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동혁, 6(민음사, 2014) / 이제니,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를 모르고(문학과지성사, 2014)

어떤 시인의 창시기(創詩記)

― 성동혁, 『6』, 민음사,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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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동혁의 첫 시집에서 기독교적 모티프를 감지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거개의 시편들이 종교적 상황이나 소재를 굳이 숨기지 않고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모티프들이 이 시집의 주제의식으로까지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 시인이 힘주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자신이 ‘시인’이라는 분명한 자각이다.

이 시집은 총 4부로 구성되어 있다. 대부분의 시집들이 각각의 시편들이 가진 공통점에 의해 몇몇 단위로 시들을 묶거나 때때로 알 수 없는 배치와 구성을 보이기도 하는 것에 비해 『6』은 분명한 흐름을 가지고 있다. 그 흐름은 서정이나 감각, 이미지라기보다 일종의 개연성을 띠고 있어 차라리 서사적이라고 명명해야 할 듯하다. 이 흐름의 속성을 가장 잘 드러내는 시편은 역시 표제작인데, 같은 제목의 시가 <1부>와 <4부>에 함께 실려 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나의 구멍이 도넛 같다면 얼마나 달콤하게 죽을 수 있을까 헤드폰을 껴도 밀려오는 반투명의 소리들을 모른 척하고 달콤한 입체를 찾는다 긴 이름들이 비뚤어진다

 

여섯 번째 일들이 오고 있다

「6」 부분, 21면.

 

신이 나를 잠시 잊었던 순간

 

처음으로 사진기 앞에 선 우리들의 멸망사

하나 둘

커다란 언덕

「6」 부분, 107면.

 

숫자 6에 관해서는 여러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기독교에서의 6이라면 불길함이나 악마를 뜻할 수도 있고, 인간이 창조된 제6일을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을 테다. 우리는 이 숫자 6을 ‘불길한 탄생’으로 읽어 보자. “여섯 번째 일들이 오고 있다”는 전언에서 느껴지는 것은 탄생의 설렘이 아니라 달콤한 죽음의 소리들이다. 이 시인에게 탄생이란 어제 죽은 자가 오늘 살아나는 일과 같다. 죽음을 예비하고 있기 때문에 탄생이 불길한 것이 아니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났기 때문에 이 탄생은 공포에 가깝다. “순간”과 “처음”이 “멸망사”와 공존하는 “커다란 언덕”이 시인이 그리고 있는 세계이다. 그러니 이 시인은 탄생을 주저할 수밖에 없다.

<1부>의 시편들은 그러한 내적 갈등을 종교적 모티프를 통해 그려내고 있다. 특히 ‘아버지’의 존재가 중요하게 부각되는데, 이에 관해 일관된 해석을 내리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일상적 차원에서의 아버지의 모티프는 시인을 억압하는 대타자의 모습이기도 하고, 어떤 부분에서는 신의 존재보다 더 위에 있는 일종의 초월자로 그려지기도 한다. 그 아버지의 세계에서 이 시인은 아직 소년이다. <2부>는 이 소년의 내면이 첨예해지는 순간들을 보여준다. 그것은 “엑스레이 앞에서 짓는 스마일”처럼 누구도 볼 수 없고, 또 이해할 수 없는 자기만의 순간이기도 하고, “동생아 그만 태어나”라고 말하는 심정이기도 하며, “트램펄린”이나 “비치발리볼” 등에서 확인할 수 있는, 상승에의 욕구이기도 하다. 이어 <3부>에서 시인은 감각의 문제, 특히 소리에 관해 민감한 인식을 보여준다.

 

하얀 붕대를 풀며 날아가는 새 떼, 물을 마실 때마다 새가 날아가는 소리가 들린다

(중략)

나는 이어폰을 끼고 정원에 있다 슬프고 기쁜 걸 청각이 결정하는 일이라니 차라리 눈을 감고도 슬플 수 있는 이유다

(중략)

구름이 굵어지는 소리 당신이 땅을 훑고 가는 소리

우리는 간헐적으로 살아 있는 것 같다

「여름 정원」 부분, 71-2면.

 

시인이 발견한 제1감각은 청각이었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을 때, 비로소 세계는 지옥이 되어버린다는 인식이 시인을 사로잡은 것으로 보인다. 소리에 사로잡힌 주체가 시인으로 탄생하는 것은 자연스러우면서도 약간은 의아하다. 세계를 바라보는 주체에게 문제가 소리라면 그것은 언어의 외피를 쓰지 않아도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소리가 주체의 내부로부터 발화되는 것이라면 어떨까. 그 소리는 자음과 모음으로 이루어진 ‘말’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 <4부>에서 시인은 그 말들을 받아 적는다. 그리고 고통스러워한다. 흥미로운 것은 <1부>에서 그려졌던 광경들이 시인의 옷을 입고 다시 그려지고 있다는 점이다. 가령 <1부>의 「흰 버티컬을 올리면 하얀」에서 태초와 순수의 색으로 묘사되는 하양과 인간과 오염의 색으로 표현되는 빨강의 대비는, <4부>의 여러 시편들에서 조금 더 구체적인 모습을 띤다. 그것은 핏기 가득한 붉은 색이거나 누군가의 발자국이 붉게 찍힌 광경 같은 것이어서 더 이상 신의 존재를 갈구하지 않는다. 시인이 도달한 시적 최종 심급은 “언 강 위에서 춤을 추는 나의 할머니”(「꽃」, 131면)의 모습이다. 그곳까지 도달하는 과정이 곧 시인으로 태어나는 시간들이지 않았을까. 요컨대 이 시집은 어떤 시인의 창시기(創詩記)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다.

