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작가의 요건들 – 이순원론

(이 글은 계간 <학산문학> 2015년 봄호에 실려 있습니다)

 

위대한 작가, 훌륭한 작가, 좋은 작가

 

다소 거칠지만 세 부류의 작가를 상정해보는 것으로 글을 시작하자. 고전의 반열에 오를, 그야말로 명작을 써낸 작가가 있다고 했을 때, 우리는 그를 “위대한 작가”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위대한 작가는 선택과 집중에 능한 자여서 그들이 남긴 작품은 늘 소수이다. 여러 권의 많은 작품을 써내기보다 한 작품에 여러 가지 요소를 써넣기 때문에 대체로 방대하고 두툼하다.

또 하나의 형태를 “훌륭한 작가”로 명명해 본다. 이들은 작가 자신에게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문제를 지속적으로 파고드는 사람들이다. 일생토록 그 문제에 대해 집요하게 추적하고, 다시 쓰기를 반복하는 이 유형의 작가는 종내 자신의 존재 자체가 그 문제를 떠올리게 하는 단계에 이르러 훌륭한 작가가 된다. 그러한 문제는 사랑이나 자유, 진리 등의 관념적 사유이기도 하지만 특정 상황이나 사건인 경우도 적지 않은데, 어떤 쪽이든 훌륭한 작가는 그 문제를 지시하는 대명사로 자리 잡는다.

마지막 부류가 “좋은 작가”이다. “좋은”이라는 다소 흔한 수식어가 적당하게 어떤 작가를 평가해 버리는 듯한 어감을 주기도 하지만 그래서 그만큼 폭넓고, 어려운 유형이다. 단 하나의 명작을 남기고 홀연히 사라져 버린 작가는 위대할 수 있지만, 좋은 작가이기는 어렵다. 좋은 작가는 무엇보다도 꾸준해야 하기 때문이다. 누구보다도 ‘쓰는 사람’이라는 말에 어울리게, 쉴 새 없이 소설을 짓는 사람이 좋은 작가다. 그리고 그렇게 끊임없이 쓰기 위해서, 좋은 작가는 다양하게 쓸 수밖에 없다. 소설가의 눈을 갖고 어디서든지 이야기를 길어 올릴 수 있는 작가,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이 소설이 될 수 있게 만드는 작가가 또 좋은 작가다. 그러므로 좋은 작가는 그 다종다양함 때문에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하는 경우도 꽤 있다. 하지만 좋은 작가는 누구보다 자유롭다. 시대나 현실, 혹은 독자나 문단이 요구하는 작품이 아니라 스스로 쓰고 싶은 작품을 늘 써내기 때문이다.

이런 유형의 작가를 찾는 것은 상당히 난감하고 어려운 일인데, 이순원은 오롯하게 서 있는, 몇 되지 않는 “좋은 작가”이다. 그는 1988년 『문학사상』에 「낮달」이라는 작품으로 등단한 것으로 대개 알려져 있지만, 사실 1985년 강원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었을 뿐만 아니라 1980년을 즈음하여 수차례 여러 경로를 통해 소설을 발표하고 있었다. 이후 소설집 『그 여름의 꽃게』(세계사, 1989), 『얼굴』(문학과지성사, 1993), 『말을 찾아서』(문이당, 1997), 『그가 걸음을 멈추었을 때』(생각의나무, 2003), 『첫눈』(뿔, 2009) 등을 대략 5년 정도의 터울로 꾸준히 발표했고, 장편소설 『우리들의 석기시대』(고려원, 1990), 『압구정동엔 비상구가 없다』(중앙M&B, 1992), 『압구정동엔 무지개가 뜨지 않는다』(중앙M&B, 1993), 『에덴에 그를 보낸다』(책나무, 1995), 『미혼에게 바친다』(푸른숲, 1995), 『수색, 그 물빛 무늬』(민음사, 1996), 『아들과 함께 걷는 길』(해냄, 1996), 『독약 같은 사랑』(현대문학북스, 1998), 『해파리에 관한 명상』(작가정신, 1998), 『19세』(세계사, 1999), 『그대 정동진에 가면』(민음사, 1999), 『순수』(생각의나무, 2000), 『첫사랑』(세계사, 2000), 『스물셋 그리고 마흔여섯』(이가서, 2004), 『모델』(해냄, 2004), 『유리의 노래』(창해, 2005), 『나무』(뿔, 2007), 『워낭』(실천문학사, 2010) 등을 펴냈다. 게다가 이 목록은 주요한 것만 추스른 것이고, 동화, 우화, 산문집, 콩트집, 개정판, 선집 등을 포함하면 거의 배로 숫자가 늘어난다. 여기에 「은비령」과 같이 잘 알려진 수상작과 잡지에 연재되었으나 미출간된 몇몇 작품을 합치면 실로 방대한 양이다.

