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여름의 소설들

너무 오래 되어버린 게으름을 고백하면서 지난 여름의 소설들 몇 편을 기록해둔다.

쓸데없이 길게 쓰지 않기로 다짐했다.

 

 

<세계의문학>, 2014년 여름호

 

1. 백민석, <비와 사무라이>

‘장마’ 연작이라고 불러도 될까.

<수림>에 이어 물기 가득한 소설을 또 하나 썼다.

이야기는 백민석답게 단단하면서도, 희미하고 동시에 명료하다.

여자, 남자, 사내로 이어지는 세 꼭짓점의 관계망에서 ‘노숙자’가 끼어드는 풍경이 묘하게 매력적이다.

 

 

2. 김보현, <여름의 흐름>

어딘가에서 다른 작품도 읽어 본 것 같은데,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무튼 약간은 익숙한 서사 구조였고, 이제는 지나가버린 ‘동아리’ 시절의 어떤 기억에 관한 것이었다.

내 생각에는 작가의 경험이 상당 부분 투영되어서, 거리 유지에 실패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차라리 일관되게, 담담하게 써내려가는 편이 나았을지 모르겠다.

소설 말미의 연극반 해체(?)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문예중앙>, 2014년 여름호

 

1. 기준영, <불안과  열망>

제목이 이미 너무 많은 것을 말해버린 듯하다.

말할 것도 없이 수경이라는 인물의 (결혼이라는 관계를 둘러싼) 불안과 열망에 관한 것이다.

여행길에 오른 그녀의 모습, 거기에서 경험하게 되는 일련의 사건들이 와닿지 않았다.

그러니, 여행길에서 만난 남자와 호텔방에 함께 있는 채로 남편과 통화하는 수경의 대화들도 허공을 맴돈다.

‘부부란 무엇인가’에 관해 다시 한번 써주었으면.

 

 

2. 이상우, <추리 추리하지 마 걸>

여전히 서사의 해체(라고 하면 싫어할 테지만)를 꿈꾸는 작가들이 있다.

한유주, 김태용 등의 작가들이 시도하는, 이를테면 오로지 “문장”들로 만들어진 소설쓰기가 하나의 방식이라면, 새로운 몇몇 작가들은 자기만의 방식을 보여주고 있어 흥미로운데, 이상우가 보여주는 방식은 정영문의 그것과 유사해보인다.

그것은 곧 정영문을 이미 읽은 사람의 기대감을 만족시키기 어렵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 소설은 상당히 긴, 중편 분량의 작품인데 끝까지 읽어내기가 쉽지 않다.

기이한 인물이 두서없이 등장하면서 꿈과 꿈 같은 현실을 반복하는 이 무의미의 지속은, 더 이상 새롭지가 않다.

난해함이 서사적 쾌감으로 이어지지 못하는 가장 큰 원인 같다.

괜한 힘을 공들여 들인 소설이다.

 

 

3. 정지돈, <뉴욕에서 온 사나이>

소위 후장사실주의자라는 소설가들 중 가장 지지를 보내고 싶은 작가가 정지돈이다.

등단작부터 눈여겨 봐 왔는데, 어떤 새로운 메타 소설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지 않나 생각된다.

당연하게도 주인공인 ‘나’는 소설가라는 명제에서 시작해, ‘나’를 독특한 시공간에다 던져놓고 그곳의 ‘소설계’와 조우하는 모습이 굉장히 흥미롭다.

읽는 내내 요상한 긴장감을 유지하는 솜씨도 좋거니와 여러 작가와 작품들을 등장시켜 지적 즐거움을 가져다주는 것도, 좋다.

(아마) 다른 작품에서도 여러 차례 등장하는 ‘장’의 캐릭터도 있고 하니, 이런 식의 작품들을 몇 개 더 써서 한 권의 소설집으로 묶는다면 더할 나위 없겠다.

개인적으로는 김솔과 나란히 놓고 읽어보고 싶은 작가이기도 하다.

 

 

 

<21세기문학>, 2014년 여름호

 

1. 서현경, <증명>

하얀색 기린을 찾는 어떤 사내의 이야기.

