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에 읽은 시

무성한 말들

(이 글은 월간 <심상> 2월호에 실려 있습니다)

2월은 사실상의 ‘새해’가 시작되는 시기다. 보통 이때 설을 쇠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졸업과 입학의 시즌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묘한 흥분과 쓸쓸함이 공존하는 이런 계절에는 삶의 변화들이 크게 다가온다. 당연히, 말들이 무성해질 수밖에 없다.

더 이상 들을 수업이 없는데도

학교에 남아 있었다

갈 데가 없었다

빛나는 졸업장은 곧장 서랍 속으로 들어갈 것이다

서랍 속에서 나날이 빚이 날 것이다

친구들은 자연스럽게 뭉쳤다

갈 데가 있는 친구들은

옷을 사고 차를 사고

이성의 환심을 사고

갈 데가 없는 우리는

양심을 파는 대신

쌀을 팔기 위해

사서 고생하기로 마음먹었다

안 될 걸 알면서도 하는 일이란

몸과 마음을 다 주어야 한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투명인간이 되어간다

어제는 미래를 상상했고

오늘은 오늘을 경험했고

내일은 어제를 후회했다

시간은

빛이 달아나는 속도처럼 빠르거나

빚이 불어나는 속도처럼 더 빨랐다

졸업 직전, 친구 중 하나가 휴학했다

졸업 직후, 친구 중 하나가 대학원에 갔다

학교에 발붙일 틈이라도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가

갈 데가 없어서

우리는 구내식당에 밥을 먹으러 갔다

밥을 먹으려고 입을 벌렸는데 말이 튀어나왔다

우리, 나중에 이런 식당 하나 차리자

꿈보다 해몽이 좋구나

꿈이라도 꿀 수 있다면

오은, 「졸업 시즌」, 《현대문학》, 2015년 2월호

반짝이는 눈으로 세계를 관찰하는 오은의 이 시는 지금의 청춘들이 어떤 자화상을 그리고 있는지 잘 보여준다. 일견 평범한 듯한 이 시에서 순간 멈칫하게 되는 장면은 “빛나는 졸업장은 곧장 서랍 속으로 들어갈 것이다 / 서랍 속에서 나날이 빚이 날 것이다”라고 쓴 부분이다. 그냥 흘려 읽는다면 쉽게 눈치 채지 못했을 “빛”과 “빚”의 배치를 주목하자.

작금의 대학 졸업 세대는 그야말로 “빚”의 세대이다. 학자금 대출 규모가 사상 최대인 것은 물론이거니와 이를 해결하기 위한 돈벌이는 요원하기 그지없다. 그러니 “빛나는 졸업장”이 아니라 “빚 나는 졸업장”일 수밖에 없다. 이 절묘한 언어 감각은 “빛이 달아나는 속도”와 “빚이 불어나는 속도”로 다시 한 번 대비된다. 그리고 빚은 빛보다 빠르다.

졸업을 유예하며 갈 곳이 없어서 학교에 남아 있는 세대들에게 “꿈”은 그야말로 사치이다. “안 될 걸 알면서도 하는 일이란 / 몸과 마음을 다 주어야 한다”는 구절은 ‘열정페이’ 논란을 어쩔 수 없이 떠올리게 만든다. “미래를 상상”한다는 것 자체가 허망하고, “오늘을 경험”하는 것만으로 버거운 이 세대에게 “갈 데”가 어디 있을까.

그날은 고향에 있었다. 터미널에 앉아 있었고 그곳은 잠을 자는 곳으로 읽혔다. 나는 서서히 걸어간다, 어딘지 분실한 적이 있던 거리를. 그러나 이미 도착한 먼 동네에는 사루비아가 피어난다. 나비가 날아다닌다. 낯익은 사람들이 지나간다. 그곳은 고향이었고 장마철에는 급류가 쏟아져 내렸다. 나는 장을 보고 있었다. 손엔 자두가 들려 있고 그러나 내가 값을 치른 건 작은 개였다. 나는 그곳을 선연한 고향이라고 느끼고 있었는데 표지판에는 모르는 지명이 적혀 있었다. 나는 작은 개를 들고 엄마에게 간다. 그래도 엄마는 있을 것이고 다행히 나는 그곳에서 누운 엄마를 바라보고 있었다. 밖으로 눈물이 새어나가고 있었다. 통화음이 울리다가 그쳤다. 꿈속에서 내가 죽었다는 걸 안 건 나뿐이었다. 다른 사람에게 알리지 못했다.

