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리, 상상범(은행나무, 2015) / 전성태, 두번의 자화상(창비, 2015)

어떤 모더니즘과 어떤 리얼리즘

(이 글은 <문학의 오늘> 2015년 여름호에 실려 있습니다)

 

연극으로서의 세계, 비유로서의 현실

sangsang

언뜻 현실 비판적 주제와 환상적 장치는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리얼리즘은 리얼리즘을 이기지 못한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현실의 광포함을 이겨내는 것, 현실 위를 날아오르는 것, 그것이 바로 제가 지극히 리얼리즘적인 소재를 다룰 때조차 소설에서 환상적 장치를 배제하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작가의 말」 중에서

 

권리가 독특한 작가라는 사실은 퍽 알려져 있는 편인데, 그 독특함의 ‘팔 할’은 소설의 제목에서 오는 것 같다. 『싸이코가 뜬다』(한겨레신문사, 2004), 『왼손잡이 미스터 리』(문학수첩, 2007), 『눈 오는 아프리카』(씨네21, 2009) 등의 전작들은 물론이거니와 『상상범』(은행나무, 2015)이라는 제목의 책을 보고 흥미를 느끼지 않을 독자는 아마 없을 것 같다. 상상범像想犯은 말 그대로 상상을 범죄로 저지른 자를 의미한다. 단지 여기까지였다면 이 소설은 흔한 상상력의 소산이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권리는 흥미로운 설정을 더한다. 하나는 범죄를 상상하는 것이 범죄가 아니라 상상을 한다는 것 자체가 범죄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상상이 아니라 실제로 행한 범죄는 처벌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 소설 자체가 미래에 관한, 인류에 관한 ‘상상’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작품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그 상상의 세계는 썩 정밀하지 못하다. 치밀한 SF소설을 기대하며 읽기 시작한 독자라면 조금 당황스러웠을지 모른다. 왜냐하면 이 소설은 시작부터 한 편의 거대한 블랙코미디를 표방하고 있기 때문이다. 2321년 ‘URAZIL’ 정부를 배경으로 세계의 변화를 설명해가는 도입부는 견고하기는커녕 삼천포로 빠지기 일쑤다. 합리적으로 추론되는 ‘과학적’ 배경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마치 우연히 그렇게 되었다는 듯이 설명되고, 또 이해되어야만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 소설은 도저히 읽어내려갈 수 없다. “상상은 범죄 행위이다”(16쪽)라는 로텍법 제1조 1항에 의지해 소설을 전개해 나가기에는 이 세계가 너무 성글다. 하지만 이 소설은 다분히 그 성긂을 의도적으로 활용해 소설의 동력으로 삼는다. 그리고 그 동력은 ‘기요철’이라는 인물에게서 대부분 비롯한다.

상상범이라는 독특한 소재, 혹은 우라질 정부의 거대 교도소 체인 ‘로텍’을 둘러싼 음모가 아니라 주인공 기요철에 주목할 수밖에 없는 것은 그가 세계의 허구성과 모순을 폭로하는 역할을 담당하기 때문이다. 그는 붕괴되어가는 이 ‘우라질’의 세계에서 연극배우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마치 소설의 세계가 거대한 연극임을 증명하는 듯한 태도로 그는 자신이 처한 현실이 특이한 ‘즉흥극’이라고 믿는다. 이 기이하고도 대책 없는 기요철의 믿음 앞에서 ‘로텍’의 세계는 점점 무너져간다. “좋은 연기란 상대 배우가 말할 때 딴청 피우지 않는 것이다”(18쪽)라는 연기론을 바탕으로 기요철은 로텍에서 마주한 매순간 그야말로 최선을 다한다. 현실이었다면 굴복하고 말았을 여러 상황들 속에서 기요철은 연극을 대하는 배우의 자세로 그러한 상황을 회피하지 않는다. 그리고 오히려 더 의욕적으로 문제를 확대시키고 적극적으로 상황에 개입해 보이지 않는 ‘권력’을 당황하게 만든다.

기요철의 이러한 태도는 그의 조력자라고 할 수 있을 이율리의 비장함과 대비되면서 희극적 분위기를 만들어냄과 동시에 로텍의 세계에 몰입하려고 하는 독자들을 밀어내는 효과를 가져온다. 떠밀린 독자들은 세계를 문제 삼지 않고 기요철의 행로를 그저 따라간다. 그것만으로도 이 소설의 결말에 다다르기에는 충분하기 때문이다.

