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호, 라이터 좀 빌립시다(문학동네, 2014) / 김안, 미제레레(문예중앙, 2014)

(이 글은 계간 <포지션-POSITION> 겨울호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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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혼자요” 하고 말하자

여인숙 주인이 숙박부에 그렇게 적었다

이 추운 겨울밤

코바야시 잇사(小林一茶 : 1763-1827)의 하이쿠

홀로이고 싶은, 홀로일 수 없는

이현호, 라이터 좀 빌립시다(문학동네, 2014)

좋은 시인이 갖추어야 할 여러 조건들이 있다. 그 중 첫 번째 감각은 역시 언어에 관한 것이겠다. 그리고 그 다음을 시적 상상력이라 보아도 좋지 않을까. 그런데 사유를 언어화 하는 것 자체가 일종의 상상력이라고 본다면, 어쩌면 언어에 대한 감각이 곧 상상력을 담보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전쟁은 늘 현재진행형

‘세상의 모든 군인이 일시에 무기를 내려놓는다면’

평화를 위협하는 건 순진한 상상이 아니라

상상하지 않는 순진함

「우주 혁명 전선」 부분

순진한 것은 단순하고 대책 없는 상상이 아니라 그것조차 하지 않는, 그러니까 질문을 던지거나 변화를 꿈꾸지 않는 상상력 없음이다. 이 시인은 자신의 첫 시집을 통해 대담한 상상력을 보여주면서 오로지 하나의 질문을 던지고 있다. 이는 ‘최초의 인간은 누구인가’ 혹은 ‘무엇인가’에 관한 것이다.

그럴 때 운명이란 점심에 애인이 끓인 콩나물국을 같이 먹고, 남은 한 국자에 밥을 말아 한밤에 홀로 먹는 일이었다.

「붙박이창」 부분

인간이라면 누구나 어떤 순간에 이르면 오롯이 혼자라는 게 사무치게 느껴지는 때가 있다. 점심에 함께 콩나물국을 끓여 먹었던 애인이 내 옆에 지금 잠들어 있더라도, 남아 있는 한 국자의 콩나물국에 밥을 말아 한밤에 홀로 먹는 그 순간, 시인은 자신을 바라보는 창밖의 눈동자를 느낀다. 사물이 저마다의 풍속으로 어둠에 잠기는 깜깜한 한밤은 “거인”의 것이다. 우리는 왜 이 시인이 일종의 절대적 존재로 거인을 상정했는지 조금 더 살펴볼 필요가 있다.

금수만도 못한 인간이란 말 들어봤다면

그렇게 말한 건 자기 배로 날 낳은 한 암컷이었지 내 하나뿐인 언청이 친구만 평생 욕하다 내장까지 썩어버린

그년이야말로 태어나서 가장 잘못 사귄 사람

「금수의 왕」 부분

시인의 이 처절하고도 단호한 선언을 보자. 일종의 고아 의식이라고도, 혈연에 대한 과단한 부정이라고도 할 수 있을 이 시의 시작은 자신을 “금수보다 못한 인간”으로 대했던 어머니에 관한 것이다. 그는 금수의 언어로 어머니를 “암컷”으로 재단하고 “그년이야말로 태어나서 가장 잘못 사귄 사람”이라고 선언한다. 이 부분을 ‘단독자’로서의 선언이라고 보아도 좋지 않을까. 또는 어떻게 단독자가 될 수 있는가에 대한 고민이 시작되는 부분이라고 보아도 무방하지 않을까. 이를테면 「왜 이렇게 젖어 있는가」와 같은 시편에서 “죽은 친구의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순간 / 느낀다 / 생(生)에 너무 많은 주석들이 붙었다고”라는 짧은 한 편의 시에 얼기설기 달려 있는 주석들을 보라. 시인이 언급했거니와 그것은 ‘나’를 제외하면 삶에 붙어 있는 모든 것들이 결국 주석에 불과하다는 단독자로서의 판단이다.

그러한 시인의 생각은 “이영주”라든가 “에밀 시오랑” 같은, 어떤 외로운 사람들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진다. 이때의 외로움이란 단순히 세계로부터 외따로 떨어져 있다는 감각이 아니라 눈앞의 세계에 적응하려 들지 않고 오롯이 ‘홀로’이고자 하는 마음을 의미한다.

