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의 연대기(年代記), 고통의 연대기(連帶記)

이 계절의 단편소설 ―  임철우, 「연대기, 괴물」, <실천문학>, 2015년 봄호

(이 글은 <자음과모음> 2015년 여름호에 실려 있습니다)

 

수많은 작가와 수많은 소설 속에서 단 하나의 작품, 단 하나의 작가를 고르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일까를 생각해본다. 매 계절 쏟아지는 단편들 틈에서라면 더욱 그럴 것이다. 이럴 때 절실히 요청되는 것은 어떤 ‘기준’이다. 특정한 잣대를 앞세우면 우리는 어떻게나마 작품들을 준별할 수 있고, 과감하게 ‘취사선택’할 수도 있다.

 

많은 소설이 현실의 무게를 감당하려고 분투하고, 또 많은 소설이 과거 혹은 미래로 서사의 폭을 넓힐 때, ‘지금, 여기’에 천착하는 작품은 드물기 십상이다. 시효성에 집중하다 보면 서사의 다른 부분들을 놓치게 될 우려가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현재’에 대한 작가 자신의 판단력을 스스로 신뢰할 수 있느냐의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현실은 그 어느 때보다도 시시각각 변해가고, 다양한 가치가 서로 충돌하는 ‘현장’에서 사태를 올바로 바라볼 수 있다는 확신을 갖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 관점의 기준이 역설적으로 과거의 경험에서 온다는 것인데, 이는 역사를 관통한 사람들만이 가질 수 있는 특권이기도 하다.

임철우라는 작가를 『봄날』(문학과지성사, 1998)로 기억하는 것은 여러 가지 의미에서 간편한 방식이다. 그리하여 그를 5·18의 작가, ‘광주’라는 시대의 ‘증언자’로 이해하는 일은 온당하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하지는 않다. 그는 『봄날』의 작가이면서도 동시에 『황천기담』(문학동네, 2014)의 작가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 지면에서 상세히 언급하기는 어렵지만, 요컨대 임철우는 역사를 기록하고 진실을 폭로하는 담지자로서뿐만 아니라 역사의 폭력에 희생된 넋에게 진혼곡을 올리는 사제의 역할도 함께 담당하고 있다.

이런 작가가 올봄에 「연대기, 괴물」이라는 제목의 단편을 발표했다면 그 속살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작품은 2015년, 한국 사회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에 관한 작가의 단호한 응답이다. 이 응답은 『아버지의 땅』(문학과지성사, 1984)으로 시작되어 『백년여관』(한겨레출판사, 2004)에 다다랐던 작가 자신의 이력과 밀접하게 맞닿아 있어 더욱 인상적이다. 독자의 입장에서라야 여전히 눈을 부릅뜨고 현실을 지켜보는 작가의 출현은 늘 환영할 일이지만 작가라면, 꽤 부담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것도 아직 진행 중인, 세월호의 이야기라면.

 

작가가 그려놓은 방식으로 이야기를 따라가보자.

한 육십대 노숙자가 지하철에 뛰어들어 자살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약 30분 정도 전철 운행을 중단시켜야 하는, 그래서 “퇴근길 시민들이 큰 불편을” 겪어야 했던, 다음 날 “조간신문에 우표딱지만 한 기사”(246쪽)가 실릴 정도의 일이었다. ‘신원 불명’으로 처리될 듯했던 이 자살 사건은 그가 철길로 돌진할 때 오른손에 쥐고 있었던 식칼의 지문 덕분에 실마리가 밝혀진다. 1949년생, 송달규. 이야기는 그의 “연대기”로 이어진다.