안태운, 「인상-미열」, 《문예중앙》, 2014년 겨울호

안태운의 이 시를 고향을 찾아간 졸업 세대의 “인상”으로 읽어 보자. 우선 과거형과 현재형을 섞어가며 시를 전개해 나가다가 “그래도 엄마는 있을 것이고 다행히 나는 그곳에서 누운 엄마를 바라보고 있었다”라는 구절에 도착했을 때의 강렬함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터미널”, “먼 동네”, “낯익은 사람”, “표지판” 등 고향을 가리키는 어휘들이 꿈을 암시하는 문장들과 만나 시적 깊이를 만들어내고 있다. 이 시는 모든 디아스포라를 위한 비가(悲歌)처럼 들리지만 고향 역시 이제 “분실한 적이 있던 거리”로 읽히는 졸업 세대의 “눈물”로 본다면, 이것이 “꿈”인지의 여부는 사실 중요하지 않다. 그것이 현실이든 꿈이든 시적 자아에게 그러한 “미열”의 “인상”이 있다는 것, “엄마”로 제시되는 어떤 근원을 잃어버렸다는 인식이, 게다가 이를 아는 게 “나뿐”이라는 감각이 무엇보다도 중요해 보인다.

벽이 하나 있다.

너는 어제 그 벽에 손을 얹고

고해성사를 했다.

소화된 것들을 다시 한 번

그 앞에 꺼내놓는 일. 꺼내놓으며

눈물 흘리는 일.

입과 눈이 한 짝인데, 입이 하던 일을

눈이 왜 못하겠는가.

너는 어제 입도 눈도 닦지 않고

집으로 갔다. 너를

알아본 사람은 없었지만.

네가 짚고 있던 벽은

더 이상 아무도 짚지 않을 것이다.

벽이 하나 있다.

너는 어제 그 벽에 손을 얹고

본 것만을 말하기로 했다.

하루를 굶고

너는 그 벽을 찾아갔다.

네가 짚었던 자리에

구멍이 뚫려있다.

구멍 맞은편에서

눈 맞은 사람 하나

급하게 입을 틀어막는다

송기영, 「소문의 벽」, 《POSITION》, 2014년 겨울호

철저하게 나뿐이라는 인식은 이 시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시적 주체는 “너”를 명명하고 있지만 그것은 실제로 ‘나’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내뱉는 말과 터지는 눈물이 “한 짝”이라는 인식 아래 일종의 “고해성사”를 하고 있는 “너”는 무성한 말들에 고통스러워하고 있는 것 같다. 그 고통은 “본 것만을 말하기로” 해도 해결되지 않는다. 아무리 비워내도 말들은 남고, 아무리 쏟아내도 눈물은 솟아난다. “너”가 기댈 수 있는 것은 “벽”이 유일한데, 그 벽마저 구멍이 뚫리는 순간이 있다. “너”가 손을 짚고 쏟아냈던 말들의 자리에는 다른 사람은 결코 들어올 수 없다. “소화된 것들”은 자신을 통과해 다시 꺼내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니 그래서 이 시의 마지막 부분이 주목된다.

뚫려 있는 구멍으로 보이는 “눈 맞은 사람 하나”는 누구인가. “급하게 입을 틀어막는” 이 사람을 “너” 자신으로 볼 것인가, 또 다른 “누군가”로 볼 것인가. 이 선택 이후, 시를 다시 읽을 수밖에 없을 것이고, 완전히 달라질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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