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에 읽은 시

당신을 멈추게 하는 질문

(이 글은 월간 <심상> 3월호에 실려 있습니다)

 

새삼 좋은 시를 골라내기란 얼마나 어려운가를 생각한다. 무수한 말들 속에서 독자를 멈춰 서게 하는 구절을 발견하고, 오래도록 머물면서 그 말을 곱씹는 것이 시 읽기의 즐거움이지만 다시 말하거니와 그것은 쉽지 않다. 많은 시인들이 그 나름의 방식으로 자신들의 시 세계를 만들어나가고 있지만 대체로 그 세계는 높고 견고한 벽들로 둘러싸여 있어 독자들은 그저 막막한 마음으로 올려다 볼 수밖에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럼에도 그 벽을 어렵사리 허물고 독자들에게 질문을 툭 던지는 젊은 시인들이 몇몇 있다. 이 시인들의 작품을 보면 의문문이라는 시적 진술의 형태가 얼마나 효과적인지 알 수 있다.

 

흰 발을 물에 담그면 많은 것들이 괜찮아져

우산을 숨기지 않아도 파래지는 시간

우리는 12시적인 것들을 사랑하자고 맹세했지

따듯한 고양이 똥, 한 스푼의 컵케이크, 파란 나비 같은 것들

 

너는 수요일이라고 했어

그런 날에는 부패한 소시지처럼 물속에 있자고

추위의 세계에 대해서만 생각하자고

지루할 정도로 쉬고 싶다고 속삭였어

몸을 말아서 동그란 게 아니라

동그랗기 때문에 온몸을 이렇게 말고 있는 거라며

다슬기처럼 아주 가끔씩 살아 있는 흉내를 냈지

 

나는 고요를 쬐며

막 두 번째 허물을 벗고 있었어

팟-르르르 팟-르르르

젖은 날개를 말리는 동안 한 쌍의 나비가 되는 우리

모든 게 침묵하는데도 진화하는 것들은

어떤 무심함을 인내하는 걸까

 

그런 생각으로 아무것도 껴안지 못하는 마음

물속에서 갓 건져낸 무릎

푸른 멍

 

우리는 없는데

시간은 자꾸만 북극으로 질주하고 있어

비로소 수면 위로 달이 차오르면

캄캄한 밤의 방해를 견딘 날갯짓, 나비의 온기, 비행,

그런 것들이 정말 환영 같을 때가 있어

 

김하늘, 「북극나비」, 《현대문학》, 2015년 3월호

 

이미지를 잘 활용하는 시인이다. “북극나비”라는 제목에서부터 이 시인이 지향하는 바가 명백하다. 북극나비가 존재하느냐의 차원이 아니라 ‘북극’과 ‘나비’가 만나 만들어내는 시적 이미지의 차원이 시인이 주목하고자 하는 방향일 것이다. “우리”가 “사랑하자고 맹세”했던 “12시적인 것들”이 여러 이미지들을 지나 “북극”에 다다를 때, 시는 이러한 경향의 작품들이 좀처럼 획득하기 어려운, 완결성을 갖는다.

이 시인의 질문은 이렇다. “모든 게 침묵하는데도 진화하는 것들은 / 어떤 무심함을 인내하는 걸까” 나비의 탄생과 “우리”의 관계를 연결지어 생각할 때, 우리는 나비가 되지 못한 것일까. 혹은 우리는 이미 한 쌍의 나비인 것일까. 이 질문은 시의 마지막 연과 겹쳐지면서 인상적인 풍경을 만들어내는데, 그것은 쓸쓸하기도 하고, 또 동시에 따뜻하기도 해서 묘하게 아름답다.

