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에 읽은 시

시를 쓴다는 것

(이 글은 월간 <심상> 6월호에 실려 있습니다)

 

대개 우리는 독자로서 시를 접하게 되지만, 시를 읽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시인의 입장에 서 본 일이 있을 것이다. 지금 같은 시대에 시를 읽는다는 것은 창작에 버금가는 열정이 아니고서야 선택하기 쉽지 않은 취향이고, 시의 독자라면 ‘왜 읽는가’라는 질문만큼이나 ‘왜 쓰는가’에 관해 골몰했던 기억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물음은 시인이나 독자 모두에게 근본적인 것이지만 때때로 잘 잊혀진다. 이유나 단서를 달지 않는 문학이야말로 가장 숭고한 행위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를 쓴다는 것은 도대체 어떤 의미인지, 그 행위가 삶에 어떤 영향을 줄 수 있는지 끊임없이 고민하는 일은 소중하다. 그리고 그 고민은 시인만의 것이 아니라 시를 읽는 사람의 몫이기도 하다.

 

 

홍모란한테 속옷 한 벌 빌려 입는 동안

모란은 져버리고 아카샤꽃이 치약을 물고 나온다

햇빛이 엎질러놓은 보라 물감 위로

속치마를 다 내보이며 나비 한 마리 날아온다

구름은 출구가 많아 창문들이 자꾸 그쪽으로 손을 흔든다

누워 있는 겨울을 급히 깨운 건 바람

식물들의 식욕이 저리 왕성해지는데

누가 쓴 ‘세월호’ 시 한 편이 등을 친다

내 서랍 속에도 난파시 두 편이 자라고 있다

나는 울지 않고 시만 우는 저 시를 발표하면

책을 더럽히는 일이 아닐까?

맑은 날은 슬픔의 얼굴도 맑다

그 많은 햇빛 수업을 받고 나온 풀아기들 곁에서

우표 같은 셔츠 한 벌 빌려 입는다

시는 슬픔을 녹이는 약이 될까?

일만 년 뒤엔 인간이 쓴 시가 몇억 편이나 될까?

아니면 죄 소멸일까?

오전의 햇빛에선 오이 냄새가 난다

 

이기철, 「햇빛에선 오이 냄새가 난다」, 《현대문학》, 2015년 6월호

 

봄 냄새가 물씬 풍기는 이 시는 왕성한 “식물들의 식욕”을 다양한 방식으로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그 왕성함은 속옷을 입고, 양치질을 하며, 셔츠를 입는, 인간이 하루를 시작하는 모습과 겹쳐진다. 이 이미지들의 공통점은 생동(生動)일 것이다. 햇빛에서 오이 냄새가 나는 어떤 맑은 날, 시인은 슬픈 시를 생각한다. 그는 누군가가 쓴 “세월호” 시 한 편을 읽는다. 그리고 그 시가 “나는 울지 않고 시만 우는” 것이라 말한다. 이 ‘가짜 슬픔’은 거짓 없이 생동하는 자연의 모습과 대비된다. 시인이 시를 쓸 때 마주치는 괴리감은 아마도, 시인 자신이 온전히 시적 주체가 되지 못하는 상황일 것이다. 어떤 사태에 대해 절절히 공감하고 그것에 고통을 느낀다고 해도 곧바로 시적 주체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 순간은 대단히 어렵게 찾아오기도 하거니와, 아주 예민하게 잡아내지 않으면 좀처럼 ‘시와의 거리’를 좁힐 수 없다. 이 시인은 그 괴(거)리감에 대해, “맑은 날은 슬픔의 얼굴도 맑다”라는 구절로 표현한다. 맑은 날에도 슬픈 얼굴을 하고 있다면 그것은 ‘나만 우는 것’과 다름없다. 시가 슬픔을 녹이는 약이 될 것이라고 시인은 믿지 않는 것 같다. 그저 맑을 땐 맑은 슬픔을, 흐릴 땐 흐린 슬픔을 표현할 수 있는, 말 그대로 ‘자연스러운 태도’가 시인에게 필요하다고, 그것만이 “책을 더럽히는 일”이 아님을 시인은 역설한다.

 

 

그렇게 슬퍼? 광복 70주년 기념 프로그램에서 숭례문이 불타고 있었다.

 

로션을 바르는 것처럼 그는 콧물을 손바닥으로 문지른다.

 

우리나라 국보 1호인데 가슴이 미어진다며 운다.

 

나는 키즈 과학체험을 보며 운다. 소의 배에 구멍을 뚫고 아이들에게

 

손을 넣게 한다. 소야, 커다란 눈을 껌뻑이는 소야.

 

아이들이 배에서 꺼낸 곤죽이 된 음식물을 허연 침을 뚝뚝 흘리면서 핥는 소야.

 

나는 콧물을 풀고 눈물을 닦으며 티브이를 본다.

 

지금은 긴급속보에서 카트만두가 무너지고 있다.

 

사망자가 팔백명이라더니 내가 이 시를 쓰는 동안 사천명으로 늘었다.

 

왜 울지 않아? 우리나라 이야기가 아니라서 그는 눈물은 안 난다고 한다.

 

티브이에서 본 비극을 모아 나는 지금 시를 방영한다.

 

뛰어난 인류를 상상한 독재자가 학살을 만든 다큐를 보았고

 

머리채를 잡힌 여자가 중심가를 질질 끌려가며 죽어갔고

 

수백의 사람들이 구경만 했다는 뉴스를 감자칩을 먹으며 메모했다.

