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민석, 풍의 역사(2014, 민음사)

도대체 이야기란 무엇인가

(이 글은 계간 <세계의 문학> 겨울호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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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최민석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그가 『풍의 역사』라는 장편소설을 썼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을 때 이 風이 “허풍”을 의미하리라 어렵지 않게 짐작했을 것이다. 『능력자』(민음사, 2012)와 『쿨한 여자』(다산책방, 2013), 그리고 소설집 『시티투어버스를 탈취하라』(창비, 2014)로 이어지고 있던 도저한 ‘풍’의 기운을 느끼지 못했을 리 없기 때문이다. 그 기운을 굳이 한 문장으로 요약하자면 “도대체 이야기란 무엇인가”라고 할 수 있을 테고, 『풍의 역사』는 그 질문에 대한 작가 최민석의 결기 가득한 대답이다.

그렇다. 최민석이 정말로 최민석다운 소설을 또 들고 나왔다. 이 소설은 지금까지의 최민석을 종합한 것이라 과감하게 말할 수 있고, 다시 한 번 강조하건대 작정하고 쓴 “이야기”이다. 그러나 그 비장함은 온갖 허구들에 둘러싸여 있어서 쉽사리 눈에 띄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이 허구의 범람 속에 황당함을 느낄 사람들이 훨씬 많을지 모르겠다.

나는 지금 허풍이나 허구 같은 단어들을 무람없이 쓰고 있지만, 사실 이 단어들은 소설의 주인공들을 가리킨다. 세계사적으로 유례없이 대단했던 ‘1930년’에 태어나 역사의 격랑 속에 늘 서 있었던 “이풍”, 그의 아들 “이구”, 그리고 풍의 손자이자 소설의 화자라 할 수 있을 “이언”이 그들이다. 그리고 이들 모두가 실제의 이름과는 달리 허풍, 허구, 허언으로 불리게 된 이유와 그 과정이, 바로 이 소설의 내용이다.

소설의 제목에서 알 수 있듯, 1930년으로부터 시작해 20세기 전체를 관통하는 “풍”의 역사가 이 작품의 주된 내용이다. 풍이 마주하는 삶의 순간들은 일제강점기, 한국전쟁, 베트남전쟁, 유신 시대, 민주화 운동 등 한국 근현대사의 주요한 국면들이다. 이런 거대한 사건들을 헤쳐 나가는 풍의 모습은 마치 무협지를 연상시키는 대결구도와 과장된 상황들로 점철되어 있다. 그리고 최민석은 작가 특유의 ‘첨언’과 ‘요설’의 방식들로 이 한 편의 무용담을 어떻게 읽을 것인지 독자에게 끊임없이 묻는다.

이 작가가 생각하는 이야기란 삶을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이자, 삶 그 자체이다. 소설의 마지막 장면에서 풍의 육체는 숨을 멈추었지만 입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언제나 살아 있어서 끝내 우리를 소설의 첫 장면으로 다시 돌아가게 만드는 것처럼, 사람의 역사(이야기)가 곧 그 사람이라는 것이다.

역시 삶은 이야기였다. 그것은 어떤 이에게는 단지 이력서에 몇 줄 써질 경력에 불과하겠지만, 어떤 이에게는 밤하늘의 별처럼 잠들지 않게 하며, 이불을 덮고서도 그 속에 빠져 새벽을 맞게 하는, 즉 살아 있는 동안만큼은 누구에게나 자신을 주인공으로 하여 여전히 흘러가고 있기에, 또 하루를 온전히 살게 하는 바로 그 이야기였다.(277면)

삶은 매일 새로운 원고지가 주어지는, 퇴고가 불가능한 이야기라는 것. 그래서 한 사람의 삶은 소설이 될 수 있고, 소설 자체가 그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를 이야기에 대한 맹목적인 신앙이라고 불러도 좋고, 지나친 신화화로 여겨도 변명의 여지는 없다. 오히려 문제는, ‘모두 다 이야기할 수는 없다’는 것에 있다. 세상의 어떤 누구도, 어떤 방식으로도 삶의 모든 것을 전부 이야기할 수는 없다. 그러니 우리는 선택해야만 한다. 특히 소설을 쓰는 사람이라면 이 난감한 상황에 항상 처해 있게 된다.

이 선택 앞에서, 최민석은 솔직하다. 모두 다 말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할뿐더러 어떤 것들은 당연히 감추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러곤 다시 ‘허허허’ 하며 웃었기에, 사람들은 이때부터 풍을 이풍이 아닌 허풍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박씨를 제외한 그 누구도 풍에게 진실을 따지진 않았는데, 이는 사람들 모두 풍의 그 웃음이 삶을 견디는 방식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120면)

어떤 것을 감춘다고 해서, 혹은 그것이 진실이 아니라고 해서 삶이 지속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가 일생을 ‘허풍’으로 살았다고 해도 ‘이풍’의 삶이 사라지는 것은 아닌 것처럼 말이다. 이야기란 삶에 붙여진 일종의 가명 같은 것이어서 어떤 부분은 대놓고 드러내면서 또 어떤 부분은 숨길 수밖에 없는 속성을 갖는다.

그럼 어떤 부분을 드러내고, 또 감출 것인가. 여기에서 최민석의 지향이 명백히 드러난다. 그는 개인의 삶을 지나치게 미시적으로 파고드는 방식을 선호하지 않는다. 현실과 사회, 역사 같은 일견 거대해 보이는 삶의 조건들을 부러 무시하는 태도를 거부하고, 이를 오히려 과장되게 드러낸다. 이 방식이 ‘유치’하다고 생각하는 의견들에, 나는 동의한다. 하지만 그러한 방식에 엄청난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풍의 역사』에서 ‘삼대’가 겪은 풍파는 이들의 영웅적 활약에 가려져 있다. 너무 끔찍하고 고통스러워서 “사실을 감추고 싶은 게 아니라, 때론 이야기에도 생략해야 할 장면이 있다고 믿기 때문”(231면)이다. 어차피 모든 것을 말할 수 없다면 슬픔을 감추고 기쁨을 드러내는 것이 잘못된 태도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온갖 허풍과 무용담으로 삶을 재구성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받았던 고통이나 상처 같은 ‘사실’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또한 삶의 ‘진실’-그런 것이 있다면-도 여전히 어딘가에서 반짝이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삶을 매일 견딜 수 있게 해주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다. 이 작가가 골백번도 넘게 말하고 있지 않은가. 그것은 “웃음”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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