 

끄륵끄륵…… 끌끌끌끌. 묵직한 쇠사슬이 땅바닥에 끌리는 것 같은 기이하고 섬뜩한 소리. 그는 소스라치게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순간 맞은편 천장과 벽을 훑으며 거대한 그림자가 휙 하고 빠르게 지나갔다. 그놈이다! 놈이 또 나타났어!(250쪽)

 

서울역에서 노숙 생활을 하고 있던 송달규는 역사에 이용객이 없는 틈을 타 화장실에서 몸을 씻는다. 그러던 중 돌연 “괴물”을 마주한다. 늘 머리나 몸통은 본 적이 없는, “끝이 뭉툭”하고 “털이 부숭숭하게 박혀” 있는 “거대한 꼬리”(251쪽)를 이날 유난히 또렷하게 목격한 것이다. 이 느닷없는 괴물의 출현은 송달규의 유년기로 돌아가 그 기원이 설명된다. “생모는 얼굴 윤곽조차 지워진 채”로, “생부는 아예 그 존재 자체가 비밀에 묻혀”(251쪽) 외조부모와 살았던 송달규는 간밤에 어른들이 나누었던 끔찍한 이야기들의 이미지가 생생하게 머릿속을 떠다니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발견한 것은 깨진 사금파리 아래로 보이는 움푹한 구덩이였고, 그 토굴의 내부를 응시하며 그는 다시 어른들이 밤마다 이야기했던 “몽둥이 패에 끌려가 수중고혼이 된 청년”(252쪽)을 떠올린다. 동시에 그 어둠 속에서 “붉은 발광체처럼 번들거리는 두 개의 눈알”(251쪽)을 발견하고 혼절해버린다.

임철우의 서사에 익숙한 독자라면 여기까지 읽고 송달규의 사연을 짐작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몽둥이 패”와 바다 위로 떠오른 수많은 시체 등의 언급을 통해, 또 깨진 사금파리 조각이나 어둠에 싸인 토굴 같은, 임철우의 것이라 할 수 있을 몇몇 이미지를 통해 이 이야기가 고통스러울 것이라는 짐작은 충분히 가능하다. 이 작가는 늘 그랬듯이 사태를 우회하거나 회피하지 않고 곧바로 본질로 직면해 들어간다.

송달규가 호적상으로는 1949년생이지만 실제로는 1951년생이라는 언급으로부터 이야기는 다시 시작된다. 달규라는 이름은 호적상의 이름이었고, 실제 그가 불리었던 이름은 진태라는 이름이었다. 외조부모는 그를 ‘김 씨’의 자식이라 추정했지만 어떤 ‘이유’로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동네 사람 송칠복을 아버지로 등록한다. 그러니 사실 그는 송달규가 아니라 김진태의 삶을 살아야 했던 사람인 것이다. 하지만 그는 결코 김진태로 살아갈 수 없었고, 그가 송달규로서 살아야만 했던 이유, 즉 끔찍한 진실이자 비극의 내막인 자신의 출생 내력을 알게 된 것은 사춘기 무렵이었다.

 

그들은 여느 노인들처럼 자상하게 손자를 대하다가도, 어느 순간 돌연 냉랭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어버리곤 했다. 그때마다 조부모의 눈빛에서 그는 특유의 기묘한 그림자를 어김없이 확인하곤 했다. 두려움과 안타까움, 혐오감과 불안이 뒤섞인 그 어둡고 꺼림칙한 그림자는 어린 그에겐 종내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였다.(254쪽)

 

송달규를 돌보던 외조부모는 “가난하지만 심성이 고운 사람들”(254쪽)이었다. 외아들이 전쟁 통에 죽고, 둘째 딸은 아이를 던져놓고 행방불명이 된 상황에서도 달규를 보살피고 돌보아왔다. 채 삼십 호가 될까 한 작은 섬마을에서 “두려움과 안타까움, 혐오감과 불안이 뒤섞인 그 어둡고 꺼림칙한 그림자”를 생겨나게 한 것은 악마 같은, “서북청년단”이라는 이름의 “몽둥이 패”(255쪽)들이었는데, 그 참혹한 일들의 시작은 “보도연맹” 사건이었다.