동시에 그 사내가 알비노(백색증) 학살에 관여하게 되는 이야기.

사냥과 살인에 대한 묘사가 섬뜩하다.

팽팽한 긴장감으로 소설을 이끌어나간 것은 좋았으나, 돌연변이 혹은 소수자가 처한 운명에 대해 너무 극단적으로 그려낸 것은 아닌지.

물론 탄자니아의 알비노가 학살되고, 그 신체가 부적으로 거래되는 것은 ‘현실’이지만, 단지 그것에 ‘관한’ 이야기인 듯해서 조금 아쉽다.

그 아쉬움은 아마도 이 소설의 마지막 장면 때문인 것 같은데, 갑자기 어떤 소녀가 보여주는 행동으로 결국 사냥이 인간의 본능적 욕망이라는 결론을 감당하기는 조금 무리가 있어 보인다.

 

 

2. 정한아, <애니>

큰 교통사고를 겪은 이후, 그 트라우마로 자신의 유명 배우 생활은 물론이고 삶 자체가 망가져버린 마리아.

그리고 그 마리아를 기억하고 있는 운전면허 강사 권.

이 두 사람이 서로를 이해하며 상처를 보듬는 이야기다.

결론적으로 조금 평범한 소설이 되어버린 듯하다.

아름답고 아련하게 그릴 수 없었다면, 아예 유쾌한 톤으로 이야기해보는 건 어땠을까.

권이 경찰서에서 ‘아니, 그 유명한 마리아를 모른단 말이냐’고 항변하는 그 장면처럼.

 

 

3. 조경란, <봄의 피안>

소설을 잘 쓴다는 것은 이런 것이구나, 느끼게 만드는 작품.

저번에 읽었던 <기도에 가까운>도 상당히 좋았는데, 이 소설도 좋았다.

흡사 박완서가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에서 보여주었던 것처럼, 문기라는 인물이 자신의 선생님을 대신해 요리 수업에 들어가 줄창 이야기하는 형식이다.

그 이야기 속에 문기와 완두와 선생님의 사연들이 알알이 박혀 있다.

그 사연들과 ‘닭 손질’이라는 디테일이 끈끈하게 만나 좀처럼 눈을 뗄 수 없게 하는 소설이다.

 

 

4. 최은미, <겨울 고원>

이런 방식의 서사는 ‘이청준식’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 같다.

무언가 비밀을 간직한 노인과 이를 추적하는 사내의 대결.

산의 벌목이나 스키장, 황태와 주목, 부령 등의 디테일은 작가의 고향이어서 그런지 생생하다.

그런데, ‘이청준식’이어서 그런지 소설의 전개가 약간 올드한 느낌.

특히 각 장을 구분하는 방식이 세련되지 못하다는 인상을 준다.

평창의 가리왕산 벌목을 직접적으로 언급한 것은 그다지 좋은 선택이 아닌 것 같다.

소설의 전체적인 시간적 감각과도 어긋나고, ‘보존’과 ‘개발’이라는 조금은 뻔한 메시지로 읽히기 때문이다.

 

 

5. 편혜영, <소년이로>

이 작품이 제60회 현대문학상을 받았을 것이다.

일찌감치 늙어버린 소년 유준과 소진의 이야기.

빽빽하게 서사를 채워나가는 힘이 과연 편혜영다우면서도, 개인적으로는 조금 무뎌진 느낌 같은 게 있기도 했다.

이 작가는 대체로 짧은 시간의 어떤 이야기들을 단단하게 구성하면서 사건의 핵심을 비밀로 부치는 전략을 구사한다.

이 작품에서는 유준의 아버지 서재의 가운데 서랍이 그 역할을 담당한다.

그 안에 무엇이 있었는지는 결코 알 수 없지만, 역설적으로 그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이야기가 탄탄해지기도 한다.

작년에 이상문학상을 받았던 <몬순>이나 <식물 애호> 같은 작품도 그런 방식이다.

납득할 만한 방식이지만 온전히 작품에 투신할 수 없는, 어느 정도 ‘거리’를 느낄 수밖에 없는 전략이라 ‘감응’이 덜한 것도 사실이다.