아름다움은 우리가 사라져도 우주에 남아 있을 겁니다

아름다움은, 아름다움

최초이자 마지막 단어

「금수의 왕」 부분

이런 단독자들이 골몰하는 것은 다름 아니라 “아름다움”이다. 인간으로서의 단독자가 최초의 것이라면 이들이 상정하는 최후의 것은 아름다움이고, 그것은 다시 세상을 향한 일종의 복수가 된다. 「아름다운 복수들」이나 「마녀의 사랑」에서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바로 그것이다. 시인에 따르면 “복수가 복수를 사랑해서 복수가 복수를 낳는 일”이야말로 정말 아름다운 것이고, “마녀라고 부르는 건 쉬우나 / 마녀의 사랑엔 다른 이름”이 필요한데, 그것이 바로 “복수”라는 것이다.

나는 살고 있고, 내가 살아가도록 내버려두었다

삶을 취미로 한 지 오래되었다

「오래된 취미」 부분

밤새 글을 쓴다 그를 쓴다

삶과의 연애는 영영 미끈거려도

「령(零)」 부분

복수는 이런 식으로 이루어진다. 단독자로서의 ‘나’와 생(生)을 분리하는 것이다. 삶이 오래된 취미가 되어버리는 순간 그것은 곧 생에 대한 ‘나’의 복수가 된다. 혹은 삶을 연애의 대상으로 보기도 하는데, 그것은 시 쓰기와 비견된다. 이는 다시 말해 인간의 운명에서 삶이 가진 특권을 빼앗아버리겠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그것은 마치 “볼인 줄 알면서도 배트를 휘두르는 대타의 심정”(「옥탑에서 온 조난통신」)과도 같다. 시인이 서문에서 밝혔듯 “인간의 마음으로 끝내 완성할 수 없는 영원이란 말을” 조심스레 “발음해보”는 것과도 맞닿아 있을 것이다. 요컨대 그것은 단독자로서의 삶이 불가능하다는 것일 테다. 아니, ‘단독자’로서의 ‘삶’이라는 말 자체가 불가능하다. 시인에 따르면 인간은 삶이 제거된 순간에야 혼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혼자 무렵의 태풍」에서 읽어낼 수 있듯 태풍 한가운데의 적요함은 인간에게는 허락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시인은 “그대”를 찾는다. 그리고 “궤적”이라는 말에 몰두한다.

나를 치열하게 했던 착란들은 어디로 갔을까

창밖 가로등은 제시간에 불을 밝힌다, 여느 때처럼

왜 그래야 하는지도 모른 채

나는 저주하는 이유를 모르고 여전히 저주한다

불행하게 태어나는 건 없다는 당신의 말을

너 따위가 알까, 추락한다는 것

죽을힘으로 뿌리치면 죽을힘으로 되돌아오는 부메랑 같은

인간을 향한 갈망을

사람의, 사람에 의한, 사람을 위한

맹목의 시간 속에

뜨내기 같은 마음의 바큇자국을 망망연히 들여다보다가

나는 무서운 게 없어져버렸다

필연을 따라서

언제든 부고장 물고 이 천공으로 회귀할 철새들

너무 오래 삶의 객지에 노출되어 있었다

죽은 별들의 궤적사진에서 참혹한 선의를 본다

나의 불행은 누가 꿈꾸던 미래였을까

「궤적사진」 전문

시집 전편에 일관되게 보이는 특징 중 하나는 이 시인이 시어를 허투루 쓰지 않는다는 것이다(특히 한자어에 관해 예민한 감각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것이 늘 성공적인 것은 아니어서 어떤 경우에는 시의 흐름을 방해하기도 하고, 때때로 지루함을 유발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는 시인이 가지고 있는 언어 감각이 극대화된 것 같다. 한때 자신을 “치열하게 했던 착란들”, 그러니까 끊임없이 홀로이고 싶어 했던 단독자로서의 사유들이 결국 하나의 “궤적”을 그려왔을 뿐임을 인식하는 이 “참혹한” 순간을 읊조리는 시인의 말들을 보라. 곱씹을수록 시어의 힘이 느껴지는 작품이다.

시인의 이러한 인식, 즉 삶이 내가 그리는 “궤적”이었음을 깨닫는 찰나에 끝내 호출되는 것은 “너”이다. “처음엔 혼자였다 / 혁명은 일인칭 단수 / 저 동굴에 처음 그림을 그린 이는 횃불을 든 한 마리 짐승”이라고 쓰던 시인은 “둘”의 “세계”에 접근한다.