 

잔재 아래에서 울음소리가 올라온다. 이름이 뭐예요? 대답하세요. 구조대 올 거예요.

 

말을 해요. 그래야 살 수 있어요. 나는 티브이에게 말을 시킨다.

 

깜박깜박 졸음에 빠지는 티브이를 깨운다.

 

나는 티브이 속으로 들어간다. 차벽 너머의 그를 만난다.

 

우리는 마주보고 있다. 이곳은 마주보는 것을 대치 중이라 한다.

 

이 차벽 너머에서 그가 등을 돌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등을 돌려야만 같은 티브이를 볼 수 있다. 나는 뒤를 돌아본다.

 

임솔아, 「티브이」, 《창작과비평》, 2015년 여름호

 

시가 세계와 마주할 때, 세계의 다양한 사람들에 관해 말할 때 시인의 고민은 더 깊어진다. 모든 세계의 비극들이 시시각각 방영되는 티브이를 바라보며 눈물 흘리는 ‘그’와 ‘나’의 슬픔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숭례문이 불타는 것과 실험동물이 되는 소의 모습은 각각 다른 방식으로 슬픔을 불러일으키지만 그것이 콧물과 눈물을 흘리게 한다는 점에서는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카트만두”의 일은 슬픔 자체가 이미 다르다. 시인은 “왜 울지 않아?”라고 묻고 그는 “우리나라 이야기가 아니라서 눈물은 안 난다”고 대답하는데, 분명한 것은 시인 역시 울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앞선 작품과 마찬가지로 이 시인도 일종의 괴리감을 느끼는 것이다. “티브이에서 본 비극을 모아 나는 지금 시를 방영한다”는 구절은 그러한 시인의 인식을 정확히 보여준다. 언제나 관찰자의 위치에 자리할 수밖에 없는 시인의 운명 아래에는 사태의 본질에 다가가고 싶은 위험한 욕망이 꿈틀댄다. 그러므로 시인은 “티브이 속으로 들어간다.” 그 속에는 시인과 마주보고 서 있는 그가 있다. 색이 다른 이념이 대치 중이다. 누군가 등을 돌려야만 같은 곳을 바라볼 수 있는 그 세계에서 시를 쓴다는 것은 언제나 뒤를 돌아보는 역할을 감당하겠다는 다짐이 아닐까.

 

 

어느 해안보다도 아름답게 입안에 따뜻한 피가 고여 있다

 

그리그의 페르귄트처럼

 

수백만 마리의 담배를 날려 보냈어

 

방으로 돌아와 발톱을 핥는다 그건 글을 쓰는 자들의 삶이다

 

새는 날개라는 귀신을 달고 산다

그 귀신이 새를 데리고 놀다 가는 것이다

여기까지 써 놓고

나는 내 귓속의 물가를 들여다본다

 

시를 쓰는 일은

만삭의 새를

꽃잎을 삼킨 물고기를

놓아주는 일이다

 

제 고요 속으로 사라질 수 있는

권리가 시에겐 있다

조용히 뛰기 시작하는 노루처럼. 노루간처럼

물병에 든 사과 껍질로 저녁이 올라온다

 

이 방 마른 숨소리는 저녁의 다른 이름이 될 것이다

나는 언제 이 백야를 끝낼 수 있을까?

오래전부터 나는 물어 왔다

 

내가 잠을 잔다는 건 자신의 피 곁에 누울 수 있기 때문이다

 

김경주, 「금연의 시작」, 《세계의문학》, 2015년 여름호

 

“금연의 시작”이라는 제목을 가졌지만, “글을 쓰는 자들의 삶”, “시를 쓰는 일”에 관해 말하는 작품이다. 김경주답게, 해석을 허락하지 않는 것 같으면서도 해석의 공간을 넓혀 놓고 있다. 시를 쓴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외로운 일이라는 것을 시인은 자각하고 있는 듯하다. 그리고 그 외로움은 자신에게 오롯이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을 준다. “나는 언제 이 백야를 끝낼 수 있을까? / 오래전부터 나는 물어 왔다”는 부분은 그 시간들이 어두워지지 않는 밤이었으며 무수했음을 가리킨다. 시인은 “방으로 돌아와 발톱을 핥는” 사람이다. 바깥이 아니라 안으로 침잠하며 자신의 끝자락을 힘겹게 더듬는 사람이다. 시인은 자기 “귓속의 물가를 들여다”보는 사람이다. 골똘히 자신의 움직임을 주시하면서 내면의 소리를 들어보는 사람이다. 시를 쓰는 일은 “만삭의 새를 / 꽃잎을 삼킨 물고기를 / 놓아주는 일이다.” 소중한 어떤 것이 탄생하기 이전에, 화려한 언어로 무장하기 이전에 그것을 놓는 일이다. 시는 “제 고요 속으로 사라질 수 있는 / 권리”가 있다. 자기를 바라보는 그 응시야말로 시가 씌어지는 이유이다. 시인은 저녁이라는 시간도 자신의 “마른 숨소리”로 바꾸어버린다. 고요하게 세계의 변화를 바라보면서 그것을 자기 내면으로 꾹꾹 눌러 담는 일, 그리고 이를 쉽사리 바깥으로 내보내지 않는 것이 시인의 태도다. 이것을 감지했을 때라야 “내가 잠을 잔다는 건 자신의 피 곁에 누울 수 있기 때문이다”라는 이 시의 마지막 연을 극단적인 자기 응시의 태도로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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