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에 읽은 시

상상된 시공간

(이 글은 월간 <심상> 1월호에 실려 있습니다)

한국전쟁 이후 현대사를 조명한 영화 <국제시장>이나 90년대 가요를 다시 불러들인 <무한도전>의 “토토가” 열풍이 거센 요즘이다. 현실의 팍팍함이 과거를 추억하게 하는 것인지, 화려한 현대사회의 외양에 우리가 그만 지쳐버린 것인지 알 수 없으나 ‘과거’가 힘을 갖게 된 것은 분명해 보인다. 과거로의 회귀는 현실의 문제를 외면한다는 도피의 혐의를 받기에 충분하지만, 그러나 그 도피에 대해 공박하는 일보다는 왜 그러한 도피가 정서적 공감을 불러일으키는지 숙고하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우리가 ‘추억’할 수 있는 과거는 말 그대로 우리가 지나온 시공간이지만 또 이미 지나온 곳이어서 ‘상상’된 것이기도 하다. 조금 더 단정적으로 말하자면 모든 시공간은 상상된 것이다. 현재 내가 지나치고 있는 시간과 이 공간들은 곧바로 과거가 되어 버리고, 다른 시공간은 결국 상상 속에서밖에 존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상상 속에 자신을 던져보는 것은 어쩌면 시인만의 특권이다. ‘인물’이라는 매개를 필요로 하는 소설과 달리 시는 과거 혹은 미래 속으로 곧바로 뛰어들 수 있다.

사내들은 거수경례밖에 모르고

내 나라는 전쟁에 졌다며

당신이 패전 도시에서 재즈를 흐느끼고 있을 때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나는 빈 밥그릇마다 유산처럼 달그락거리는 궁핍과

식민지가 남긴 폐허를 살았지

숱한 피를 흘리고도 반만 끝난 전후의 반도

전쟁이 잠복된 반토막의 나라

처녀 애들은 동상 걸린 손으로 공장으로 갔고

젊은 사내들은 모국어를 쓰는 적에게

총구를 겨누려고 북쪽 철책 끝으로 끌려갔지

서투른 이데올로기를 목에 걸고 베트남 정글까지 갔지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내 입술이 내 목이 예쁜 줄도 몰랐지

가시만 무성한 엉겅퀴였지

거리에는 백수건달들이 조악한 낭만주의로

호시탐탐 시대를 노리고

전쟁터에서 의수를 달고 돌아온 사내들이 출몰하여

하늘 향해 비명처럼 고함을 내지르곤 했지

쓸데없이 큰 통기타에 구제품 청바지를 입고

오줌같이 쓴 생맥주를 외상으로 마시고 토악질을 했지

무능과 부패가 엿처럼 찐득거리는 거리에서

구두닦이들이 색시를 알선했지

아이들만 잡초처럼 태어났지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불의와 폭력에 대한 증오 때문에 목이 터져라

자유와 정의를 외치며 돌을 던졌지

모든 젊음은 최루탄 범벅이었지

아찔하게 짧은 미니스커트를 입고

무지한 전통이 혀를 날름거리고 있는

두려운 결혼 속으로 뛰어들었지

전쟁보다 더욱 정교하게 여성을 파괴시킨다는

결혼 외에는 어디에도 갈 데가 없었지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문정희, 「내가 가장 예뻤을 때*-이바라기 노리코에게」, 《세계의문학》, 2014년 겨울호

* 일본의 대표적 여성 시인 이바라기 노리코(1926~2006)의 시 제목.

