를 통해 재현되는 일종의 피조물이라고 볼 때, 이 목소리의 주인공이 사실은 소설의 주인이다. 그리고 그 목소리는, 당연한 말이겠지만 우리 모두에게 다르게 들린다. 따라서 내가 읽은 한 편의 소설은 다른 누구의 것과도 다른, 오로지 나만의 것이고, 내 안에 들어 있는 목소리였지만 지금까지 결코 들어본 적 없는 목소리를 듣게 되는 순간이다. 그런데 그것은, 역시 당연한 말이겠지만 ‘좋은 소설’의 경우에만 그러하다.

황정은의 소설 『계속해보겠습니다』 속에는 세 개의 목소리가 있다. 소라와, 나나와, 나기. 연재 당시 제목이 “소라나나나기”였던 것을 상기하면, 이 세 명이 가지고 있는 끈끈한 유대감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 소라와 나나는 자매고, 나기는 기묘한 형태의 옆집에 살던 또래의 소년이었다. 그리고 소라, 나나의 엄마 애자, 나기의 엄마 순자, 나나의 애인 모세 등이 ‘소라나나나기’의 삶에 함께 서 있는 사람들이다. 여기에서 분명하게 해 두어야 할 것은 ‘엄마’라든가 ‘애인’이라는 명명이 그 인물을 설명하기에 별로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 소설 속의 목소리가 정의하는 삶이란 “하나뿐인 부족의 멸종”이기 때문에, ‘관계’를 지칭하는 말들은 무시된다. 아니, 무시된다기보다 그 관계라는 것이 너무도 복잡하고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달라서 하나의 단어로 정의하는 방식은 ‘거부’된다. 이를테면 소라와 나나의 엄마인 애자와 나기의 엄마인 순자는 얼마나 다른가. 그들은 ‘엄마’라는 단어로 결코 한데 묶을 수 없는 생을 살고 있다. 나나의 애인인 모세 역시 마찬가지이다. “사랑에 관해서라면 (…) 헤어지더라도 배신을 당하더라고 어느 한쪽이 불시에 사라지더라도 이윽고 괜찮아,라고 할 수 있는 정도. 그 정도가 좋습니다”(104면)라고 표현하는 감정을 갖게 된 사람에 대해 애인이라는 말을 붙일 수 있을까. 나나가 그 사람의 아이를 가지게 되었다고 해도 말이다.

그러니까 이 소설은 “간장을 좋아하는 소라”라는 부족과, “간장을 싫어하는 나나”라는 부족, “간장을 싫어하지도 좋아하지도 않는 나기”라는 부족의 이야기이다(왜 갑자기 “간장”인지 의아할 테지만 나는 이 장면을 굳이 설명하지 않으려 한다. 이 책의 52면을 펼친 후 직접 읽어 보시라). 그리고 그 부족은 재차 얘기하건대 단 한 명뿐이다. 족장이자 동시에 부족민인 운명, 어떨 때는 내가 삶의 주인인 것처럼 느껴지지만 대체로는 삶이 내 것이 아니라고 느끼는 어떤 부족. 그 부족을 감싸는 사려 깊은 목소리가 이 소설의 주인공이다.

소설 초반부, 애자는 인간의 생이란 언제고 갑자기, 톱니바퀴에 갈려 죽어서 중단될 수 있는 것이라 말한다.(12면) 자신의 남편 김금주의 비참한 죽음은 그가 특별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냥 “그게 인생의 본질”이라는 것. “허망”해서, “무엇에도 애쓸 필요가 없”는 것이 인간의 삶이라는 ‘단언’이다. 그래서 살아가는 데는 “아무래도 좋을 일과 아무래도 좋을 것”으로 가득 채우는 편이 좋다는 말, “죽고 나면 그뿐”이라는 말들을 무심하게 흘리고, 그 말들은 “달콤하게 썩은 복숭아 같고 독이 감긴 아름다운 주문”처럼 소라를 말려들게 한다. 그래서 소라는 “좋은 것”만 보고 들으려고 한다. 그런데 그 말, 우리가 어디서 자주 듣던 게 아닌가. 아주 작은 아이를 위한 축복의 말, 세상의 추(醜)를 멀리하기 바라는 마음. 그 마음을 교묘하게 바꾸어 이 작가는 “아무래도 좋은 것”을 찾아다녀야 했던 소라를 그리고 있다.