이 꾸준함이 이순원의 힘인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는 오랜 문청 생활에서 온 원동력일 수도 있고, 그가 자기 속에 쌓아 놓은 이야기가 많아서일 수도 있으며, 여전히 번뜩이는 소설가의 눈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이유야 어찌되었건 이 왕성한 필력은 경탄하지 않을 수 없는 수준인데, 그가 꾸준히, 많이 썼다고 해서 “좋은 작가”가 되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그가 “좋은 작가”의 요건을 갖출 수 있는 것은 누구보다 다양한 소재로 작품 활동을 해온 작가이기 때문이다. 사회 현실의 문제를 첨예하게 건드리는 작품을 써내다가도, 애타는 사랑 이야기로 독자들의 감성을 자극하고, 고향과 유년기에 대한 끊임없는 향수를 그리다가도 도회적 삶의 비루한 편린들을 날카롭게 제시하는 이 작가의 종횡무진이야말로 “좋은 작가”의 전범이다. 이순원은 자신의 작품이 “사회성”을 추구하는 경향에서 “서정성”을 획득하는 방향으로 옮겨갔고, 이후 이 둘의 조화를 모색하는 방식을 고민하게 되었다고 진술하고 있지만, 사실 초기작에서부터 근작에 이르기까지 이 두 경향이 분리된 채 전개되었던 적은 결코 없다. 그는 개인의 서정성을 세계의 사회성으로 끌어 올릴 줄 아는 작가이기 때문이다.

이순원에 관한 논의는 의외로 드문 편이다. 개별 작품에 대한 ‘리뷰’는 꾸준히 이루어져 왔지만, 그마저도 최근에는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그동안의 작품 세계를 정리하는 것만으로도 힘에 부치는 이 작가의 서사적 생산성과 다종다양함을 고려하면 이해가 가지 않는 것도 아니지만 이순원이 여전히 “은비령”의 작가로만 머물러 있는 듯한 느낌은 여간 아쉬운 것이 아니다. 사실 이 작가를 쭉 따라 읽다 보면 그를 과거의 작가로 남겨둘 수 없다는 생각이 드는데, 그것은 오히려 지금의 이순원이 어떤 절정에 이른 것이 아닌가 하는 판단이 들기 때문이다. 말년의 양식 혹은 말년의 문학이랄까, 물론 아직 그런 수식어를 붙이기는 좀 이른 듯도 하지만, 최근 발표한 몇몇 단편들에서 이 작가의 시원(始原)과 종착(終着)을 가늠해볼 수 있어서 흥미롭다.

 

 

경험과 상상이 뒤섞인 동쪽의 공간

 

가는 길은 하나, 처음 그의 생이 온 동쪽으로였다. 그가 자기 소유의 자동차를 갖게 된 다음 언제 어느 때나 혼자 침잠하듯 떠나는 길의 행선지는 사북이었다. 아침에 출발해 점심때 사북에 도착했다. 그곳은 그의 아버지가 땅속에서 세상의 불을 꺼내오던 곳이었고, 그가 태어난 곳이기도 했다.

「212」, 《한국문학》, 2013년 가을호, 44면.

 

