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에 읽은 시

시적 환상의 세계

(이 글은 월간 <심상> 11월호에 실려 있습니다)

시 읽기의 즐거움은 대체로 어떤 정서의 공유에서 오는 것이지만 때때로 다른 방향에서 찾아오기도 한다. 물론 그것 역시 ‘정서의 공유’가 없다고는 할 수 없겠으나 뭐라 딱 잘라 이름 붙이기 어려운 ‘분위기’ 자체가 감응을 주는 경우가 있는 것이다. 이 형용할 수 없는 감응의 방식을 시적 환상이라 불러도 될까. 환상은 대체로 현실의 반대쪽을 가리키는 어휘로 사용되지만 그것에 ‘시적’이라는 수사를 갖다 대면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몇 개의 이미지와 또 몇 번의 시적 기교로 형성되는 이 시적 환상의 세계는 서사에서의 환상과 완전히 다르다. 시적 환상에는 개연성이라는 잣대를 들이댈 수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개연성을 가진 환상이라면 그것은 ‘시적’이라 이름 붙이기 어려울 것이다. 이를 잘 보여주는 시 세 편을 꼽아 보았다.

 

 

숲에 가득한 건 비밀들. 아이들이 축구를 한다. 신발이 없어 울고 있으니, 발이 없는 자가 다가왔다는 페르시아 속담.

 

아이들은 양탄자를 짜고 축구를 한다. 실패를 둘둘 말아서 너의 발이 멀리 날아가도록 힘껏 찰게. 붉은 실이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간다.

 

비밀은 잎에서 잎으로 건네진다. 아이들이 발을 찬대. 공은 흐르고, 공보다 아름다운 맨발이 흐른대.

 

예전에는 슬픔을 돌보았대. 눈물이 영웅이 되는 시간. 이 숲에 와서 잎사귀가 자라도록 울고 아이들은 강을 건너간다.

 

경기가 끝나자 무성한 나무들이 여름을 떠나간다. 오래된 나무집 그늘 남은 빛으로 빠져든다. 이 세계에는 오로지 한 계절뿐인데, 양탄자를 짜느라 계절을 넘어가고 있다.

 

아이들의 기후는 양탄자에 모여 있다. 비밀인데, 아이들은 그렇게 늙어가고 있대. 실에는 흰 눈이 내리고. 멀리 날아갔던 발들이 모여 있대.

 

이영주, 「숲의 축구」, 《한국문학》, 2014년 가을호

 

독특한 상상력을 발휘하는 시인들은 여럿 있지만, 그 중에서도 이영주는 특히 주목할 만하다. 올해 『차가운 사탕들』(문학과지성사, 2014)이라는 시집에서 그 일단을 보여준 바 있듯, 위 시에서도 시인이 보여주는 시적 환상의 세계는 단순히 상상력의 차원에서만 머물지 않는다.

이 시에 쓰인 주요 어휘들은 “숲”, “비밀”, “아이들”, “축구”, “발”, “양탄자”, “계절” 등이다. 이 어휘들이 번갈아가며 만들어내는 시적 분위기는 그야말로 “비밀”스럽다. 숲에서 축구를 하면서 양탄자를 짜는 아이들의 모습은 소문으로만 전해진다. “-한대”로 소곤대는 시적 화자의 목소리는 숲에 가득한 비밀을 한층 부각시킨다. 신발이 없는 아이들이 실패를 공 삼아 차고, 또 맨발을 차면서 강을 건너가는 모습은 쉬이 상상하기 어려운 모습이지만 그러한 이미지들 속에서 숲의 비밀을 지켜보는 듯한 감각은 분명하게 느껴진다. 비밀이 입에서 입으로 건네지는 것이 아니라 “잎에서 잎으로 건네”지는 세계에서 시간은 여름을 지나 흰 눈이 내리고, 아이들은 늙어가고 있다. 이 세계를 “숲의 축구”라 이름 붙인 시인의 시선은 얼마나 독특한가. 숲과 아이들이 등장하는 동화적 장면으로 이 시를 읽든, “신발이 없어 울고 있으니, 발이 없는 자가 다가왔다는 페르시아 속담”처럼 이곳을 그로테스크한 세계로 바라보든, 그것은 독자의 몫이다.

 

 

옷을 빼입고 젊은이들이 춤을 추고 있네

 

입을 다물 수 없듯이 항문도 다물 수 없지

 

빙빙 돌면서 젊은이들 춤을 추네 노래하며

 

하늘 어지러워 구름을 몰라 계절은 가고

 

햇빛의 혀만 낙과들의 얼룩을 핥고 있네

 

젊은이들 발밑에서 낙과들은 툭툭 터지고

 

피리 소리 하나 바람 속에 없는 마을인데

 

젊은이들 다 늙어도 춤과 노래 그치잖네

 

썩은 과일향 풀풀 퍼지고 온 마을 감싸고

 

바래고 삭아 햇빛에 옷자락 흩어지는데

 

머릴 버릴 수 없듯이 꼬릴 버릴 수 없지

 

옷을 빼입고 젊은이들이 춤을 추고 있네

 

김근, 「원무圓舞」, 《문학과사회》, 2014년 가을호

 