 

 

 

<한국문학>, 2014년 여름호

 

1. 조용호, <사자가 푸른 눈을 뜨는 밤>

올드한 소설이 어떤 것인지 물을 때 딱 제시하기 좋은 작품.

이미 창조적 상상력을 상실한 올드한 작가가 나름의 소설을 만들어내기 위해 애쓰는 전형적인 방식.

작가의 경험과 대개는 별볼일 없는 연륜이 더해지고, 거기에 약간의 지식 자랑과 소설이 될 만한 이야깃거리가 얹히면 이렇게 낡은 작품이 탄생한다.

 

 

2. 윤고은, <늙은 차와 히치하이커>

이제는 이 작가에게 ‘여행소설가’라는 칭호를 주어도 되지 않을까 싶다.

장편 <밤의 여행자들>부터 소설집 <알로하>에 이르기까지 ‘여행’과 ‘이국’이라는 모티프가 지속적으로 걸려 있다.

이 소설 역시 호주의 ‘포트오거스타’를 배경으로 어떤 우연한 만남을 그리는데, 그 디테일이 상당하다.

여행소설이라는 게 있을 수 있다면, 그것은 무엇보다도 다른 시공간에 관한 작가의 묘사에 그 성패가 달려 있을 테다.

이 작가는 그 지점을 놓치지 않는 것 같다.

여행이라는 소재와 그 디테일이 소설적 우연을 지탱하게 하는 힘이다.

우연과 즉흥 속에서 접하게 되는 ‘마일러’에 관한 남자의 사연이 끝내 힘을 잃지 않는 것도 그 때문인 듯하다.

 

 

3. 김성중, <배꼽 입술 무는 이빨>

약간은 무겁게 내려 앉은 톤과 주인공 여자의 사연에 이 작가의 새로운 스타일인가 했으나, 이내 배꼽이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김성중의 세계가 열렸다.

배꼽이 말을 시작하던 순간의 통쾌함과 아버지를 깨물던 그 순간의 아련한 장면이 인상적이다.

소설의 목소리가 인물과 이질적이지 않아서 좋았고, 결말 부분이 약간 심한 도약으로 보이기는 하지만 나쁘지는 않았다.

 

 

4. 기준영, <4번 게이트>

이 계절에 같이 발표한 <불안과 열망>보다 이 작품이 훨씬 좋았다.

많은 말을 할 수 있는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큰 힘을 들이지 않은 듯한 담담한 톤이 마음에 든다.

특히 귀성이라는 의붓오빠가 상당히 매력적이다.

여러 중요한 사건들을 한 문장으로 처리해버리고, 제법 긴 시차를 뛰어 넘는 이야기이지만 그게 전혀 불만스럽지가 않다. 그리고

“한때 내가 통과한 어둠 속에서, 나는 헐벗고 위태롭고 아름다웠다. 가려진 날들의 거짓말과 통증에는 몇 가지 진실보다 더 진실인 무엇이 있겠지만, 지나간 시간은 다시 돌아오지는 않는다. 그리고 나는 간혹 멀리 떠나 있을 때조차 그 심연 속에서만 온전히 해방감을 느꼈다.”

라는 문장으로 끝나는 결말 부분이 참 좋았다.

아마도 소설 제목이 4번 게이트인 이유가 재옥이 북경행 비행기에 오르는 마지막 장면 때문인 듯 한데, 이 제목은 조금 추상적이어서 그 장면의 아름다움을 살리지 못하는 것 같다는 것이 거의 유일한 아쉬움.

 

 

5. 최민석,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비틀즈를 소재로 어떤 비화를 만들어낸 소설.

작가 특유의 유쾌함이 보이지 않아 약간 허전하지만 비틀즈를 그냥 아는 정도의 수준만 되어도 여러 장면들에서 흥미로움을 느낄 수 있다.

디테일도 살아 있고, 플롯의 구성도 좋다는 생각이다.

다만 링고가 그 ‘비밀’을 알게 되는 장면이 너무 우연적인 것은 차치하더라도, 그것을 마치 사건을 해결하는 형사처럼 줄줄 읊어대는 것은 그동안 따라온 독자의 흥미를 순식간에 잃게 만드는 것 같아서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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