사실, 이 작품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이른바 인간의 ‘원죄의식’을 둘러싸고 각각의 인물들이 논쟁을 벌이는 장면들이다. 특히 이율리와 김오식 수사신부가 인간이 죄의식에 관해 대화를 주고받는 부분은 치열한 육탄전을 연상시킬 만큼 박진감이 느껴진다. “살인은 타인의 생명을 제 것처럼 여기는 행위”이기 때문에 문제의 해결은 “인생 그 자체”(170쪽)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 “죄의 유무는 그 행위가 초래한 결과가 아니라 범죄자 내면에 있는 죄의식의 유무로 봐야 하는 겁니다”(173쪽)라는 김오식 수사신부의 말은 곱씹어볼 여지가 충분히 있어 보인다.

이 지점까지 이르면 우리는 다시 이 로텍의 세계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로텍은 실제로 이루어진 범죄는 처벌하지 않는다. 이미 행해진 범죄에 대해 단죄를 고민하는 것보다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잠재적 범죄를 예방하는 것이 궁극적으로 ‘통치’에 더 적합하기 때문이다. 그랬을 때 우리는 이렇게 물어야 할 것이다. 소설 속의 ‘데우스 엑스 마키나’처럼 모든 인간의 상상이나 꿈을 감시할 수 있는 시스템이 생겨나고 상상을 방지하는 ‘세트라’를 복용해야 하는 세계가 도래했을 때, 인간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비유 없이 이해할 수 있는 세계는 어디에도 없다”(205쪽)라는 이율리의 말을 빌리자면 기요철에게 로텍의 세계는 연극의 무대로서만 이해될 수 있는 공간이고, 독자인 우리에게 이 소설은 현실에 대한 거대한 비유로 읽었을 때 유효할 것이다. 그러니 작가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게 아닐까. 상상이 범죄가 되고, 모두가 잠재적 범죄자로 취급받는 시대라면, 그리고 그 시대가 지금의 우리 현실과 그다지 멀지 않다면, 그냥 ‘행하라’고.

 

 

삶을 견디는 사람들만이 체득할 수 있는 윤리와 숭고

jahwasang

지금껏 나는 삶이니 세계니 하는 것들을 분석하는 입장에서 소설을 써왔다. 삶이 믿을 수 없고 알 수 없는 판타지의 세계에 속하기도 한다는 사실을 믿지만 적어도 나는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겪은 명백한 세계만을 그리려고 애써왔다. 내 소설에 조금의 과장이 있었더라도 그것은 삶을 포위한 현실을 명확히 그리기 위해서였다.

―「이야기를 돌려드리다」 중에서

 

전성태의 소설집 『두 번의 자화상』(창비, 2015)은 여러모로 앞선 권리의 작품과 대조적이다. 권리가 ‘죄’라는 문제에 관해 상상력을 발휘해 깊숙이 파고들어갔다면, 전성태는 삶의 다채로운 문제들을 현실에 천착해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 소설집에는 2009년 이후 쌓인 단편들 중 총 열두 편의 이야기가 실려 있는데, 이는 일반적인 소설집의 두 배에 육박하는 분량이어서 책을 손에 잡는 순간, 일단 풍성함이 느껴진다.

전성태가 숙련된 소설가라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지만 그가 구사하는 서사적 전략, 혹은 그가 보여주는 서사성에 관해서는 별로 주목하지 않았던 듯하다. 전성태는 마치 ‘리얼리즘’의 수호자처럼 여겨져왔고, 이럴 때 리얼리즘이라는 말은 그 뒤의 무수한 다양함을 범박하게 축소시켜버리는 느낌을 주어서, 일종의 작가적 태도나 정신과 연결되어왔던 것이다. 그러나 이 작가가 보여주는 서사적 특징은 새삼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우선 전성태는 서사의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데 탁월하다. 단순한 배경 묘사나 인물 소개로 서사를 평범하게 꾸려가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이야기에 맞는, 그래서 소설 전체를 휘감을 수 있는 일종의 훅hook을 그는 언제나 준비해두고 있다. 이 소설집에 실린 열두 편의 소설의 첫 문단만을 떼어내 각각 읽어보기만 해도 전성태라는 작가가 소설의 분위기를 주조하는 방식이 얼마나 다채롭고도 적절한지 음미해볼 수 있다. 그런 뒤에 이 작가는 능숙하게 시점을 옮긴다. 이때의 시점이란 흔히 소설을 설명할 때 자주 사용되는 용어(視點, point of view)이면서 동시에 특정한 시간(時點, moment)을 가리킨다. 그의 소설 속에서 인물들은 언제나 사건의 ‘뒤’에 서 있다. 사후적으로 존재하는 이 인물들의 사연을 소개하기란 작가 입장에서 늘 난감한 일이었을 테다. 그러나 전성태는 마치 이렇게 쓰지 않으면 다른 방법이 없다는 듯이 적재적소에 이들의 이야기를 펼쳐놓는다. 소설 전체를 읽어냈을 때라야만 비로소 이 작가가 ‘시점’을 자유롭게 활용하고 있음을 눈치 챌 정도로 그 수법은 너무도 자연스러워서, 특정 대목을 인용하는 것조차 까다롭다.