 

 

혼자 있는 방을, 왜 나는 빈방이라고 부릅니까

 

흰 접시의 외식(外食)도 흠집난 소반 위의 컵라면도 뱃속에 들어서는 같은 눈빛입니다

 

죽기 살기로 살았더니 이만큼 살게 됐죠. 혼자 있을 때 켜는 텔레비전은 무엇을 위로합니까

이만큼 살아서 죽어버린 것들은

 

변기 안쪽이 붉게 물듭니다, 뜨겁던 컵라면의 속내도 벌겋게 젖었습니다

 

커튼을 젖히자 날벌레같이 달려드는 햇빛들, 겨울은 겨울로 살기 위해 빈방을 찾습니다

 

사랑을 믿기 때문에 사랑했습니까, 삶을 믿어서 살아가고 있습니까

 

밥을 안치려고, 손등은 쌀뜨물 속에서 뿌옇게 흐려집니다

 

네가 없는 방을, 왜 나는 빈방이라고 불렀습니까

 

이현호, 「배교」, 《문학동네》, 2015년 봄호

 

『라이터 좀 빌립시다』(문학동네, 2014)라는 꽤 인상적인 첫 시집을 냈던 이현호 시인의 신작이다. 시의 첫 구절부터가 멈칫하게 만드는 질문으로 시작된다. 흔히 ‘빈방에 혼자 있다’라는 식의 표현을 되짚게 만드는 질문이다. “빈방”이란 누구도, 혹은 아무것도 없어야 할 곳인데 내가 그곳에 있다는 것은 나 아닌 무언가가 없는 곳이 곧 빈방이라는 뜻을 테다. 그 외로움과 고독함, 쓸쓸함의 정서가 시에 가득 묻어 있다. 컵라면으로 끼니를 때우고, 공허한 생의 의지를 무감각하게 보여주는 텔레비전을 들여다보다가 다시 또 배를 채우기 위해 쌀을 안치는 생활의 반복. “사랑을 믿기 때문에 사랑했습니까, 삶을 믿어서 살아가고 있습니까”라는 시인의 질문은 그래서 사무친다. “배교”라는 시의 제목은 아마 여기에서 왔으리라. 모든 믿음을 저버리겠다는 시인의 다짐과 “네가 없는 방을, 왜 나는 빈방이라고 불렀습니까”라는 시인의 마지막 질문이 여운을 길게 남긴다.

 

 

벤치에서

 

단 하나가 앉아 있었다 단 하나의 모습으로

 

혼자서 집으로 돌아갈 때 왜 너는 표정이 하나였을까

 

무엇이 다양하게 굳어버렸나

 

너의 무표정은

 

여전히 나의 여러 가지와 거리가 먼가

 

오른발은 어디서 왼발을 데려왔는지

 

나무의 바깥이 모여 숲속 하나가 완성되고

 

너의 두 팔이 나의 두 팔을 안아주는 장면을 떠올린다

 

두께처럼 떠올린다

 

말도 안 되는 내 기억 속으로

 

아직도 정확하게 착지하는 하나의 표정이 있어

 

한인준, 「공원」, 《21세기문학》, 2015년 봄호

 

공교롭게도 여기 소개한 세 편의 시가 모두 나와 너, 우리의 ‘관계’에 관한 것이라는 점은 새삼 주목할 만하다. 하나의 인간과 또 하나의 인간 사이에 맺어질 수 있는 관계는 얼마나 무수할까. 서로가 나눈 말들, 각자가 공유한 경험들, 그리고 그 속에서 생겨난 미묘한 감정들. 이런 것들이 모든 관계를 ‘다르게’ 만드는 요소일 것이다.

이 시의 질문은 이것이다. “혼자서 집으로 돌아갈 때 왜 너는 표정이 하나였을까” 이 시인이 “하나”라는 어휘를 활용하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다. 이 “하나”는 “다양하게”, “여러 가지”, “두 팔” 등의 시어와 긴밀히 연결되면서 시적 정서를 고양시키는 중요한 기능을 한다. 공원에서 이별한 두 연인을 생각하는 것은 이 시를 읽는 일반적인 독법일 테지만 이 시가 보여주는 것은 그것보다 더 다양한데, 행간의 여백을 채워 넣는 일은 독자의 몫일 것이다.

 

 

 

 

 

1 Response

  1. 김문석

    지나가는 행인 1인 입니다. 시를 좋아합니다. 지난해 우연히 발견하고 가끔 몰래 찾아와 보고 가곤 했습니다. 월에 읽는 시, 꼭지를 가장 잘 보고 있습니다. 평론가 선생님, 수고하시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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