하나였다가

둘이었다가

세계가 되는

(중략)

세계였다가

둘이었다가

하나가 되는

(중략)

북극성에서 편지를 받아볼 독자여

두 개의 눈덩이는 서로 맞닿아야 비로소 한 사람이 된다

그 순백의 사람으로서 우린 겨울밤 서로의 체온을 앓으며

함께 녹아가자 은하수의 별처럼 따로 또 같이 흐를

「북극성으로 부치는 편지」 부분

마침내 시인은 홀로이고 싶었으나 홀로일 수 없는 인간의 운명을 발견한다. 그는 이 시에서 “인간에게”라고 썼다가 그것을 지우고 “너 당신 그대 고아에게”라고 쓰고 있다. ‘하나-둘-세계’가 그리는 궤적 가운데서 “인간”은 타자일 수밖에 없다. 이제 시인은 두 사람이 만나 “서로의 체온을 앓으며 함께 녹아가자”고 말한다. 이어지는 “따로 또 같이”라는 구절은 흔한 말이지만 장고 끝에 도출된 일종의 타협일 것이다. 그리고 그 타협은 늦은 밤 술자리에서 낯선 사람에게 라이터를 좀 빌리는, 혹은 빌려주는 젖은 마음 같은 것일 테다.

김안, 미제레레(문예중앙, 2014)

김안의 두 번째 시집 『미제레레』를 읽었다. “미제레레”는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의미의 『구약성서』 한 구절을 떠올리게도 하고, 종교화의 대가로 인정받는 조르주-앙리 루오(Georges-Henri Rouault, 1871-1958)가 그린, 고통 받는 인간의 모습과 전쟁이라는 비극을 연상케도 한다(미술대사전 및 두산백과 참조). 루오의 작품은 총 58매에 달하는 판화집인데, 이 시집 역시 마치 60편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거대한 연작으로 읽힌다. 시집의 표제작을 먼저 읽는 것이 여러모로 적절할 것 같다.

내 모든 삶이 만약이라면,

이 세계가,

매일 내가 먹어야 하는 알약의 개수를 헤아리는 이 저녁의 세계가

집 앞 놀이터 시소가 밤마다 저 혼자 움직이는 것처럼

반딧불이인 양 외진 골목마다 피어나는 담뱃불,

한껏 나빠지고 싶던 시절 담뱃불을 손목 위에 지지며 다짐하던 헛된 약속들처럼

만약이라면

어떤 혐의들로부터 패악들로부터도 자유로울 수 있을까

허울어진 얼굴을 양손에 받쳐 들고 서서

오, 아무 인생이 없는 기쁨이여

세상의 모든 중심을 향해 흩어졌던 나의 신들이 결국 길을 잃었구나

애도할 수 있을까

오늘 밤은 머리 위로 펼쳐진 속죄의 목록들이 무척이나 아름답구나

「미제레레」 부분

“만약”을 가정하고 자신의 삶을 상상하는 시인의 말들을 따라가다 보면 “자유”라는 단어를 만나게 된다. 그 자유란 “혐의”나 “패악” 같은 부정적인 것으로부터의 해방이기도 하지만, “길을 잃”은 “신”, “속죄의 목록”들처럼 목적 없는 애도와 고백의 방식이기도 하다. 그러니 이 시인은 기쁨이 없는 인생이 아니라 “아무 인생이 없는 기쁨”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삶을 가정함으로써 삶을 없애는 시도를, 이 시인은 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홀로’의 방식, ‘혼자’라는 상태를 지향하고 있음은 재차 언급할 필요가 없을 듯하다. 독특한 것은 이 시인이 상정하는 ‘홀로’의 공간이 “방”이라는 것이다.

저 창이 깨져버리면 당신은 도망가겠지.

그러니 이제 내가 당신의 입술을 물고 있어야지.

그런데 여기는 누구의 방일까?

누가 저 창을 깨버리고

누가 누구의 방을 삼킨 것일까?

「식육의 방」 부분

앞서 이 시집이 하나의 거대한 연작으로 읽힌다는 점을 언급한 바 있다. 그것은 이 시인이 꾸준히 내세우는 몇 가지 모티프에 의해 증명될 수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방”이다. 여기 인용한 「식육의 방」을 비롯해 「이후의 방」, 「두려움의 방」, 「지상의 방」 등의 작품은 각각 따로 읽히지 않는다. 그 방들은 바깥을 향하는 창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끝내 서로 공유할 수 없는 영역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 방의 창은 깨지기도 하고, 누군가가 다른 방을 삼키기도 한다. 그리고 그것은 반드시 물리적일 필요가 없다. “식육”의 공간이 되기도 하고, 감각이 월경(越境)하는 통로가 되기도 한다. 흥미로운 것은 인간이 만들어 놓은 그 방을 제멋대로 침입하는 존재인데, 그것은 다름 아닌 벌레들이다.

태양을 피해

불에 타 무너지고 갈라진 건물 속으로 기어들어 가는 개미떼는

나처럼 영영 나오지 않을 심산인가 봅니다.

그들에게도

낮은 감옥이고 밤은 불법인가요.

하지만 이 말은 순례자의 비겁한 욕망에 불과하지 않습니까.

