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에 읽은 시

어둠에 관하여

(이 글은 월간 <심상> 5월호에 실려 있습니다)

 

우리가 만들어낸 온갖 대조 속에 ‘빛’과 ‘어둠’만큼 극명한 것도 찾기 어려울 것이다. 빛은 늘 긍정적인 이미지들로, 어둠은 늘 부정적인 이미지들로 곧잘 비유되지만 또 꼭 그런 것은 아니다. 지나치게 밝은 빛은 오히려 우리를 부담스럽게 해 적당한 어둠이 필요해지는 일도 있고, 칠흑 같은 어둠에 싸인 어떤 밤도 완전히 어둡지는 않아서 새삼 안도감을 느끼는 일도 있다. 대체로 어둠은 늘 밤의 시간을 동반하고, 그것은 곧 침묵이나 고독 같은, 우리의 심연을 들여다보게끔 하는 감각들과 마주하게 한다. 그래서 어둠은 반성이나 회고, 그리움의 감정과도 이어지며 곧잘 근원적인 것에 대한 성찰과도 연결된다.

 

 

어미를 먹고 나는 검어지네

나는 나라는 부피를 잃고

검음만 남아 나만큼만 도려낸

세상의 바탕만 뒷면만 같아서

어미도 없네 나도 없고 입도

똥구멍도 없네 있는 것은

검음뿐 밤인 것도 같으나

별 하나 뜨지 않고 어둠은

더더욱 아니어서 지금도

아니고 여기도 아니고 영원히

어미의 이름도 내 이름도 없네

우적우적 어미를 먹는다는 것

검어만 지는 일이란 걸 왜

진작 알아채지 못했을까

우적우적 내가 먹혔더라면

검음 아니고 무엇이었을까

하양 아니면 늦봄 만발한

색색으로 꽃밭이나였으려나

천 번쯤 노을로나 불탔으려나

혹은 삶 혹은 죽음 혹은 혹은

사라지진 못하고 검어진 내가

여태 못 가본 거리로만 가네

가서 거뭇거뭇거뭇 날리네 아직

있은 적도 없다는 어미를 먹고

 

김근, 「검은 숲」, 《문학사상》, 2015년 4월호

 

당연한 말이겠지만 어둠은 ‘검음’이다. 온통 검은 세계에서 ‘나’라는 존재 역시 “검어진”다면 그것은 어떤 의미일까. 이 시의 핵심은 아무래도 “사라지진 못하고 검어진 내가 / 여태 못 가본 거리로만 가네”라는 구절에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어미를 집어삼키고 검어진 존재로서의 ‘나’는 단순하게 읽어버리기 아까운 이미지다. 나는 이 시를 어쩌면 절절한 사모곡으로 읽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고, 몇 차례 이 시를 곱씹을수록 오히려 그쪽이 더 맞다고 여겨질 때도 있었다. 그러나 근원을 잃어버린 채 세계에 물들어가는 시적 주체를 상정하는 편이 낫다고 결국 생각하게 된 것은 바로 이 “검음”의 이미지 때문이었다. 시인이 강조하고 있거니와 검어진다는 것은 사라진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검음만 남아 나만큼만 도려낸 / 세상의 바탕만 뒷면만 같아서” 있지만 없는 것과 같다. 그 검음은 어디서 기원하는가. 시인은 “우적우적 어미를 먹는다는 것”이 곧 검어지는 일이었다고 고백한다. 그러니까 존재의 근원을 감추거나 그것이 사라져버릴 때, 내 의지와는 무관하게 우리는 검어지는 것이다. 그러지 않았다면, 즉 어미를 먹지 않고 내가 먹혔더라면 ‘나’는 “하양”이 되거나 “색색으로 꽃밭”이었거나 혹은 “노을”이었을지 모른다고 시인은 말한다. 그러나 그것 역시 “삶”이나 “죽음” 사이에 있는 것들이어서 여전히 그는 사라지지 못한 채 “검은 숲”을 서성이고 있다. 그 서성임을 “거뭇거뭇거뭇 날리네”라고 표현한 부분이 인상적이다. 그리고 “아직 / 있은 적도 없다는 어미를 먹고”라는 마지막 행은 이 시를 다시 한 번 곰곰이 돌아보게 만드는 더욱 인상적인 갈무리이다.