이 시는 “패전 도시에서 재즈를 흐느끼고” 있었던 “당신”에게 “내가 가장 예뻤을 때”를 말하고 있는 작품이다. 식민지의 폐허가 된 곳에서도, 전쟁이 끝난 직후의 참상에서도, 불의와 폭력과 노동에 시달릴 때에도 시인은 그때가 가장 예뻤던 시절이었노라고 읊조린다. 이것은 일본의 한 시인에게 보내는 적대감의 메시지가 아니라 역사의 격랑 속에서 자신을 돌볼 겨를조차 없었던 동시대인에 대한 시인의 공감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과거의 시련을 강조하고, 이를 통해 일종의 우월감을 확보하는 이른바 “꼰대”스러움과 지나간 시간들에 대한 가감 없는 묘사와 균형 잡힌 시각 사이에는 정말로 작은 차이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과거가 미화되기란 너무도 쉬운 일이고, 그 쉬운 일을 피하기 위해 골몰하다보면 다시 새로운 문제들에 봉착하게 된다. 그래서 시인들은 언어를 조탁한다. 그것이 다른 시공간을 상상하는 가장 적절한 방식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 시에 쓰인 여러 표현들에 주목해보자. “빈 밥그릇마다 유산처럼 달그락거리는 궁핍”, “서투른 이데올로기를 목에 걸고”, “무지한 전통이 혀를 날름거리고 있는” 등의 시구들은 단순히 이 시의 비유적 차원을 고양시키는 것이 아니라 지나온 시간들에 대한 시적 주체의 태도를 드러내는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그리고 그것은 ‘예쁨’이라는 감각과 대비되면서 자신이 일종의 무지 상태였음을 고백하게 한다. 따라서 이 시는 ‘어쩔 수 없었음’의 체념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모르고 있었음’의 자기반성을 담고 있는 것이고, 이는 시인이 보여주는 여러 시적 표현들에서 기인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다음 생은 노르웨이쯤에서 살겠네.

바다를 낀 베르겐의 한산한 길

인색한 볕을 쬐며 나, 당년 마흔일고여덟 배불뚝이 요한센이고 싶네.

일찍 벗어진 머리에 큰 키를 하고

청어와 치즈 덩어리를 한 손에 들고

좀 춥군, 어시장 냉동탑 그림자 길어질 때

늘어나 덜걱거리는 헌 구두를 끌며 걸으리.

브뤼겐 지나 시장 옆 좌판에서

딸기와 버찌도 좀 사겠네.

싱겁게 몇 낱씩 눈이 날리는 저녁

성당 지나 시장골목 입구도 좋고

오래된 다리 부근도 좋고

밤 두 시

숙소를 못 찾은 부랑자가 윗도리를 귀 끝까지 올리는 시간

다리 옆 둔덕을 타고 비틀비틀 강가로 내려가는 그 사내이겠네.

미끄러질 듯 절대 넘어지지 않지.

적막 속의 새로 두 시

물결만 강둑에 꿀럭거려

취해 흔들거리며 오줌을 누는

나, 요한센(아니면 귈라 유하츠도 괜찮은 이름)

오줌을 누며 잠시 막막한 느낌에 잠기리.

북쪽 산골의 늙은 부모와 엇나가기만 하는 작은아이 생각.

진저리 치고 머리를 긁으며

다시 둑 위로 올라서네.

자, 어디로 갈까.

뜨개질은 건성인 채 밖을 자주 내다보는,

눈발 속 키 큰 그림자를 보고

달려 나오는 여자가 하나쯤 있어도 좋아.

‘요한나!’

전쟁에서 살아온 제대군인처럼

내가 팔을 벌리겠지 술 냄새를 풍기며.

눈 덮인 내 등을 털며 맞아들이는

집이 하나,

저쪽

노르웨이나 핀란드

아니면 그린란드쯤에라도.

김사인, 「뵈르스마르트 스체게드」, 《현대문학》, 2015년 1월호

다음 생을 상상하는 이 시를 읽으면 알 수 없는 기시감에 빠져들게 된다. 우리는 누구나 한번쯤, 특히 해가 바뀌는 이러한 시기라면 이런 식의 공상을 해보지 않은 적 없기 때문이다. 김사인은 여전히 ‘서정’의 시학을 고수하는 몇 안 되는 시인 중 하나인데, 그가 가진 최대의 장점은 바로 이런 방식의 ‘공감’이다.

그는 이 시에서 다른 시공간의, 다른 생을 상상하면서 현실에의 도피를 부러 드러내지 않는다. 시인의 현실 진단 아래 이 땅을 떠나고 싶다는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저 “~하겠네”의 어투로 소박하게 그럴듯한 공상을 펼치면서 독자에게 그 전후사정을 맡겨버리는 것이다. 이럴 때 시는 단순해지고, 때때로 평범해 보이기도 하지만, 시가 가진 공감의 폭은 훨씬 커지게 된다. 그리고 그것이 ‘서정’의 시학이 추구하는 방향일 것이다.

