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에 읽은 시

슬픔의 무게

(이 글은 월간 <심상> 7월호에 실려 있습니다)

 

시를 쓴다는 것은 세계에 대한 무수한 회의와 존재에 관한 허다한 번민의 끝에 도달하는 최후의 항전 같은 것일까. 혹은 시인은 근원적인 고독을 늘 품고 사는 사람이며 시는 그 끊임없는 고독과 외로움의 끝에서 터져 나오는 울음 같은 것일까. 어쨌든 시는 ‘기쁨’과는 거리가 있고, 기본적으로 ‘공유’가 어려운 장르라 생각한다. 누군가를 찬양하기 위해, 어떤 일을 축하하기 위해 씌어진 시들이 얼마나 어색한지를 생각해보면 대번에 알 수 있다. 예컨대 요즘 흔한 문학 행사인 ‘낭독회’를 떠올려 보아도 그렇다. 왠지 시와는 맞지 않는 옷 같다. 결국 시는 혼자만의 것이지 않을까.

 

 

십자가는 높은 곳에 있고

밤은 달을 거대한 숟가락으로 파먹는다

 

한 사람이 엎드려서 울고 있다

 

눈물이 땅 속으로 스며드는 것을 막으려고

흐르는 눈물을 두 손으로 받고 있다

 

문득 뒤돌아보는 자의 얼굴이 하얗게 굳어갈 때

바닥 모를 슬픔이 너무 눈부셔서 온몸이 허물어질 때

 

어떤 눈물은 너무 무거워서 엎드려 울 수밖에 없을 때가 있다

 

눈을 감으면 물에 불은 나무토막 하나가 눈 속을 떠다닌다

 

신이 그의 등에 걸터앉아 있기라도 하듯

그의 허리는 펴지지 않는다

 

못 박힐 손과 발을 몸 안으로 말아 넣고

그는 돌처럼 단단한 눈물방울이 되어간다

 

밤은 달이 뿔이 될 때까지 숟가락질을 멈추지 않는다

 

신철규, 「눈물의 중력」, 《창작과비평》, 2015년 여름호

 

외롭고 쓸쓸한 밤, 어떤 이가 혼자 울고 있다. ‘울음’에 관해 그동안 얼마나 다채로운 표현들이 등장했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인은 떨어지는 눈물에 “중력”이라는 이름을 붙여 여러 신선한 표현들을 많이 보여준다. 높은 곳에 있는 십자가는 속세의 신을 가리키면서도 땅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는 인간과 대립하는 상승의 이미지를 가진다. 그것은 바로 다음 행에서 밤이 달을 파먹는다는 독특한 표현으로 이어진다. 첫 연에서 느껴지는 시적 긴장감은 “한 사람이 엎드려서 울고 있다”라는 둘째 연과 그대로 이어진다. 그냥 울고 있는 것이 아니라 “엎드려서 울고 있다”는 것이 핵심이다. “어떤 눈물은 너무 무거워서 엎드려 울 수밖에 없을 때가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보통의 울음과는 달라서 눈을 감아도 “물에 불은 나무토막 하나가 눈 속을 떠다”니고, 온몸이 허물어져 허리가 펴지지 않는다. 그런 슬픔의 상태를 시인은 철저하게 인간의 것이라고 보는 것 같다. 신은 초연하게 인간의 등에 걸터앉아 있고, 밤은 숟가락질을 계속하는 중에 슬픔에 빠진 인간만이 “돌처럼 단단한 눈물방울이 되어간다.” 이런 표현은 슬픔의 ‘순간’을 잡아낸 것이기도 하지만 슬픔의 무게, 눈물의 중력을 실감하게 하는 인간의 ‘영원’한 비애를 보여주는 것 같아 인상적이다.

 

어떤 슬픔도 없는 중이다. 슬픔이 많아서 없는 중이다. 없는 중에도 슬퍼하는 중이다. 슬퍼하는 중을 외면하는 중이다. 다 어디로 가는 중인가. 다 어디서 오는 중인가. 아무도 가로막지 않는 중이다. 아무도 가로막을 수 없는 중이고 오고 있다. 슬픈 중에도 슬픈 중과 함께 더 슬픈 중이 돌아가고 있다. 돌려주고 싶은 중이다. 되돌리고 싶은 중이고 중은 간다. 슬픈 중에도 고개 한 번 끄덕이고 고개 한 번 돌려보고 가는 중이다. 오지 마라는 중이다. 가지 마라고도 못한 중이다. 너는 가는 중이다. 없는 중이다.