작가 이순원을 생각하면 그의 고향 강릉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심지어 ‘우추리’라는 지명조차 낯익고 그 풍경이 눈앞에 그려지는 듯한데, 그것은 그가 나고 자란 땅에 대해 단순히 자주 썼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는 그 땅이 품은 무수한 이야기들을 변주해가며 독자로 하여금 이 공간을 복합적으로 인식하도록 한다. 그가 강원일보 신춘문예 「소」라는 작품으로 당선된 것이 1985년이고, 근작 『흰별소』를 펴낸 것이 2015년이니 30년 동안 여전히 우추리 언저리에 머물고 있는 셈이다. 첫 소설집 『그 여름의 꽃게』(세계사, 1989)는 군대를 소재로 하거나 이념과 분단의 문제가 전면화 되어 있는데 이때까지만 해도 영동 지방의 공간은 여타의 소설들에서 자주 그랬듯 농촌의 생명력 앞에 이념 대립이 무화되는 곳으로 그려졌다. 그러나 이순원의 탐구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가는 길은 하나, 처음 그의 생이 온 동쪽으로였다”라는 문장은 그대로 작가 이순원에게 적용가능하다. 그는 강릉 혹은 우추리로 대변되는 자기 고향의 정서를 담아내는 데 안주하지 않고 대관령을 넘어서는 지역적 공간에 대해 지속적인 관심을 보여 왔다. 『19세』(세계사, 1999)는 작가 자신의 자전적 경험을 바탕으로 한 일종의 성장소설이지만 그 소설에서 주목되는 부분은 청소년인 주인공이 스스로 농사꾼이 되기 위해 대관령에서 생활하는 모습이다. 그리고 잘 알려진 대로 「은비령」의 무대가 된 공간 역시 작가가 창조한 것이지만 한계령 중턱 즈음 되는 곳이다. 이러한 공간들은 단순히 배경으로 기능하는 것이 아니라 소설 속 인물들의 운명을 결정하는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작가 이순원에게 고향이란 늘 벗어나고 싶은 속박이면서도 동시에 언젠가는 돌아와야 할 곳이라고 믿는 양가적 공간이다. 『수색, 그 물빛 무늬』(민음사, 1996) 연작에 그러한 작가의 고민이 잘 녹아 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 공간이 단순히 ‘고향/타향’ 혹은 ‘농촌/도시’의 이분법적 분할로 그려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것을 가장 잘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 「그들의 나라」(《문학사상》, 2013년 2월호)이다.

이 작품은 이순원 소설의 한 전형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고향으로 내려간 소설가 주인공이 고향 사람들을 만나 의도치 않은 경험을 하게 되고, 그것이 과거의 여러 기억들과 맞물려 새로운 내력을 발견하는 방식이다. 그런데 그 내력이라는 것이 자못 흥미롭다.

 

“이건 집안 어른들한테 들은 얘긴데 해방이 되고 나서 삼팔선 남쪽은 미군이 들어오고, 북쪽은 소련군이 들어온다니까 어떤 분이 나서서 여기 대관령 동쪽은 미군이든 소련군이든 아무도 들어오지 못한다, 여기는 우리가 자치적으로 통치한다, 이제부터 이쪽 나라의 이름은 ‘동진’이다, 하고 선언했다는 거야.”

「그들의 나라」(《문학사상》, 2013년 2월호, 114면.

 

사연인즉, 대관령을 국경으로 하는 새로운 국가가 해방 이후 건설되었다는 것이다. 이른바 동진국이라는 이름으로 생겨난 그 나라는 물론 세력도 미미했고, 얼마 가지 않아 사라져 버렸지만 그러한 “신화”가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삼십대였던 주인공은 무척이나 흥분한다. 그러나 이후 그 이야기를 까맣게 잊고 지내던 그는 10여 년 뒤 스스로 “동진국의 국경경비대장의 아들”이라고 말하는 사람을 만나게 된다. 그 사내의 이야기를 통해 비로소 그는 동진국의 건국과 해체 과정을 정확히 듣게 되는데, “국통”이었던 “목양”이라는 인물에 의해 사내의 아버지가 죽임을 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또 세월이 얼마간 흐른 후, 그는 고향에서 목양의 딸을 만난다. 소설은 모든 사실을 파악하게 된 주인공이 “아버지의 나라는 안녕합니다”라고 마음속으로 말하는 장면으로 끝이 난다. 그는 목양이나 목양의 딸을 찾아가 사실을 캐묻지 않았다. 세월의 더께가 쌓여 하나의 내력이 완성되는 그 순간, 그 내력을 빌미삼아 단죄의 방식을 택하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일인가를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일 테다. 다시 말해 “참 좁기도 한 땅에 화살처럼 많은 나라가 왔다가 갔구나” 하는 정도의 인식이 그에게 주어진 유일한 깨달음이었던 것이다.

