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강명, 열광금지, 에바로드(연합뉴스, 2014)

완전히 완결된 이야기를 읽는 즐거움

(이 글은 계간 <세계의문학> 2015년 봄호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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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쩔 수 없이 주목을 받게 되는 작가가 있다. 적지 않은 나이에, 10여년을 기자로 일하다가 돌연 소설을 썼다면, 그리고 그 소설이 화려하게 문단에 던져졌다면 독자의 눈이 쏠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 문단은 계간지 중심의 단편 위주라서 그 궤도에 무난히 올라타지 못하면 주목은 금세 사그라진다. 설사 그 작가가 거의 1년에 한 편씩 두툼한 장편을 쏟아내더라도 말이다.

그렇다. 나는 지금 우리가 놓치고 있는 장강명이라는 작가에 관해 이야기하려고 한다. 『표백』(한겨레출판사, 2011)이라는 인상적인 작품으로 한겨레문학상을 수상하며 등장한 이 작가는 기자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만이 보여줄 수 있는 치밀함과 끈질김을 갖추고 있었다. 게다가 현실의 변화를 민감하게 인식하는 촉도 보유하고 있는 작가였다. 연작소설 『뤼미에르 피플』(한겨레출판, 2012)에서도 그런 그의 장기는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두루뭉술하게 현실의 문제를 ‘문학적’으로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문제의 원인을 집요하게 찾아 들어가고, 그러한 문제를 배태한 사회의 모습을 부러 축소하거나 외려 과장하지 않고 ‘리얼’하게 그려내는 방식 말이다. 그것은 소위 기자의 방식이면서도―지금은 기자를 그만두고 전업 소설가가 되었지만―아주 성취하기 어려운 문학적 글쓰기의 한 정점이다.

『열광금지, 에바로드』는 이 작가의 세 번째 장편소설이다. 이 소설로 제2회 수림문학상을 수상하는 바람에(?) 네 번째 소설인 『호모도미난스-지배하는 인간』(은행나무, 2014)과 출간일이 단 이틀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 그러나 실제로 이 두 소설 간의 ‘거리’는 꽤 있는 편이다. 여전히 그가 사회를 바라보는 기자의 ‘눈’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장강명의 작품들은 공통점을 갖지만 『열광금지, 에바로드』는 우연히 나타난, 그야말로 ‘소설’이다. 이 작가의 다른 작품들이 현실의 문제를 이야기하기 위해 문학을 그 도구로 사용하고 있다면―이것은 나쁜 의미를 담고 있지 않다. 오히려 그는 그 도구를 아주 훌륭히, 잘 쓰는 작가라 할 수 있다―『열광금지, 에바로드』는 하나의 이야기를 발견한 작가가 그 이야기를 잘 설명하기 위해 현실을 충분히 이용하고 있는 쪽이다.

소설은 정직하게 나아간다. 왜 이런 소설을 쓰게 되었는지를 밝히면서 <열광금지, 에바로드>라는 다큐멘터리를 찍은 박종현의 삶을 따라간다. 대체 “에바로드”라는 게 무엇인가부터 묻지 않을 수 없다. ‘에반게리온’이라는 일본 만화를 아는 사람이라면 ‘에반게리온의 길’이라는 뜻을 짐작할 수 있을 테지만, 여기에서는 ‘에반게리온 월드 스탬프 랠리’를 완주한 박종현의 궤적을 가리킨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대체 ‘에반게리온 월드 스탬프 랠리’는 또 무엇인가. 간단히 말하자면, 새로운 ‘에반게리온’ 시리즈 개봉에 맞춰 제작사에서 기획한 것으로, 세계 각지에서 열리는 프로모션 행사에 모두 참여해 인증 도장을 받아오는 이벤트이다. 이 행사는 프랑스, 미국, 중국, 일본 등지에서 이루어졌는데 소설의 주인공 박종현은 ‘고작’ 저 도장을 받기 위해 갖은 고생을 하며 뛰어다닌다. 즉, “어떤 미친 88만원 세대 오덕이 에반게리온 월드 스탬프 랠리를 완주하고 그 과정을 다큐멘터리로 찍었다”(17면)는 것이 소설의 전부다. 이 한 줄의 줄거리는 ‘실화’이고, 작가는 이 문장 뒤에 “멋지지 않냐”라고 덧붙인다.