꾸준히 자기 세계를 단련해온 김근의 시를 소개한다. 그도 올해 『당신이 어두운 세수를 할 때』(문학과지성사, 2014)라는 세 번째 시집을 펴냈는데, 상상력과 언어, 그리고 리듬이 한데 어우러지는 실험을 계속하고 있다. 아니, 실험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이제 이 시인에게 그런 방식은 완전히 체화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한 줄의 시구가 일관된 리듬을 타고 흐르는 이 시는 마치 시조의 형식을 빌려 온 것 같다. 그러나 그 율격은 시조의 그것과 조금 다르다. 44조의 음수율인 것처럼 보이지만 글자의 수가 중요한 것은 결코 아니다. 다만 4언보(言步)라 부르고 싶은, 어떤 네 어절의 계속되는 반복이 흥미롭다. “옷을 빼입고 젊은이들이 춤을 추고 있네”라는 구절이 “머리”와 “꼬리”에서 맞물리는 시적 형식과 4언보의 리듬, 그리고 원무(圓舞)라는 시적 상황이 만나 뭐라 설명하기 어려운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핵심은 젊은이들이 춤을 춘다는 것, 그리고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춤은 끝나지 않는다는 것. 그러므로 그것은 원무가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아무리 반복되어도 결국 꼬리를 버리지 못하기 때문에 끝없이 이어지는 이 순환의 세계를, 시인은 언어의 발걸음으로 보여주고 있다. 여기 소개하지는 못하지만 같은 지면에 실린 「희디흰」, 「유래」 등의 시편도 그러한 작업의 연장선상에 있다.

 

 

아닌 게 아니라 수풀 사이의 사냥개는 우릴 향해 짖고 있었다

이 정원의 정원은 두 쌍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다 둘러보셨으면 두 분이 먼저 산책 좀 하다 오세요.

주인 여자는 웃으면서 우리를 밖으로 내몰고

 

초록은 정원이 아닌 곳에서도 무량해서

초록에 물든 감개를 도려낼 자리가 없다 대충 뭉개고 뒷짐 지는데

발이 자꾸만 미끄러진다 내가 산책로를 허투루 점지하나 보다

초록을 그리 깊이 파고들지 않기에 우린 정원에 다시 몸을 맡길 수 있고

다른 한 쌍이 우릴 따라 산책을 나선 지 한참 됐다는 얘기를 듣는다

 

후발대의 산책이란 결국 미행에 걸음 전부를 희사할 운명임을 알기에

화면을 끄고 유랑을 속여 팔 음모 따윈 남김없이 소각했는데도

 

왜 우리가 덜 자란 얼굴 두 개를 얕게 파묻고 돌아온 기분이 들까

매립을 가까이하면 매복이 되는 법이고

불쑥 솟은 얼굴들이 잎사귀들을 셍겨 가면으로 삼고 우우우 그들을 가로막는 상상 속에서

나는 나뭇가지를 꺾어 만든 상상의 총을 빼앗지 못하고

 

올 때 되면 오겠지.

물에 물을 주고 화분에 화분을 심자는 느긋한 소리에

내 속에서 우거지는 것이 있지만 아마도 초록의 예시는 아니다

사냥개는 무엇에 정신이 팔려 정원을 뛰쳐나갔을까

 

앞선 침묵들이 봐둔 귀로가 엉키지 않도록 돌팔매질조차 삼가던 중

문득 상상의 총에 총알을 장전하지 않았다는 데 생각이 미쳐 안도했지만

초록 제복의 삽화에도 어물쩍 분홍을 칠하는 망상의 마지막 소절이

나뭇잎 그림자 사이를 뒤척이는 것은 어찌할 재간이 없어 배회를 지지하기로 하고서도

 

멀리서 개 짖는 소리에 누군가 유령을 되팔고 있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전문영, 「정원」, 《21세기문학》, 2014년 가을호

 

 

시적 환상의 세계는 개연성이나 필연성을 요구하지는 않지만 끈끈한 이미지들의 연쇄를 반드시 필요로 한다. 끈끈함이란 시에서 쓰이는 언어가 그 어느 것도 허투루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고, 하나의 시어가 다른 시어와 끊임없이 교류해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 시인은 그런 면에서 끈끈함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이 시는 어떤 초록의 정원과 그 정원을 탈출한 사냥개, 그리고 그 곳을 산책하는 우리에 관한 것이다. “이 정원의 정원은 두 쌍이 아닐지도 모르겠다”라는 오묘한 구절로 촉발되는 이 시의 분위기는 “초록은 정원이 아닌 곳에서도 무량해서 / 초록에 물든 감개를 도려낼 자리가 없다 대충 뭉개고 뒷짐 지는데”와 같은 감각적인 구절로 고조된다. 감개무량이라는 흔한 말을 이런 식으로 쪼개 쓰는 시인의 언어 감각은 계속해서 이어진다. “후발대의 산책이란 결국 미행에 걸음 전부를 희사할 운명”이라든가 “물에 물을 주고 화분에 화분을 심자는 느긋한 소리” 등의 구절은 이 시인이 지금 얼마나 예리하게 날이 서 있는지 분명하게 보여준다. 이 명징하면서 동시에 모호한 시어들 속에 ‘정원’에 서 있는 ‘우리’가 있다. 우리는 주인여자의 권고에 따라 산책을 나가려고 하지만 자꾸만 미끄러져 실패한다. 그리고 우리를 따라 나섰다던 다른 한 쌍이 있다. 그들은 한참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고 우리는 “덜 자란 얼굴 두 개를 얕게 파묻고 돌아온 기분”이 든다. 급기야 “상상의 총”을 마련하고야 마는 이 속절없는 죄의식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리고 이 정원이 가져다주는 공포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

이 질문에까지 우리를 이르게 하는 것이 ‘시적 환상의 세계’의 소임이다. 그 이후와 이전을 고민하는 것은 또 다른 방식의 독해를 필요로 하는 일이다. 그러니 우선은 시인이 만들어내는 그 세계에 일단 흠뻑 빠지고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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