전성태가 건져올린 인물들은 모두가 상처받고 쓸쓸한 사람들이다. 그는 그 사람들이 가진 사연들을 덤덤하게 그리면서, 이들이 어떻게 ‘지금’을 견디고 있는지 묵묵히 보여준다. 이 이야기들에는 대단한 반전이나 엄청난 사태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너무도 사소한 것들, 일상의 에피소드가 소설의 거개를 이룬다. 그 에피소드 속에서 인물들은 자신들의 처지를 비관하거나 무기력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최대치의 윤리를 지켜가며 삶을 견뎌낸다. 그래서 이들의 모습은 자못 해학의 언어들로 포장되어 있지만 어느 순간 숭고해진다. 이를테면 「성묘」에서 ‘적군묘지’를 돌보는 노인의 모습이 그러하다. 군인 출신으로 군부대 근처에서 ‘승리상회’를 운영하는 노인이 새로 중공군의 유해가 발굴되어 묘지가 늘어날 때마다 그 영혼을 달래고 묘지를 돌보아왔던 사연들은 거창한 용서나 화합의 의미를 갖지 않는다. 다만 “마음이 더없이 복잡하고 심란”(178쪽)해서 “죽은 자에게 사연도 묻지 말고 죄도 묻지 않기로”(179쪽) 했던 것이다. 그 사소하지만 윤리적인 판단이 누군가의 성묫길을 지켜줄 수 있을 때 노인의 행위는 숭고해진다. 이러한 노인의 행위를 부러 과장하거나 강조하지 않고, 그저 담담한 문체로 그려내고 있다는 점도 인상적이다.

이 소설집에 실린 작품들은 「로동신문」 「성묘」 「망향의 집」 등 분단 문제를 주로 다룬 작품, 「소풍」 「지워진 풍경」 「이야기를 돌려드리다」 등 ‘치매’가 주요 소재인 작품, 「낚시하는 소녀」 「소녀들은 자라고 오빠들은 즐겁다」와 같이 유년기의 주인공을 둘러싼 가족의 문제를 다룬 작품, 「배웅」 「영접迎接」 「밥그릇」 등 독특한 이야기를 가진 작품 등으로 계열화를 시도해볼 수도 있겠다. 그럴 때 이 계열화에 속하지 않는 작품이 「국화를 안고」인데, 이 작품을 꼭 따로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광주에서의 ‘사건’을 배면에 두고 ‘죽음’의 문제를 전면화하고 있는 이 작품은 전성태 소설이 보여줄 수 있는 아름다움을 유감없이 드러낸다. 물론 광주에서의 일을 조금 더 본격적으로 드러내 보이는 작품은 「지워진 풍경」 쪽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어린 딸의 황망한 죽음을 목격해야 했던 한 가족의 파탄은 마음을 아리게 만드는 이야기이지만 나로서는 망자를 사랑하게 된 한 쓸쓸한 여인의 사연에 더 눈길이 간다. 상처를 품에 안고, 그 아픔을 견뎌가며 일상을 영위하는 평범한 사람들만이 체득할 수 있는 윤리적 태도와 그러한 인간들이 힘겹게 맺는 위태로운 관계들이 소설 속에 그득하다. 이 위태로운 인간들이 끝내 쓰러지지 않고 스스로를 붙잡고 있는 모습은 어쩔 수 없이 뇌리에 오래 남는다. 전성태의 소설들이 유독 뒷맛이 깊은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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