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도연, 마지막 정육점(문학동네, 2015)

욕망과 운명의 댄스

(이 글은 <문학동네> 2015년 여름호에 실려 있습니다)

 

last glocery

 

 

이것은 좋은 소설이다. 이렇게 말하고 시작해야 할 것 같다. 어차피 앞으로 쓸 여러 말들은 결국 그 얘기를 하고 싶을 뿐이기 때문이다. 이 작가의 이력을 설명하는 데 굳이 지면을 쓰지 않아도, 이 소설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도 그것은 충분히 설명될 수 있다.

최근 한국소설의 트렌드가 역사의 격랑 속에 우연히 휩쓸려버린 한 개인의 문제에 대해 집중하는 것이라면 이 작품 역시 그 흐름 속에 놓고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성석제의 『투명인간』(창비, 2014)이나 이기호의 『차남들의 세계사』(민음사, 2014)가 보여주는 것처럼 말이다. 성석제가 범접할 수 없는 디테일로, 이기호가 그 특유의 능청스러움으로 서사를 지배하고 있다면, 김도연은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무너뜨리면서 어디에도 종속되지 않는 자유분방함을 보여준다. 이 작가가 ‘현실/환상’의 이분법을 무력화시키는 전략을 구사하고 있음은 이미 잘 알려져 있지만 그 방식이 이토록 매력적인 이야기와 만난 것은 실로 오랜만이다.

 

스님이었던 우연은 대처승이 돼 정육점 집 딸 정옥과 결혼해 도식을 낳았다.

수도원 원생이었던 종욱은 화전민의 딸인 은실과 결혼해 옥자를 낳았다.

도식과 옥자는 강릉에서 디스코텍 웨이터와 미용사로 일했다.

옥자는 친구들과 춤을 추다가 도식을 만났다.

훗날 도식과 옥자는 우여곡절 끝에 부부가 된다.

그러나 두 사람은 신혼여행을 가기 위해 폭설의 대관령을 넘다가 차가 산비탈로 미끄러지는 사고를 당한다.

이 소설은 그런 두 사람의 쫓고 쫓기는, 생과 사의 경계선에서 세상 끝의 정육점을 찾아가는 이야기다.

(314면, <작가의 말> 중에서)

 

작가가 직접 요약해준 이야기의 얼개를 들여다보면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될지도 모르겠다. 고작 이 정도의 이야기라니, 하고 말이다. 하지만 저 단순한 문장들의 행간 속에 얼마나 다채로운 사연들이 숨어 있었는지,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는 순간에 이르러야 나는 겨우 알게 되었다.

조금씩 위의 문장들을 보충해 보자. “스님이었던 우연이 대처승이” 되는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정옥과 사랑에 빠진 뒤 그는 자신에게 거대한 산과 같았던 유일한 스승, 큰스님을 배신해야 하는 처지에 놓인다. 그리고 대처승과 비구의 갈등 속에서, 또 자신의 짐승 같은 욕망들을 발견하게 되면서, 그는 “강포수”로서의 삶을 살아간다. 멧돼지 사냥을 나갔던 어느 날, 우연은 절벽에서 떨어져 생을 마감한다.

“수도원 원생이었던 종욱”은 시인으로 인정받고자 했던 문학가였고 끝내 인생의 허무함을 이기지 못해 절간에 들어온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 역시 은실과 사랑에 빠지면서 무수한 고민 끝에 속세의 삶을 살아가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그 삶이 무르익기도 전에 눈길의 대관령에서 그 역시 교통사고로 생을 마감한다.

그러니 저 두 문장 이후에는 “우연과 종욱은 죽었고, 정옥과 은실은 남았으며, 그들은 각자 도식과 옥자를 홀로 키운다”라는 문장이 들어가야 한다. 그러나 이런 문장을 쓸 수 없다는 것에 이 소설의 매력이 있다. 우연과 종욱은 죽었으나 죽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생과 사의 경계선”에 머무르면서 여전히 ‘살아’ 있었다.

따라서 도식과 옥자가 교통사고를 당한 후 그 “경계선”에서 자신들의 아버지를 만나게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영혼의 공간을 하나쯤 설정하는 것은 소설적으로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 이 인물들은 놀랍게도 단순히 어떤 새로운 시공간에 놓이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규정하는 제약들에 전혀 구애받지 않고 이를 자연스럽게 초월한다. 인물들은 각자의 경험들을 조용히 지켜보기도 하고 어떤 순간에는 직접 참여하기도 하면서 자유롭게 움직인다. 이 자유분방함은 처음에는 낯설고 어색하지만 어떤 지점에 이르면 상당한 해방감을 준다. 언제나 시간이라는 제약과 공간이라는 조건에 맞춰서 서사의 틀을 구성해야 했던 독자들은 이 작품 속에서 그런 것들을 전혀 신경 쓰지 않은 채 이야기의 흐름에 몸을 맡기기만 하면 된다는 사실을 어느 순간 깨닫게 된다.

이 작가가 조금씩 이야기를 쌓아 나가 결국 이 소설의 세계를 독자로 하여금 받아들이게 힘은 예사롭지 않은데, 이를테면 죽은 종욱이 우연을 위협하는 멧돼지의 몸을 빌려 대화를 하는 장면이라든지, 절간 수챗구멍의 쥐들이 이러쿵저러쿵 “밤말”을 나누는 장면 등은 우화에서나 등장할 법한 모습이지만 소설 속에서 전혀 어색함이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것은 환상과 현실의 이분법으로 서사를 준별하는 방식이 그다지 의미 있지 않다는 점이다. 특히 소설 후반부에 이르러 도식과 옥자가 절간을 헤매는 부분이 인상적인데, 온갖 동물들의 교미, 푸줏간처럼 걸려 있는 고깃덩어리, 죽음을 앞둔 큰스님에게 도식과 옥자를 살려달라고 간청하는 우연, 종욱, 정옥, 은실의 모습 등이 일대 향연처럼 펼쳐진다. 마치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연상시키는 듯한 이 마지막 장면에서 작가는 결국 독자를 설득시키고, “마지막 정육점”으로 달려간다.

이 소설은 도식과 옥자의 “쫓고 쫓기는” 모험을 기반으로 하지만 결국 기억과 기원에 관한 이야기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들이 “우여곡절 끝에 부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마주친 운명의 힘 때문이다. 그들은 “긴 신혼여행”(312면)에서 인간이 품은 근원적인 생명력을 마주한다. 그것은 단순히 삶과 죽음 가운데서 삶으로의 선택이나 삶에의 의지를 의미하지 않는다. 차라리 삶의 동력으로서의 ‘욕망’에 가까울 것이다. 이 욕망이 운명과 만나 추는 폭발적인 춤이 소설 속에 가득 담겨 있다. 이 춤에 몸을 맡긴 채 도달하는 곳이 “마지막 정육점”인데, 그곳은 죽음과 삶이 늘 공존하는 공간이어서 새삼 절묘하다. 흐릿하고 희미한 불빛이 새어나오는, 오대산 월정사로 가는 길목 끝에 있는 그 푸줏간의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우리는 완전히 새로운 질서의 세계로 진입하게 될 텐데, 이 작품은 그 행렬에 기꺼이 몇 번이고 동참하고 싶게 만드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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