 

보도연맹은 사상 전향자들을 통제, 관리할 목적으로 국가가 만들어낸 일종의 올가미였다. 좌익 활동을 했거나 남로당 등에 가입한 전력이 있는 사람을 가입 대상으로 규정해놓고, 전국 경찰서마다 할당된 인원수만큼 연맹원을 가입시키도록 지시했다.(257쪽)

 

사상을 통제하려는 목적으로 무차별적으로 사람들을 조직에 가입시키고, 인원수를 채우기 위해 온갖 회유와 구실을 만들어냈던 이 보도연맹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그 연맹원들을 국가가 다시 ‘학살’하는 전대미문의 사건이 되어버린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어떤 방식으로, 왜 죽어가야 했는지 여전히 알지 못하는 이 사건은 그러나 지옥 같은 시간의 시작에 불과했다. 이후 섬은 인민군의 치하에 들어가면서 구타와 고문과 총살이 반복되었고, 다시 인민군 철수와 함께 경찰 부대가 복귀하면서 살육의 현장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눈앞에서 내 가족과 친지와 이웃이 처참하게 살해되는 것을 끊임없이 지켜봐야 했고,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서북청년단”이 있었다.

 

몽둥이 패. 사람들은 육지에서 내려온 정체불명의 사내들을 그렇게 불렀다. …… 대부분 더벅머리 이십대인 그들은 처음 듣는 투박한 이북 사투리를 썼다. 주로 평안도와 함경도 출신들로, 빨갱이한테 부모, 형제, 재산을 다 잃고 이북에서 도망쳐 왔으며 스스로를 ‘빨갱이 사냥꾼’이라 부른다고 했다.(260쪽)

 

이 서북청년단의 대장 “김종확”은 닥치는 대로 사람들을 잡아다 고문하고, 수장시키는 일의 선두에 서 있었는데, 둘째 딸 옥례의 사위 역시 그 희생자 중 하나였다. 그 사위가 숨어 있던 곳은 일곱 살의 달규가 끝내 눈을 떼지 못하고 바라보고 있던, 그래서 강렬한 붉은색의 눈동자와 마주한 채 혼절할 수밖에 없었던 그 어둠의 구덩이였다. 그 구덩이에서 사흘 만에 끌려나온 사위의 죽음을 달규의 외조부는 눈앞에서 지켜보았다. 그리고 놀랍게도 자신은 별 탈 없이 풀려났는데, 그것은 또 다른 지옥의 시작이었다. 둘째 딸 옥례는 김종확에게 밤마다 겁탈을 당해야 했고 몇 년 만에 불쑥 옥례가 맡기고 가버린 아이는 “악마”의 핏줄이었던 것이다.

 

그 끔찍한 역사를 기록한 뒤, 소설은 송달규의 죽음 직전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 작가는 이런 장면을 그려 넣는다.

 

역 구내 TV는 온종일 한두 개의 종편 채널에만 고정되어 있었다. 이윽고 뉴스가 끝나고 기다리던 시사 좌담 코너가 이어졌다. 마, 정확한 지적을 하셨네요. 솔직한 얘기로 인자 쫌 그만할 때도 충분히 됐다 아입니까. 벌써 몇 달이 지났는데도 세월호 유가족들은 일상으로 복귀를 안 하고 무리한 요구를 하면서 지금 국가를 흔들어대고 있잖습니까…….(264쪽)

 

그가 25년간 기거하던 기도원을 나와 거리를 헤매게 된 것은 “서북청년단 재건준비위원회 출범?”(271쪽)이라는 자막의 뉴스 때문이었다. 그는 그 화면 속에서 무시무시한 갈고리를 손에 쥐고 수십 명의 사람들을 학살하던, 자신의 생부이기도 한 김종확을 발견한다. 그리고 모종의 결심을 한 후, 자신이 25년간 기거하던 기도원을 가방 하나만 달랑 꾸린 채 빠져나온다.

임철우는 현재의 시점으로 돌아온 순간부터 십여 페이지를 세월호 사건의 추이를 설명하는 것에 할애한다. 죄 없는, 힘없는 사람들이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한 채 바닷속으로 던져지던 저 1950년대의 역사와 가라앉는 배에서 창문을 두드리며 아무리 살려달라 외쳐도 단 한 사람도 ‘구조’하지 못한 채, 눈앞에서 수백 명의 아이들이 그대로 바닷속에 갇히는 것을 지켜봐야 했던 2015년을, 작가는 마주해놓는다. 세월호 사건에 관한 무수한 말들이 쏟아졌지만 이토록 강렬하게, 이처럼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은 채 이 사태가 일종의 ‘학살’임을 보여주는 서사는 처음일 것이다.