 

 

응시와 음미

― 이제니,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를 모르고』, 문학과지성사,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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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니의 시 앞에 서면 언제나, ‘서정’을 기준으로 시를 준별하는 구분이 무의미하다고 느끼게 된다. 또한 그러한 구별 방식이 결국 시적 지향의 다름을 지적할 수 있을 뿐이지, 옳고 그름의 차원이 아니라는 것을 다시 한 번 되뇌게 된다.

이토록 단순한 언어로 구성된 시편들을 다른 곳에서 찾아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이 시인은 이를테면 “나무”와 “구름” 같은, 시적 전고(典故)가 무수한 모티프들을 가감 없이 가져온다. 게다가 그 고집은 아주 집요해서 이 시인을 “단순하고도 명료한 삶을 설파하는 사람처럼”(「음지와 양지의 판다」. 54면) 느껴지게 만들기도 한다. 실제로 많은 시편들이 세계를 단순하고도 명료하게 바라보고 있기는 하다. ‘흑/백’, ‘음지/양지’, ‘울음/웃음’ 등과 같은 대조적인 이미지뿐만 아니라 ‘달/돌’, ‘가지/앵무’, ‘구름/개’, ‘사과/감’, ‘차/공’ 등 시인 특유의 시선에 의해 선별된 시적 매개들이 독자들을 세계로 안내한다. 그러나 이 단순함이 물론 시적 메시지의 단순함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단순한 시가 단순하지 않게 읽히는 힘은 시인이 보여주는 다채로운 ‘반복’에 있다.

 

내가 가진 몇 개의 단어

내가 말할 수 있는 몇 개의 사물

「먼 곳으로부터 바람」 부분, 101면.

 

조재룡이 시집의 해설에서 쓴 것처럼, 이 시인이 “리듬의 화신”이라면 그것은 단연코 반복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이라 해야 할 것이다. 그 반복은 그저 같은 것을 되풀이하는 식이 아니라 수차례 언어를 벼려서 끝내 그 반복의 극단에 도달한 것이라는 점에서 특히 그러하다. 그것이 바로 “나선의 감각”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이 시집에는 「나선의 감각」이라는 제목의 시가 각각 다른 부제를 달고 8편 수록되어 있다).

시인은 시가 보여줄 수 있는 힘이 ‘응시’에 있다고 믿는 것 같다. 이 시집에 실린 대부분의 시편들은 세계를 꽤 오랫동안 응시한 결과물이라고 보아도 좋은데, 왜냐하면 결국 단순함이 응시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시인의 말에서처럼 “나무는 어제보다 조금 더 자란다 / 구름은 어제보다 조금 더 죽는다”와 같은 인식에 도달할 수밖에 없는 것이 곧 응시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시인이 전달하고자 하는 감각은 어떤 공간에 무엇이 있다는 문장만으로도 가능해진다.

 

거실에는 책상이 있다. 거실에는 의자가 있다. 거실에는 책이 있고. 꽃이 있고. 거울이 있고. 종이가 있고. 유리가 있고. 서랍이 있고. 약속이 있고. 한숨이 있다. 한편에는 식탁이. 한편에는 냉장고가. 냉장고 안에는 사과가. 사과 안에는 과육이. 과육 안에는 씨앗이. 씨앗 안에는 어둠이. 어둠 안에는 기억이. 기억 안에는 숨결이. 숨결 안에는 눈물이. 눈물 안에는 너의 말이. 너의 말 안에는 나의 말이. 나의 말 안에는 지나간 흔적이 있다.

「거실의 모든 것」 부분, 66면.

 

하나의 사물에 깃든 시간은 그것 자체로 이미 무한하다. 그 무한함은 다시 다른 사물들에게로 이어져 거대한 나선을 만들어간다. 그 나선 안에서 시인은 “모든 것”을 발견한다. 말로 할 수 없는 것, 혹은 말로 할 필요가 없던 “모든 것”들이 그 안에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응시와 함께 음미가 필요하다. 충분히 숙고하고 곱씹을 시간, 충분히 숙고하고 곱씹을 수 있는 사물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 시인이 때때로 도형과 같은 기하학적 세계에 관심을 갖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그 단순하지만 완벽하고, 또 무한하면서 어떠한 고정된 의미도 갖지 않는 그 세계야말로 이 시인의 지향점이기 때문이다.

그 세계로 가고자 하는 시인의 목소리는 희미하지만 다양하다. 이는 특히 「나선의 감각」 연작을 읽을 때 그러하다. 이 시편들은 대체로 장시(長詩)의 형태를 띠고 있지만 이 시인 특유의 반복이 다채롭게 구현되어 있어 인상적이다. 단순한 문장들이 수식 없이 반복되면서 어느 순간 돌연 어떤 감각의 세계로 상승하게 되는 것이 이 시편들의 공통점이라면 각각의 시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이 시편들의 차이점이다. 그 목소리는 어떠한 종류의 목적도 없는, 오랜 산책을 마치고 돌아온 사람의 인사 같은 것이어서 “우리”라고 말해도 전혀 부담스럽지 않다. 그래서 우리는 끝내 우리를 모르기 때문에, 이것이 우리의 끝은 아니기 때문에, 밤을 함께 가자는 시인의 말들은 우리가 오래도록 응시하고 음미할 가치가 있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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