이 시 역시 여러 가지 표현들이 시를 단순하지 않게 만드는데, 이를테면 요한센으로 상정된 시적 주체가 “취해 흔들거리며 오줌을 누는” 대목이 그러하다. 특히 “잠시 막막한 느낌에 잠기리”라는 부분이 인상적이다. 이 “막막한 느낌”은 뒤에 이어지는 “북쪽 산골의 늙은 부모와 엇나가기만 하는 작은아이 생각” 때문이 아니라, 마치 여기서 요한센을 상상하는 시인과 상상된 요한센이 서로를 마주치는 듯한 기묘한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그 기묘하기도 하고, 막막하기도 한 ‘느낌’이 이 시를 평범하지 않게 만든다.

붉은 꽃이 핀다. 벤치에서. 돌연 쓰러진 아이의 머리에서. 목격자들이 말한다. 어떤 일이 생겼는지 처음부터 보았지만

기억에 남는 건 붉은 꽃이 아름답다는 사실

순수한 바람이 꽃잎을 흔든다. 관능적인 노을이 붉은 꽃을 붉었던 것으로 덧칠한다. 아이는 미동이 없다. 사람들은 홀린 듯한 표정이다.

붉은 꽃을 꺾어서 가져가려는 얼굴이다.

하지만 손으로

만지고 싶진 않다는 듯이

모두 오래오래 벤치에 앉아 있다. 넓은 광장 좁은 한구석에서 시들지 않는 수많은 미사여구를 무의미하게 만드는

붉은 꽃은 위험하다.

눈동자들 속의 붉은 꽃은 실제보다 더 선명히 붉다.

나는 철 지난 발라드를 듣는다. 어울리는 계절이 된다. 눈앞은 붉고 귓가는 하얗게

아이가 낳은

아이의 몸보다 높은 질량을 지닌

하나의 꽃

광장은 우울하다. 시민들은 광장의 우울에 전염된다. 붉은 꽃이 위험하다는 느낌과 갖고 싶다는 욕망 사이 벤치는 어두워진다. 충혈된 달이 구름 속으로 피어난다. 당신들은 아이를 본 적이 없다고 말할 것이다.

붉은 꽃들 사이에서 유독

붉은 꽃이 핀다.

모두 본 것에 대해 이야기한다.

얼마나 빨간지 무엇만큼 선홍빛인지

붉다, 고 이해하긴 했지만

내부의 장면과 무관해졌으므로

아름다운 광장만이 남게 된다.

구현우, 「붉은 꽃」, 《세계의문학》, 2014년 겨울호

이 젊은 시인이 그려내는 “광장”의 풍경은 섬뜩하면서 매혹적이다. 이 광장에 얽힌, 그러니까 아이의 사연과 사람들의 모습과 “붉은 꽃”이 무엇인지에 관한 해석은 별로 쓸모가 없어 보인다. 어찌 되었든 “기억에 남는 건 붉은 꽃이 아름답다는 사실”이고, 결국 “아름다운 광장만이 남게 된다”는 것이 중요해 보인다. 광장에서 죽어 있는 아이의 머리에 피어난 붉은 꽃을 상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지만 그 꽃을 꺾을지에 관해서는 숙고가 필요할 것이다. 결국 우리 모두는 일종의 “목격자들”이고 “본 것에 대해”서만 이야기할 뿐이다. 그것은 마치 붉은 색의 수십, 수백 가지의 종류를 모조리 표현할 수 없기 때문에 “얼마나 빨간지 무엇만큼 선홍빛인지” 수사적으로밖에 말할 수 없는 상황을 가리키는 것 같기도 하다. 사태의 본질에는 결코 가닿을 수 없다는 것, 남는 것은 결국 “내부의 장면”이 아니라 “아름다운 광장”이라는 것, 그래서 그 광장은 어마어마하게 공허하다는 것이 시인의 전언이 아닐까. 그런데 또 그 공허함은 사태의 본질에 가깝기도 해서, 결국 붉은 꽃은 다시 광장에 피어날 것이고, 우리는 또 그것에 관해 이야기하게 될 것이다.

몇 가지 인상적인 구절을 기록해둔다. “관능적인 노을이 붉은 꽃을 붉었던 것으로 덧칠한다”, “눈동자들 속의 붉은 꽃은 실제보다 더 선명히 붉다”, “붉은 꽃들 사이에서 유독 / 붉은 꽃이 핀다”와 같은 표현들은 이 시가 단순히 ‘붉음’이라는 색채를 드러내기 위해 골몰한 것이 아님을 잘 보여준다. 이것은 오히려 ‘붉다’라는 하나의 표현으로 여러 ‘붉음’의 상태를 보여주기 위한 시인의 고투이고, 대체로 성공을 거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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