 

그는 멍하니 입을 벌린 채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럼 그 많은 아이들이……. 순간, 그는 두 눈을 의심했다. 거꾸로 처박힌 선체 주변의 수면 밑에서 거대한 검은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있었다. 바로 그놈이었다. 공룡 닮은 몸통, 뱀처럼 긴 꼬리, 네 개의 다리를 가진 정체불명의 괴물. 그놈은 흐릿한 수면 밑에서 검은 지느러미를 부챗살처럼 펼친 채 뒤집힌 선체 주위를 유유히 헤엄치고 있었다.(268쪽)

 

달규는 배가 기묘하게 기울어져 있는 그 화면 속에서 “괴물”을 발견한다. 이는 괴물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는 “연대기”이자, 임철우라는 작가가 여전히 현실에서 눈 떼지 않고 있음을 여실히 드러내는 장면이다. 국가나 이념이라는 이름 아래에서 자행된 폭력의 어두운 그림자는 여전히 한국 사회에 길게 드리워져 있다. 그것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고, 지금도 그 상흔에 신음하면서 이를 버티고 견뎌내는 일로만 하루를 힘겹게 이어가는 사람들이 있다. 세월호 사건은 그 그림자 바깥에 있다고 주장할 사람이 있다면 이 소설이 묘사하는, 아니 지금 당장 광화문을 바라보라. 외피도 달리 걸치지 않은 채로 괴물은 여전히 “끌끌끌끌”거리고 있다.

임철우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다시 우리를 달규의 열일곱 되던 해로 데려간다. 그가 육지에서 세탁소 안 씨의 도움으로 보낸 3년여의 안온한 시간은 베트남 파병으로 끝이 난다. 베트남에서 그는 사람을 죽였다. 죽지 못해서 미칠 수밖에 없던 그 시절, 무수한 살육의 행위 속에서 그는 다시 그 괴물을 마주한다. 그러나 그가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언제나처럼 괴물의 거대한 뒷모습과 기괴한 소리뿐이었다. 그리고 파병에서 돌아온 뒤, 그는 여전히 절반 정도 미친 채로 10여 년간 바다를 떠돌았고, 자신을 돌보아주었던 양 씨가 1980년의 광주에서, “세탁소 안으로 느닷없이 도망쳐 들어온 청년 두 명을 세탁실 안으로 숨게” 해주었다는 이유로 “공수부대 병사의 진압봉에 머리를 맞고”(278쪽) 정신이 나가버린 것을 목격한다. 그는 그길로 정신장애인 집단 수용 시설인 “엠마누엘기도원”으로 들어간다.

 

여기까지가 송달규의 연대기이자 괴물의 역사이다. 작가는 제목에서 연대기와 괴물 사이에 쉼표를 두었는데 그것은 아마도 ‘연대기라는 괴물’의 의미와 ‘괴물들의 연대기’라는 의미를 동시에 담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반복되는 폭력의 역사 속에 괴물은 어쩌면 역사 그 자체일지 모른다. 일정한 주기를 가진 진자의 운동처럼 어떤 주기가 도래했을 때, 무조건 일어나고야 마는 현상이 있다면, 괴물은 단지 역사라는 운동 앞에 종속된 폭력의 이름일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괴물이라는 이름의 연대기를 중지하기 위해, 우리 안의 괴물이 고개를 들지 않도록 다시 화살을 우리 앞으로 돌려야 할 것이다. 인간이 인간이기 위해, 괴물이 되지 않기 위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진지하게 묻지 않을 수 없다.