김언, 「중」, 《문학선》, 2015년 여름호

 

‘중’이라는 말은 흔히 쓰는 말이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특이한 말인 듯하다. 언제나 순간에만 머무를 수 있는 인간이 ‘중’이라는 말로 시간의 단위를 포착하려는 의도가 있는 게 아닐까 생각이 되면서도, 또 동시에 ‘중’은 하나가 아닌 여러 개의 의미를 가지므로 복수(複數)의 의미도 가지는 것 같다. 그래서 ‘중’은 홀로 존재할 수 없다. 늘 복수의 시공간을 전제로 한다. 그런 예민한 언어 감각이 이 시에 투영되어 있다. 이 시에서는 “슬픈 중에도 슬픈 중과 함께 더 슬픈 중이 돌아가고 있다”라는 구절에 주목할 수밖에 없다. 슬픔의 상태 중에서도 당연히 더 슬픈 상태가 있을 것이고, 그것은 곧 ‘슬픈 중’이 아니라 ‘더 슬픈 중’의 상태도 있다는 것을 뜻한다. “슬픔이 많아서 없는 중”인 이 시적 주체는 슬픔을 외면하고 막기 위해서 슬픔을 ‘쪼갠다.’ 그것은 시간적으로도, 공간적으로도 그렇다. 결국 ‘너’가 없다는 슬픔, ‘너’가 가는 중이라는 그 상황이 슬픔의 핵심이겠지만 시인은 그것을 결정된 어떤 일이 아니라 여전히 늘 진행되고 있는 ‘중’의 상태로 설정해 슬픔을 감당한다. 이는 마치 인간이 시간을 분절하고 구획하려 하지만 언제나 실패하는 것처럼 끝내 이루어질 수 없는 시인의 바람이라 더욱 슬프다.

 

 

불과 손을 던진다

친애하는 너에게

 

너는 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타들어간다

 

뜨겁지 미치겠지

 

뜨그덕 뜨그덕 얼굴 속을 뛰어다니는 손과

이름이 길어지는 귀

 

점점 어두워지는 귀와

 

앵두맛 캔디를 깨물고 미쳐본 개가

오후 어딘가 있을 것

 

오늘 우리는 달고 덥다

 

과즙에는 상쾌한 신맛이 있고

사랑에 빠진 자는 개 이름을 바꾼다

 

달고 더운 귀야 야 야

 

앵두가 좁아진다

 

슬프다 그런 얼굴 하지 마

 

장수진, 「달고 더운 귀」, 《문학과사회》, 2015년 여름호

 

이 시인에게서는 슬픔의 다른 이름을 본다. 아니, 슬픔 직전이라고 할까. ‘너’와 ‘나’의 관계는 뜨겁다. 그것은 긍정과 부정의 의미를 모두 담고 있는 것 같아서 달지만 위태롭다. ‘너’에게 “불과 손을” 던져 뜨거운 얼굴 속을 손으로 휘젓는 장면은 강렬한 이미지로 독자를 끌어들이고 “너는 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타들어간다”라는 구절에서도 그 시적 긴장감은 그대로 유지된다. 여기에서 시의 핵심이라 할 수 있을 “귀”가 등장하는데 “이름이 길어”진다는 표현과 “점점 어두워”진다는 표현이 썩 어울리지는 않는 것 같다. 그 이미지는 결국 “달고 더운 귀”로 이어지는데 그 과정에서 많은 것이 생략되어 있어 좀처럼 갈피를 잡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앵두, 개 등의 이미지가 연속성을 가지기는 하는데, 그것이 파편적이라는 느낌이 강하다. 그러나 이 시에서 “달고 더운”이라는 구절은 슬픔의 직전에서 마주치는 권태를 표현한 것 같아 인상적이다. 결국 “슬프다 그런 얼굴 하지 마”라는 마지막 구절에 다다르면 앞선 표현들이 모두 관계에 균열을 암시하는 ‘너’의 얼굴을 나타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오늘 우리는 달고 덥”지만 언제고 슬픔은 찾아올 것이고, 그때 시인은 또 다른 “귀”를 만나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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