나나가 경계하는 것은 “전심전력”을 다하는 삶이다. 애자의 남편이자, 소라와 나나의 아빠인 김금주의 죽음은 소꿉놀이로 제사를 지내는 아이들의 풍경, 같은 것을 남겼다. ‘전심전력’을 다해 사랑했으므로 그 죽음 앞에서 단번에 무너지는 애자의 삶을, 아이들은 목도한다. 그래서 나나는 늘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다. 특히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탄생하는 온갖 “당연한 수순”에 대해 끝없는 회의를 드러낸다. 그리고 결국 모세와의 결혼을 거부한다.

나기는 소라와 나나를 동굴 속에서 꺼내준 인물처럼 그려지지만 사실 더 깊숙한 동굴에서 생을 지내왔다. 나는 그 동굴의 사연에 관해서 여기에서 이야기하지는 않을 참이지만 그곳이 엄청난 고통으로 점철되어 있었음은 짐작 가능할 것이다. 그곳을 헤쳐 나온 나기는 그러므로, 단단한 사람이다. 동시에 그는 하염없이 ‘너’를 기다리는 약한 사람이다. 그러니까 사소하고 여린 존재들이 삶을 단단하게 살아가기 위한 태도, 같은 것을 나기는 익혔다. 타인의 고통을 끝내 알 수는 없지만 자신의 고통을 통해 타인의 고통을 이해해보려는 시도, 그래서 “괴물”이 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섬세하고 사려 깊은 이 세 개의 목소리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특별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 아마도 줄거리를 요약하면 단순하기 그지없을 것이다. 이런 이야기는 넓은 것이 아니라 깊다. 시작은 있지만 끝이 없는 이야기다. 그리고 이를 감당하는 힘은 황정은의 문장이다. 작가로서의 황정은은 한국어로 소설을 쓰는 일에 언제나 전심전력을 다한다는 느낌이다. 허투루 쓰이지 않는 어휘들, 많은 것을 담고 있는 이름들, 담백하면서도 정곡을 찌르는 대화들, 앞뒤로 밀착되어 좀처럼 떼어내 읽기 어려운 문장들. 이런 것들이 여리고 희미한 이야기들을 견고하게 지탱한다. 그리고 이 작가의 어떤 태도.

세계는 망했다, 혹은 망한다, 또는 망할 것이라는 진단이 이 작가의 소설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것 같다. 그것은 비단 황정은만의 문제의식은 아니다. 한국의 젊은 작가들은 대개 이런 문제에 고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황정은의 포즈는 자못 독특한 면이 있다.

 

그렇게 금방 망하지 않아.

세계는, 하고 덧붙이자 나나가 말했다.

그렇게 길게 망해가면 고통스럽지 않을까.

단번에 망하는 게 좋아?

아니.

그럼 길게 망해가자.

망해야 돼?

그렇게 금방 망하지는 않겠다는 얘기야. (222면)

 

세계는 망한다. 아니, 망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망해 가고 있는 것 같다. 그럼 언제 망하게 되나. 모르겠다. 하지만 “금방 망하지는 않겠다는 얘기”, 그것이 황정은이 가진 태도다. 『百의 그림자』(민음사, 2010)를 시작으로 『야만적인 앨리스씨』(문학동네, 2013)를 거쳐 『계속해보겠습니다』(창비, 2014)에 도달한 황정은은 사람과 삶에 대해, 세계에 관해 ‘선택’하지 않는다.

소라는 직장의 어떤 남자와 사랑에 빠진 것 같지만 그렇지 않을지도 모른다. 나나는 아마도 아이를 낳을 테지만 가족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나기는 ‘너’를 기다리지만 끝내 오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보겠다는 것, 하찮고 무의미하고 덧없는 존재들이지만 소중하지 않은 것은 아니므로 삶을, 사랑을, 이야기를 계속해보겠다는 이 태도야말로 작가 황정은을 지지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다.

 

 

답글 남기기

아래 항목을 채우거나 오른쪽 아이콘 중 하나를 클릭하여 로그 인 하세요:

WordPress.com 로고

WordPress.com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Google photo

Google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Twitter 사진

Twitter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Facebook 사진

Facebook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s에 연결하는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