 

머리 위로 땡볕이 쏟아지는 한낮. 대숲 속 검은 바위 밑에 엎드려, 한 아이가 잡목과 풀 더미에 얼굴을 묻은 채 땅 밑 구덩이 속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결혼한 지 1년도 안 된 새신랑. 몽둥이 패에 끌려가 수중고혼이 된 그 젊은 사내가 최후로 숨어 있었다는 자리. 어째선지 아이는 얼굴도 본 적 없는 그 새신랑이 자신의 진짜 아비였더라면, 하고 내심 바란 적이 많았다. 말할 시간이 없을지 몰라서 문자 적어놓을게. 사랑해요 엄마. 사랑해 아빠. 그런데 내 동생은 이제 누가 자전거 태워주지?(284쪽)

 

송달규가 지하철에 뛰어들었던 그날, 안산의 세월호 합동분향소를 찾아가 자신의 생애를 되돌아보는 모습은 실로 절창이다. 그가 사흘에 한 번꼴로 합동분향소를 찾아가 “수천수만 송이의 꽃무더기 속에 수백 개의 영정들이 빽빽이 들어찬 그 제단”(281쪽)을 마주했기 때문이 아니라, 괴물을 낳게 한 삶의 기억들과 세월호 아이들의 마지막 말들이 포개지는 위의 장면들 때문이다. 이를 통해 이 소설은 괴물들의 연대기(年代記)를 넘어 고통의 ‘연대기(連帶記)’가 된다. 까마득한 우물 속을 들여다보며 “엄마”라고 작은 소리를 내보던 아이에게 엄마는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는 의미와 감정의 이름”이면서 “우주의 모든 감정과 의미가 담긴 유일한 이름”(283쪽)이었고, 세월호의 아이들이 그 마지막 순간에 “엄마”를 부를 때와 결코 다른 것이 아니었다. 괴물로 태어났고, 괴물을 바라보아야 했고, 괴물이 되어야 했던 아이가 마지막으로 기댈 곳은 “엄마”였다. 그러니 가족이 파괴된다는 것은 모든 게 무너져 내린다는 의미와 같다. 누가 이 가족을 파괴했나. 우리는 다시 진지하게 물어야 할 것이다.

 

다시 네 번째 열차가 오기 전까지, 그는 여전히 눈을 감고 그대로 앉아 있었다. 그 길지 않은 사이에, 그는 전 생애의 시간이 물처럼 아득히 흘러 지나가는 것을 오롯이 지켜보았다. 불현듯 몸 안에 차 있던 모든 것들이 일시에 썰물처럼 좍 빠져나가고, 그 자리에 텅 빈 개펄이 끝도 가도 없이 펼쳐지는 느낌이었다. 투툭, 투툭…… 그는 지금 텅 빈 개펄 위에 서서 자신의 심장 소리를 듣고 있었다. 그것이 아직도 뛰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고 경이로웠다. 그 긴 시간 동안, 그토록 끔찍한 굴욕을, 아직도 이렇게 견디고 있다니! 승객 여러분, 열차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그는 조용히 눈을 떴다. 눈앞에 거대한 구멍이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286쪽)

 

송달규의 생애가 보여주듯 괴물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 국가라는 이름의 속박에 의해, 권력이라는 이름의 욕망에 의해, 이념이라는 이름의 폭력에 의해 괴물은 탄생한다. 그 괴물을 끝내 응시하면서 전 생애를 버텨낸 송달규는 세계가 지옥으로 변하더라도 인간이 인간으로서 마지막까지 지킬 수 있는 존엄성이, 그래도 남아 있음을 간신히 증명하고 있다. 그가 지하철 터널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목격한 괴물의 얼굴은 “놀랍게도 완전한 인간”(287쪽)의 형상을 하고 있었는데, 이는 곧 송달규 자신의 모습이라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는 결국 자신을 살해함으로써 괴물의 연대기를 끊어버린다. 그러나 우리는 이 소설의 첫 장면이 ‘현재’이자 ‘현실’임을 다시금 상기해야 할 것이다. 그의 죽음은 기삿거리로도 쓰이기 어려우며, 사건은 ‘무연고자’의 자살로 “종결”될 것이다. 이럴 때, 우리는 저 학살의 세계와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일까. 오히려 여전히 죽음은 만연하고, 그 어느 때보다 무감각하게 이를 받아들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어쩌면 이제 괴물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우리 곁에 서 있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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