 

 

자식 없는 부부가 살았다는 소문이 있다

 

이별한 날엔 검은 집으로 간다

쓰레기봉투 하나 없이

쓰레기가 널려 있는 외곽을 돌며

검은 창문을 보며

살아갈 의미도 없이

살아 있는 너를 만난다

 

무엇과도 이별할 수 있다

사물로 보이는 순간

 

검은 집은 눈에 띄게 검은 집이다

검은 집의 내부를 봤다는 사람은 없다

 

집단폭행으로 죽은 소녀가 나타난다는 소문이 있다

 

잊혀진 날엔 검은 집으로 간다

―태어나 한 번도 배운 적이 없는 거짓말을 혼자 배우고 혼자 만들어 반복하다가 죄책감이 점점 옅어지는 상태로

 

누구라도 잊혀질 수 있다

사물로 남는 순간

 

근처에서 너를 닮은 그림자를 보았다

차마 닮지 않았다고 말할 수 없는

이목구비를 보다가

나에게 한 나쁜 짓이 생각났다

 

날이 되는 날엔 검은 집으로 간다

 

따라오다 맨입으로 돌아간 도둑고양이에게 죄악감이 짙어진다

 

검은 집에 하나둘 낙서가 늘어간다

책들이 열린다

창문이 쌓여간다

어떤 그림자들이 겹치고 겹쳐진다

완성되어 있던 검은 집이

완성되지 않는 방식으로 만들어진다

익숙한 실내가 되어간다

 

구현우, 「검은 집」, 《현대문학》, 2015년 5월호

 

이 시인은 “검은 집”에 주목한다. 그 집은 환상 속에 있는 것이면서 동시에 실재하는 것이어서 흥미롭다. 우리는 누구나 하나의 “검은 집”쯤은 본 일이 있을 것이다. “쓰레기가 널려 있는 외곽”, “검은 창문”, “도둑고양이” 등의 이미지로 그려지는, “자식 없는 부부가 살았다는 소문”도 있고, “집단폭행으로 죽은 소녀가 나타난다는 소문”도 있는 그 집 말이다. 이 시에서 인상적인 부분은 그러한 검은 집이 서서히 고통에 신음하는 나의 집으로 “익숙”해지는 광경이다. 이는 너무도 자연스러워서 오히려 놀라운데, 시인의 말처럼 이별과 잊혀짐이 하나의 사물이 될 때 가능하다면, “검은 집은 눈에 띄게 검은 집”이어서 이별의 기점 혹은 거점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시인은 “잊혀진 날엔 검은 집으로 간다.” 검은 집은 모든 기억이 저장된 곳이자 모든 기억이 사라져버리는 곳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곳은 죄책감은 점점 옅어지지만 죄악감은 짙어지는 공간이어서 검은 집은 오로지 시인의 내부로 끊임없이 침투한다. 늘어가는 낙서, 쌓여가는 창문, 겹쳐지는 그림자 등은 차곡차곡 시적 주체로 하여금 검은 집을 짓도록 만든다. 그림자는 아무리 겹쳐도 하나로 보이고, 검은 집 속의 그림자는 말 그대로 검어서 식별할 수 없지만 또 그래서 “너”와 닮은 “이목구비”를 가지고 있다. 그 검음 속에서 서서히 “익숙한 실내”가 모습을 드러낼 때 시인은 나의 집이 곧 “검은 집”이었음을 깨닫는다. 동시에 우리는 “무엇과도 이별할 수” 없고, “누구라도 잊혀질 수” 없다는 사실도 인식하게 될 것이다. 검은 집은 하나의 사물이지만 그것은 곧 ‘나’의 내부여서 절대로 사라지지 않고, 기억은 “익숙한 실내”처럼 영원하다.