이 소설은 시종일관 ‘에반게리온’을 사랑한 ‘오덕’의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에반게리온’을 전혀 모르는 독자여도 읽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다. 그것은 박종현의 삶이 실제로는 “멋지지 않”기 때문이다. 태어난 후로 삶의 매순간이 그에게는 고비였고, 상처였고, 아픔이었다. 가정의 불화와 지독히도 따라다닌 불행의 그림자 때문에 박종현의 삶은 구질구질하기 그지없었다. 그랬던 그를 구원해준 것이 유년 시절 접했던 ‘만화’들이었다. 그 중에서도 ‘에반게리온’이었는데, 이유인즉슨 “네가 겪는 고통은 특별해”(61면)라고 말해주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엄마는 도망가 버렸고, 아버지는 무기력하며, 형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하고, 타인과 제대로 소통하지 못하는 ‘나’ 개인의 괴로움이 “세계의 존망”과 이어질 수 있음을 ‘에반게리온’이 보여주었던 것이다.

 

“저는 내색을 하지는 않았지만 사춘기에 여러 가지 문제로 상처를 받고 있었고, 외로웠어요. (……) 그런데 저는 어렸을 때부터 그런 아픔이 중요하지 않은 문제인 척 연기하는 데 너무 익숙해져 있었고, 그런 가면을 영원히 벗어던질 수 있을 것 같지 않았습니다. 미사토가 ‘진짜 나는 언제나 울고 있어’라고 말했을 때 저는 누구보다도 그 말뜻을 잘 알 수 있었습니다.”(61-2면)

 

이른바 ‘오덕’이 탄생하는 장면이다. 아무도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고 느낄 때, 혹은 내 고통의 실체를 알 수 없을 때, 이런 ‘애니’를 만나게 되면 구질구질하던 일상의 문제들은 단번에 생존이나 실존의 차원으로 고양되며 나아가 “세계의 존망”과 이어진다. 그러니 누가 이 유혹을 거절할 수 있었겠는가. 한정판에 목을 매달고, 누구보다 먼저 그 이야기를 듣(보)기 위해 새벽부터 줄을 서며, 코스프레 디테일에 목숨을 거는 오덕들의 그야말로 오덕스러운 모습은 그것이 절박하게 혹은 간절하게 삶을 기댈 수 있는 유일하게 허락된 ‘시공간’이기 때문이다.

장강명은 그러한 오덕의 ‘성취’라고 할 수 있을 만한 박종현의 ‘에반게리온 월드 스탬프 랠리’ 완주에 몇몇 개연성을 덧붙여 한 편의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이 작가는 결코 이야기를 찜찜하게 남겨두지 않는다. 서사를 ‘열려 있게’ 만드는 온갖 문학적 전략을 거부하면서 한 편의 이야기를 끝내 ‘완결’시키고야 만다. 장강명이 쓰는 <작가의 말>을 보면 대번에 알 수 있는데, 그는―비단 이 작품만이 아니라―왜 이 작품을 쓰게 되었으며, 어떤 것이 사실이고 어떤 것이 허구인지 상세히 밝힌다. 또한 마치 기사 후기처럼, 소설의 특정 장면에 쓰인 여러 정보들의 출처가 어디인지도 꼭 명시하는 작가다. 거기까지 읽고 나면 독자로서는 완전히 완결된 이야기를 읽었다는 만족감이 드는데, 그것은 서사의 질적 문제를 떠나 대단히 성취하기 어려운 부분이다(이 작품의 경우 실제 다큐멘터리 <에바로드>까지 찾아보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지적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이 호기심으로 똘똘 뭉친 작가의 열정적인 취재 노트를 ‘자기 세대의 성장담’ 정도로 이해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점이다. 이 작품은 지금-여기를 이해해보려는, 이제 불혹의 나이가 되어버린 한 작가의 분투기이다. 75년생의 ‘PC통신 세대’와 83년생의 ‘인터넷 세대’는 명백히 다른 존재들이다. 그러므로 이 작가는 오히려 정말이지 몇 되지 않는, 현재의 청년들을 이해해보려고 노력하는 ‘기성세대’에 가깝다. 그 노력이 기자 특유의 취재 감각과 만나 ‘깊이’를 확보하게 된 경우가 바로 장강명의 사례인데, 이는 퍽 희귀한 경우라 꾸준히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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