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욱, 소년은 늙지 않는다(문학과지성사, 2014)

소설적인 너무나 소설적인

(이 글은 계간 <자음과모음> 2015년 봄호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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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문장으로 시작하는 것은 조금 면구스럽지만, 김경욱에 대해 쓰는 일은 정말 어렵다. 등단 이래 여섯 권의 장편소설과 일곱 권의 소설집을 꾸준히 발표해 온 그에게 “진화하는 소설기계”(서영채)라든가, “잘하는 능력”(백지은) 같은 수사 외에 또 어떻게 이 작가를 설명할 수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경욱의 소설은 비평에의 욕구를 강하게 불러일으키기도 하는데, 그것은 그의 작품이 전형적인 ‘소설’이기 때문이다. 전형적인 ‘소설’이라니, 고작 이런 표현을 쓸 수밖에 없는 것이 비평적 무능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달리 언급할 방도가 없어 보인다.

김경욱은 단편과 장편을 고루 잘 쓰는, 흔치 않은 작가 중 한 명이다. 그것은 곧 그 자체로 그의 작품들이 다채롭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특히 소설집의 경우 각각의 작품들이 다양한 스펙트럼을 갖고 있어, 대개의 소설집들이 보여주는 어떤 ‘흐름’이, 이 작가에게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해석적 난경을 제공하기도 하지만, 또 동시에 독서의 쾌감을 가져다주기도 한다. 각 작품들이 긴밀하게 연결되는 유려한 흐름의 소설집을 마주했을 때의 만족감이 있듯, 모든 작품들이 완전히 새롭게 시작되는 이러한 유형의 소설집이 주는 풍족함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개별 작품들의 질적 수준이 담보되지 않으면 당연히 실패하기 마련인데, 김경욱은 늘 쉽사리 실패하지 않는 작가 중 한 명이다.

이 소설집은 『신에게는 손자가 없다』(창비, 2011) 이후 김경욱이 3년 간 쓴 단편들을 모은 것이다. 전술했듯 여기 실린 작품들은 스펙트럼이 매우 넓다. 현실에 바짝 기대어 있다가도, 우주적 공간으로 서사를 확장하고, 또 어떤 순간에는 파국 혹은 묵시록적 상상력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 작품들에게서 단 하나의 일관성을 찾는다면 그것은 ‘소설적’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소설적’이라는 말은 단순한 수사적 차원이 아니라, 여러 서사 매체의 출현으로 소설이 끝내 유지하지 못한, 혹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무언가’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것은 곧 90년대 중후반 한국문학의 새로움을 이끌었던 세대의 변모를 가리키는 것이기도 한데, 이를테면 이 소설집의 「스프레이」, 「승강기」 등의 작품은 90년대 한국문학의 새로운 출발을 알리던 여러 작품들과 매우 닮아 있다. 한국사회의 대표적 공간이라 할 수 있을 아파트를 배경으로 일어나는 이 소설 속 일련의 사건들은 소박한 에피소드였던 일들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면서 서사적 긴장감을 유지하고, 그 가운데 단순히 보아 넘길 수 없는 현실의 문제들이 군데군데 박혀 있다는 점에서 특히 90년대적이다. 요컨대 동시대의 다른 소설가들이 소설만이 보여줄 수 있는 다른 방식의 서사를 고민할 때, 김경욱은 여전히 ‘소설적’이라고 믿는 이러한 방식을 고수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때때로 올드해 보이기도 하고, 소재나 모티프에 비해 아쉬움이 남는 작품도 종종 발견되는 것이 사실이다. 목사의 두 아들을 소재로 한 「빅브라더」나 우주적 상상력을 선취한 「지구공정」의 경우, 단편으로 소비되기에는 채워지지 못한 서사나 남는 문제들이 꽤 있다. 그런데 사실 이런 작품들에게서 느껴지는 것은 아쉬움이라기보다 ‘아까움’에 가깝다.

이 작가는 한 편의 소설을 만들어내기 위해 구상해야 하는 여러 가지 요소들, 즉 인물이라든가 사건, 세계, 현실, 디테일 등에 관해 별로 어려움을 느끼지 않는 것 같다. 「소년은 늙지 않는다」의 파국, 자살면허라는 독특한 설정의 「인생은 아름다워」, 지구 멸망 이후 달로의 이주를 그린 「지구공정」 등의 세계는 일견 허술해 보인다. 많은 디테일들이 생략되어 있고, 전후사정은 짐작으로만 파악 가능한 정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곳에서 벌어지는 사건은 흥미롭기 그지없고, 인물들은 충분히 매력적이어서, 이 세계를 좀 더 탄탄하게 축조해 더 큰 서사로 만들었다면 어땠을까를 생각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 이럴 때 몇몇 작품들은 ‘아깝다’는 판단이 들면서도, 사실 이런 식의 ‘아까움’이야말로 김경욱만의 특징이 아닐까 생각되기도 한다. 왜냐하면 이 작가는 단편과 장편의 소재를 따로 삼지 않기 때문이다.

「염소의 주사위」는 의심의 여지없이 『야구란 무엇인가』(문학동네, 2013)의 단편 버전이다. 아마 이 단편을 쓴 뒤, 김경욱은 ‘야구’와 ‘자폐증 아들’이라는 모티프를 더해 장편으로 꾸렸을 것이다. 또한 ‘빨갱이’와 ‘고문’의 문제를 다룬 「개의 맛」, 유괴범으로 의심받는 사내의 이야기인 「아홉번째 아이」 등도 어느 정도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그러한 단편소설들이 어떻게 장편의 밑그림으로 작용했는지의 여부가 아니라 두 상이한 형식 간의 질적 차이를 이 작가가 어떻게 인식하고 있느냐는 것이다. 만약 다른 작가였다면 이미 장편소설로 확대된 자신의 단편소설을 소설집에 넣지 않았을 것이다. 더군다나 이 작품의 경우 소재나 서사가 유사한 정도가 아니라 아예 똑같은 문장들도 즐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작가는 「염소의 주사위」를 소설집에 포함시켜 놓았고, 김경욱 같은 작가에게 직업적 ‘태만’이란 결코 어울리지 않는 말이니 그 의도를 간단하게나마 추측해보는 것이 소모적인 일은 아닐 것이다.

요점은 단편 「염소의 주사위」가 그 밀도에 있어서 장편 『야구란 무엇인가』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사태의 핵심을 정확하게 지적하는 방식으로 씌어진 단편의 옷이 더 잘 어울린다는 느낌마저 있다. 그러니까 김경욱은 특정한 이야기는 특정한 방식으로 말해져야 한다는, 즉 단편에 어울리는 소재가 있고 장편으로 씌어질 법한 서사가 있다는 식의 편견을 조용히 무너뜨리고 있는 것이다. 이는 지금까지 김경욱이 걸어온 이력이 증명하는 바이지만, 이 소설집의 여러 작품들에서 특히 두드러진다. 예를 들어 「아홉번째 아이」와 같은 작품은 장편 소설의 프롤로그 정도로 읽힌다. 정말 중요한 사건이 이제 막 시작되려는 순간, 소설이 끝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거기에서 소설이 끝나기 때문에 독자는 방금 읽은 그 짧은 서사를 반추하지 않을 수 없게 되고, 종내는 ‘김 상사’를 의심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 장편과 단편을 갈라서 소설의 특징을 감식하려는 일련의 시도들은 김경욱의 작품 앞에서 힘을 잃을 수밖에 없다. 그의 소설은 그저, 너무나 ‘소설적’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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