 

 

우산 말고 양철 지붕은 어때요

빗살무늬 우리 집을 빌려드릴게요

비가 그쳐도 꼬인 길은 펴서 말릴 수 없는데

내가 떠나도 식탁 위엔 쥐들이 꼬일까요

빈 상자 속의 고양이를 빌려드릴게요 그것도 세 마리나 돼요

말이 통한다면 굳게 닫힌 벽장을 빌려드릴게요 반짝반짝 열쇠를 꽂아둘게요

문이 통한다면 어둠 속의 시집을 빌려드릴게요 접었다 폈다 할수록

손금처럼 선명해지는 유언들

죽은 엄마를 빌려드릴게요 예측 가능한 단 하루

죽은 엄마가 끓여주는 미역국을 빌려드릴게요

사십 년 묵은 핏물로 쓸 만한 게 있다면

항아리 같은 내 몸도 빌려드릴게요 아직 깨지지 않아서

겨울이 오면 이 집에서 난 쫓겨나요

집주인은 카페를 지을 거래요 이 골목엔 그런 카페가 셋이나 더 있는데

집주인들이 모두 카페 주인이 된다면

골목에서 잠은 사라져버릴까요 약속이나 한 듯이

카페 주인들이 어느 날 모텔 주인이 된다면

한 푼씩 모은 잠마저 탕진하는 날이 올까요

공복의 혀가 잠 못 드는 밤

데스크에서 퍼뜨리는

꽃 뉴스 말고 앵무새는 어때요

여린 주먹을 말아 쥐고 받아쓰기를 하는 아이들의 노동을 빌려드릴게요

담보로 잡힐 목숨도 없이 새벽 거리를 횡단하는

유령들의 국가를 빌려드릴게요 남아도는 재난을 떨이로 드릴게요

서로가 거울이 되어 하얗게 질리는

전쟁 같은 침묵 속에서

입만 열면 까르르 쓰러지는 애인을 빌려드릴게요

새로운 시작처럼 텅 빈 통장을 거저 드릴게요

똑. 딱. 똑. 딱. 한국어로 흐르는 시간 너머로

함께 맛보던 어젯밤 꿈을 덤으로 드릴게요

그 속에서 당신은 웃었던가요

칼바람이 꿈을 자르는 길 위에 서서

잠은 좀 잤나요 당신의 어딘가에도 나의 첫 얼굴이 있나요

 

이민하, 「어둠은 우리를 눈뜨게 하고」, 《현대문학》, 2015년 5월호

 

이민하의 시적 특징은 이미지들의 끊임없는 질주인데, 우리는 이 시의 이미지들을 “어둠”이라는 배경 아래에서 읽어야 할 것이다. 부드럽게 말을 거는 듯한 시인의 목소리에 취해 시의 이미지들을 문면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자칫 시적 정조를 오해하게 될 여지가 있다. 물론 그 오해야말로 이 시를 읽어내는 또 하나의 방식이 될 수 되겠지만 “당신”을 찾는 이 시인의 간절함을 지나쳐버릴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시인은 지금 자신의 생을 통째로 “드릴게요”라고 말하고 있다. 그 대상은 당연히 지금은 기억에만 남아 있는 “당신”이고, 다른 것이 끼어들 틈이 없어 보인다. 시의 첫 부분에서 마지막 연에 이르기까지 모든 이미지들은 유기적으로 이어져 있다. 이를테면 “우산”으로 시작해 “빗살무늬”, “꼬인 길”, “쥐”, “고양이” 등으로 계속되는 저 행렬은 거의 자유연상에 가까울 정도로 종횡무진 하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아주 치밀하게 배열되어 있다. 그러니 이 시인은 시적 메시지에서 뿐만 아니라 시적 형식에서도 당신을 향한 그리움에 단 한 순간의 방심도 없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현란한 이미지 놀이 속에서 시인이 세계를 바라보는 인식, 즉 “집주인들이 모두 카페 주인이” 되는 풍경, “유령들의 국가”, “남아도는 재난” 등의 표현을 곳곳에 심어두고 있다. 이런 표현을 염두에 두면 “어둠은 우리를 눈뜨고 하고”라는 시의 제목은 단순한 그리움의 차원을 넘어 말 그대로 암담(暗澹)한 현실 때문에 우리가 억지로 눈뜨게 되는 작금의 상황을 뜻하는 것일지 모른다. 그리고 그렇게, 이 시인의 이미지 놀이는 진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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