서울이라는 거대한 개미집에는 문이 없으니

차라리

서로의 얼굴을 잊기 위해 불을 끄는 못생긴 연인처럼,

그들이 나누는 전희처럼, 섹스처럼

내 눈을 먹어주십시오.

「개미집」 부분

그 벌레들 중 특히 여러 시편들에 고루 등장하는 “개미”의 이미지는 인간이 너무도 쉽게 눌러 죽일 수 있는 존재이면서 동시에 검은 머리를 달고 다니는 인간 그 자체로도 읽힌다. “개미의 머리를 이고 가던 개미”에서, “서울이라는 거대한 개미집”으로, 다시 “밤은 거대한 개미 머리들”까지 이어지는 ‘개미의 세계’는 “문이 없”는 곳이다. 문이 없어도 “무너지고 갈라진 건물 속으로 기어들어 가는 개미떼”를 바라보는 시인의 심정은 그곳이 “함정”이길 바라고 있다. 그는 아직 진실을 마주할 두 눈을 준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새로운 시대는 망각의 사업에 힘쓰고 창문 밖의 공포가 진실과 정의들을 재생산하고, 침묵이 소비된다. 그러니, 우리 갈까, 저 더럽고도 시끄러운 말의 세계로. 아무렇게나 해봐. 부끄럼도 두려움도 없구나, 지금만은, 당신은, 당신이라는 허상은. 하지만 허상은, 숭고한 어제의 허상들은 몸 없이도 진저리 치고.

「국가의 탄생」 부분

책상에 앉아도 이 아침은 끝나질 않습니다. 아기들은 울기만 합니다. 지구 따위는 멸망해버렸으면 좋겠습니다. 당신의 자궁을 기억하기 위해 웅크립니다. 나에게 더 가까워질수록 아침입니다. 책상 아래입니다. 어둠이 뚫어놓은 이 동굴은 나를 어디로 배달하고 있습니까?

「囊」 부분

입을 닫은 주체는 “침묵”을 “소비”하며 방 안을 지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 “홀로코스트”나 “독재”가 새로운 모습을 하고 “망각의 사업”에 힘쓸 때, 그저 끝나지 않는 아침을 피해 책상 아래에 웅크리고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시인이 “당신이라는 쓰기가 끝끝내 말하고자 했던 서정과 미래 따위는 없군요”라고 고백하면서 “저 더럽고도 시끄러운 말의 세계”로 가고자 하면 그 혼자만의 방에 매달린 창들은 모두 깨져버릴 것이다. 그리고 그 창들 너머로 피와 뼈와 살로 이루어진 타인의 밤들이 보이게 될 것이다. 그 밤은 「치차(齒車)의 밤」이기도 하고, 「촛불이 만지는 밤」이기도 하며, 또한 「실낙원의 밤」이다. “차라리 우리 함께 저 창문 속으로 사라져버릴까”(「실낙원의 밤」) 하고 질문할 때, 시인은 결코 홀로일 수 없다. 홀로일 수 없어서 홀로이고 싶고, 홀로이고 싶기에 홀로일 수 없다.

우리의 배가 침몰하고 있는데

여전히 우리의 머리 위에서는 별들이 춤추고 있네

다리 뻗을 공간도 없는 방에서 우리는 서로를 부둥켜안고,

가라앉고 있는 우리의 배에서 이제 막 태어난 아이들의 악몽을 보고 있지

그런데 마지막까지 문을 열어놓고 나간 건 누굴까,

찬바람이 들어오잖아,

우리의 머리 위로 내려온 불안한 천국이 새어나가고 있어

일어나 봐, 문을 닫자

그런데 불구로 가득 부풀어 오르는 등

평생을 고아나 불구의 마음으로 살 수는 없는데

이제 우리는 영영 가족이 되어야만 하지

「불가촉천민」 전문

표제작 「미제레레」가 시집의 서문 격이라면 거의 마지막 페이지에 실려 있는 이 시를 시집의 에필로그로 여겨도 좋을 듯싶다. “우리의 배가 침몰하고 있”다는 구절은 작금의 현실과 그리 멀지 않은 표현으로 보인다. 그 빽빽한 배에서, “다리 뻗을 공간도 없는 방에서” 누군가 열어놓은 문 사이로 별들이 보일 때 우리는 불안하다. 반면 비좁고 불편한 공간이지만 문을 닫아버리면 우리는 안온하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문을 닫을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고아”이거나 “불구”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모두 혼자다. 하지만 시인이 읊조리듯 “평생”을 그렇게 살 수는 없다. 그래서 우리는 “영영 가족이 되어야” 한다. 아니, 되어야“만” 한다. 그리고 그것이, 불가촉천민의 운명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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