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여선, 토우의 집(자음과모음, 2014)

한국소설은 필요한가

(이 글은 격월 <서울대저널> 3,4월호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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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 지금 당신의 손에 소설책이 들려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한국 소설일 가능성은 희박할 것이다. 어떤 계기로 인해 소설이라는 장르에 관심을 갖게 된 사람이 그 관심을 한국의 소설 쪽에 투사하기란 쉽지 않다. 그것은 성장기의 교과서 문학으로부터 형성된 한국 소설에 대한 고정관념 때문일 것인데, 대체로 ‘한국’이라는 어휘에서 기인한다. 당신이 아직도 소설을 읽고 있는 독자라면 상당히 고급독자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고, 당신의 눈에 한국 소설들은 여전히 너무 ‘한국적’일 것이 분명하다. 나는 이 뿌리 깊은 불신에 반기를 들 생각은 없다. 다만 한국 소설이라고 해서 매력적인 서사가 없는 것은 아니며, ‘한국적’인 소설이 반드시 나쁜 작품일 리는 없다는 당연한 사실 때문에, 한번쯤 눈을 돌려 볼 필요는 있다고 말해두고 싶다.

권여선의 근작 『토우의 집』을 읽으면, ‘그래, 한국 소설이란 이런 것이었지.’하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특별할 것 없는, 말 그대로 “중간”에 사는 사람들이 복작복작 일상을 영위해가고, 그 일상이 외부로부터의 폭력에 의해 산산조각 나고 마는 전형적인 이야기. ‘토속적’이라고 이름 붙여도 어색하지 않을 70년대 언저리 “삼벌레고개” 조그마한 마을의 이야기는 유년기의 소년 소녀를 앞세워 서서히 진행된다. 그리고 ‘은철’과 ‘원’의 눈에 비친 위험천만한 세계의 모습이 상상 속에 그치지 않고, ‘죽임(음)’이라는 현실이 되어 그들에게 다가올 때 이야기는 끝난다. ‘원’의 아버지 ‘안덕규’가 “정보부”에 끌려가 주검이 되어 돌아온 그 순간부터 삼벌레고개 사람들은 그 이전의 일상으로 결코 돌아갈 수 없게 된다. 이 소설은 권력으로부터 자행된 부당한 폭력이 당사자들에게만 영향을 끼치는 것이 아니라 한 공동체를 통째로 금가게 할 수 있음을 조용히 보여주는데, 그것은 기실 폭력이 이루어진 순간 그 일그러진 현실에 속해 있던 사회의 구성원 모두가 가해자이자 동시에 피해자가 되어 버리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방식의 이야기가 낯선 것은 물론 아니다. 양귀자의 『원미동 사람들』이나 은희경의 『새의 선물』, 황석영의 『오래된 정원』 등을 이미 접해본 독자라면 군데군데 기시감을 가질 수도 있을 법하다. 그러니 우리가 곰곰이 대답을 생각해봐야 할 질문들은 이런 것이다.

‘아직도 이런 이야기가 필요한가.’ ‘여전히 이런 ‘한국’ 소설이 유효한가.’ ‘또다시 시대의 고통을 ‘소비’하는 것은 아닌가.’ 이 소설은 사실 권여선이라는 작가의 입장에서도 과감한 도전이지만, 현재의 독자들에게 어려운 질문들을 여럿 던지는 무거운 작품이기도 하다. 당신이 이 소설을 읽고 별다른 감응을 느끼지 않는다면, ‘한국’ 소설이 아니라 한국 ‘소설’을 찾아 읽어볼 것을 권한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이 소설 속 인물들의 고통과 유년기의 기억과 상처 같은 것들에 깊이 공감한다면, 나아가 소설의 과거와 현실의 지금을 견줄 수 있는 독자라면, 여전히 ‘한국’ 소설은 필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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