이순원은 자기가 배경으로 삼는 어떤 공간이 대부분 실제로 존재하는 곳이기는 하지만 작품을 쓰기 전에 가본 적은 거의 없다고 말한 적 있다. 이 진술은 이순원이라는 작가가 소설 속의 공간에 관해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 어렴풋이 짐작하게 해주는데, 그러니까 이순원에게 대관령 동쪽의 지역은 그 자체로 역사의 물결을 품을 수 있는 거대한 대지이자 경험과 상상이 뒤섞여, 실재하면서도 결코 가 닿을 수는 없는 기묘한 공간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죽음을 대하는 소년의 자세

 

이순원은 소설의 내용에서 뿐만 아니라 형식에서도 다양한 시도를 보인 작가이다. 연작의 형태로 발표된 작품도 여럿이거니와 콩트나 중편 등 서사의 길이를 다채롭게 변주해 온 바 있다. 하지만 그런 형식적 분별을 따지지 않고, 지금까지 이순원이 쓴 작품을 발표 시기와 관계없이 소재 별로 분류한다면, 아마 “유년”과 “죽음”이라는 카테고리가 가장 풍성하지 않을까 싶다.

이 풍성함은 서사 자체가 가진 강렬한 힘이라기보다 특별할 것 없는 이야기를 단단하게 떠받치는 디테일에서 온다. 놀라운 것은 그 디테일들이 이 작가의 초기작에서 눈에 띄는 것이 아니라 근작에서 더 번뜩인다는 사실이다.

 

“이제 마당에 나가 초혼(招魂)을 해라.”

할아버지가 어깨를 들썩이며 우는 아버지에게 나직한 소리로 일렀다. 그게 날수로도 스무하루나 되는 아주 길고 긴 장례의 첫 절차였다. 할아버지의 분별에 따라 어머니가 장롱에서 할머니의 저고리를 꺼내 아버지에게 건네주었다. 그 사이 마루로 나온 할아버지의 지시로 일꾼 아저씨가 헛간 뒤에 매달아 놓은 사다리를 떼어와 안마당 지붕에 걸쳤다. 아버지는 마당으로 나와 한 칸 한 칸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위태로운 자세로 비스듬히 지붕의 기왓장을 밟고 두 손으로 할머니의 저고리를 깃발처럼 흔들며 서서히 땅거미가 내려오는 북쪽 하늘을 향해 “강하 우계댁 연일정씨 보-옥(復)!” 하고 큰 소리로 세 번 외쳤다. 그래야 할머니의 혼이 죽었어도 그 소리를 듣고 소리의 길을 따라 다시 온다고 했다.

「시간을 걷는 소년2」, 《작가세계》, 2014년 겨울호, 158-9면.

 

할머니의 죽음을 그리고 있는 이 작품은 어릴 적의 풍경들이 여전히 생생하게 살아 있다는 점에서 인상적이다. 감각적인 표현뿐만 아니라 실제로 당시 이루어졌던 절차나 풍습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특히 이것은 유년기 아이의 눈으로 그려지고 있어서 ‘죽음’이라는 소재와 뚜렷이 대비되면서 더욱 생명력을 얻는다. 앞서 언급한 작품들에서 사북의 탄광 사태로 목숨을 잃은 아버지의 이야기(「212」)와 상호 세력 대결 속에서 일방적인 죽임을 당한 국경경비대장의 사연은(「그들의 나라」) 작품 속에서 묘사된 죽음이 ‘사회적’인 것이라는 점에서 「시간을 걷는 소년」 연작과 차이를 보인다. 「시간을 걷는 소년」에서 할머니, 그리고 어린 영숙의 죽음은 완전히 ‘개인적’이다. 물론 이러한 죽음들이 엄청난 고통이나 상처로 남았다는 점은 공통점이겠고, 완전히 개인적인 죽음이란 불가능한 것이겠지만 두 유형의 죽음이 소설 속 인물에게 끼치는 영향은 조금 다른 것이 사실이다.

「시간을 걷는 소년」(《대산문화》, 2014년 여름호)은 불현 듯 찾아온 유년기의 기억을 따라 “생의 부름”을 받는 주인공의 이야기이다. 그 부름은 예외 없이 “동쪽으로” 향한다. 그 기억은 어릴 적 유난히 몸이 약했던, 그래서 할머니가 “자묘”라고 이름 붙여 저승의 명부에서 쉽게 찾을 수 없도록 만들었던 어린 시절에 관한 것이다. 그를 향한 할머니의 특별한 보살핌은 명(命)어머니를 지정하는 데까지 이르는데, 명어머니란 말 그대로 아이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두 번째 어머니로 섬기도록 한 사람을 일컫는 것이다. 두 살짜리 아들을 잃은 삼박골 영서댁을 어려서부터 명어머니로 모시던 주인공은 그 집의 딸인 영숙과 가깝게 지낸다.

