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권의 책에 대해 간단히 기록해둔다.
제때 읽지 못하고, 최근에야 읽었다.
내가 아는 이기호의 작품이라 반가웠는데, 또 내가 아는 이야기 방식이라 낯익었다.
일종의 유행처럼 번지는 최근 한국소설의 서사 방식이 역사의 거대한 흐름 속에 우연히 휩쓸린 어떤 개인을 심각하지 않게 그려내는 것인데, 이 작품도 그렇다.
물론 그렇다고 가볍고 유쾌하게만 서사를 엮는 것은 아니고, 한 개인의 삶이 국가 혹은 권력에 의해 어떻게 파괴되는지도 보여준다.
그런데 이런 방식은 마치 <국제시장>처럼 웃다가 울고, ‘그래 그땐 그랬지’하는 식으로만 읽히게 될 가능성이 크다.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훅’이 있어야 하는데, 얼핏 보면 이 소설에서는 그게 도드라지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성석제의 디테일이라든가, 최민석의 작정한 유쾌함이라든가, 이혜령의 분위기라든가, 김도연의 환상성 같은 게 눈에 띄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기호는 영민한 작가라, 하나의 서사 전략을 심어 놓았는데 그것은, ‘자, 이것을 ……. 하고 읽어 보아라’ 하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방식이다.
소설의 주요 장면 전환이 있을 때마다 등장하는 저 문장은 적절하게 이야기에 리듬을 부여하면서 독자의 의표를 찌르기도 한다.
이를 통해 주인공 나복만의 삶은 뇌리를 스쳐가지 않고 깊숙이 남는다.
끝내 이야기를 현재로 끌고 와 마무리하는 방식은 이런 서사에서 익숙한 것이지만 여운은 오래 간다는 것도 기록해둔다.
최진영은 초기부터 상당히 아껴 읽던, 사실상 팬이었던 작가다.
최진영과 황정은의 출발은 꽤 달랐는데, 최근 아주 가까워졌다가 다시 갈라지는 모습이다.
그러니까 <구의 증명>을 읽고 황정은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단 이야기다.
고통과 상처에 관해서라면 이 두 작가를 빼놓고 이야기할 수는 없는데, <구의 증명>은 그 ‘결’이 황정은의 것과 유사해 보인다.
유사하다는 것은 어떤 폄하나 우열에 관한 의미가 아니다.
고통에 관해, 상처에 대해 지극히 섬세하고 깊이 있게, 그러면서도 윤리적이고 사려 깊게 표현하려면 결국 이 두 작가의 방식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최진영만의 방식이 있다고 믿는 편인데, 그것은 일종의 ‘광기’다.
이 소설에서는 살아 있는 ‘담’이 죽은 ‘구’를 먹는 방식으로 그 광기가 출현하는데 처절하면서도 담담해 처연하다.
그러나 이야기가 끔찍해질수록 본질은 사라지고 광기만 남는 것은 아닌지, 그걸 감당하기 위해 씌어진 문장들은 너무 아파서 독자에게 단단한 내성을 만들어주는 것은 아닐지.
힘겹게 이 이야기를 읽고나면 또 한번 타인의 고통을 소비하며 나는 살고 있구나, 생각이 드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