동짓날 목숨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명어머니 집으로 피신하던 밤의 풍경은 흡사 이효석이나 김유정을 떠올리게 할 정도로, 아름답고 아득하다. 그러나 소설을 아름답고 아득한 채로 마무리 할 수 없었던 것은 그 동지가 지나고 “이듬해 봄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곧이어 닥친 여름 장마 때 영숙이가 무엇엔가 이끌리듯 앞강에 나가 목숨을 잃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이 작가로 하여금 「시간을 걷는 소년」의 두 번째 이야기를 하게 만드는 원동력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이 소설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또 하나의 장면은 주인공인 자묘(은후)가 오리과자를 사기 위해 홀로 길을 떠나는 장면이다.

 

아이가 운 것은 손안의 오리를 잃어버린 안타까움 때문이 아니었다. 하늘과 땅의 장엄함 속에 강은 점점 붉어지다 검은 색을 띠어가고, 지는 노을 속에 한 번에 수백 마리의 은어가 뛰어오르는 저 황홀하고도 슬픈 풍경을 아이는 혼자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다. 울며 불러도 아버지는 집에 없었다. 언제인지 모르게 아버지는 집을 나가 있었다. 할머니는 아버지가 집을 나간 것에 대해 그것은 누구도 쉽게 다스릴 수 없는 역마라고 했다. 할아버지도 어떻게 하지 못한다고 했다. 아버지의 낚싯대 역시 마루 아래에 주인의 손길을 기다리며 길게 누워 있었다. 아이는 노을이 다 스러지고 어둠이 밀려들 때까지 오래 강둑에 서 있었다. 우주라는 말은 몰라도 우주 한가운데 홀로 길을 잃고 버려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시간을 걷는 소년」, 《대산문화》, 2014년 여름호, 112-3면.

 

아이가 오리과자를 사기 위해 손 안에 꼭 쥐고 갔던 돈이 사라져 버리고, 결국 부끄러움과 허탈함에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장면은 아이가 감당해야 할 삶의 무게를 짐작케 한다. 그 무게는 결국 앞으로 드리워지게 될 죽음의 그림자를 암시하는 것이면서 아이가 어쩔 수 없이 짊어지게 될 운명을 가리키기도 한다. “울며 불러도” 집에 없는 아버지의 존재는 늘 이순원이 여러 작품들에서 강조해오던 것인데, 이는 ‘죽음’이라는 모티프와 이어지기도 하지만 작가 자신의 방랑적 기질과도 연관된다.

 

 

로부터의 서사

 

작가 이순원은 누구보다도 자신이 글 쓰는 사람임을 철저하게 인식하는 작가라 할 수 있다. 그의 작품들은 각각의 작품마다 문체가 거의 다를 정도로 다양한 외피를 갖지만 작가와 인물 간의 거리가 거의 없다는 점에서 일관된다. 3인칭으로 씌어진 작품조차 1인칭의 시점과 거의 구별되지 않을 정도로 인물이 밀착되어 있다. 이것은 단순히 소설가를 주인공으로 삼는 식의 문제가 아니라 서사를 만들어내는 방식이 철저히 작가의 내적 경험의 산물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이는 대단히 어려운 일이면서 동시에 작가적 담대함을 요구하는 방식이다. 작가의 민낯을 이토록 지속적으로, 그것도 유려하게 다양한 형식으로 보여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순원의 여러 작품들은 음미할 만한 가치가 있다.

그리고 개인의 기억과 내면으로부터 삶의 심연을 들여다보는 지금 이순원의 방식은 오히려 앞으로의 행보를 더 주목하게 만든다. 특히 최근 발표한 단편들은 소설을 평가하는 여러 기준을 다 걷어내 버리고 그의 이야기에 차분히 귀를 기울이고 싶게 만든다. “영숙”의 이야기가 그려질 「시간을 걷는 소년3」을 기대한다는 개인적인 바람으로 글을 끝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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