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에 읽은 시

나와 너

(이 글은 월간 <심상> 9월호에 실려 있습니다)

 

좋은 시인은 두툼한 사유와 광대한 상상력을 바탕으로 세계의 곳곳을 투시하는 사람이지만 무엇보다도 존재의 근원을 더듬어 가는 탐색자이다. 어떤 시인은 끊임없이 ‘존재의 존재’를 찾아 나서면서 그 집요함과 깊은 응시로 독자를 끝내 설득해내는데, 여기 소개하는 민구가 그런 시인이다. 그는 『배가 산으로 간다』(문학동네, 2014)라는 첫 시집을 통해 자신만의 시 세계를 열어 젖힌 바 있는데 근작에 이르러 그 천착이 더욱 깊어진 듯하다. 이 시인의 사전을 열면 ‘나’, ‘너’, ‘탄생’, ‘죽음’ 등의 말에 무수한 설명이 달려 있을 것이다. 그것은 곧 존재에 대해서, 특히 생과 사로 이루어진 인간의 생에 관해서 이 시인이 누구보다 성실하고 부지런히 사유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일 테다. 시인은 여기 소개하는 세 편의 시를 연달아 실으면서 시작 메모에 “초라하다”라고 썼는데, 그것이 아마 지금 이 시인이 도달한 사유의 결과가 아닌가 싶다.

 

 

나는 숨을 거두었다

 

내가 죽은 걸 의심하는 이가

아무도 없다는 게 마음에 든다.

 

신체는 훼손되지 않았지만

곧 장기의 일부가 빠져나갔다.

 

누군가의 눈이 되고

심장이 되고

 

누군가의……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나는 볼 수 있었다.

 

숨을 쉬었으며

누군가에게 한 번 더 이식을 해도 될 것 같다.

 

민구, 「Passport」, 《시인수첩》, 2015년 가을호

 

이 시인은 지난 계절에 ‘탄생’에 관해 인상적인 시를 선보인 일이 있는데, 이번에 발표한 시편들 역시 그 연장선상에 있는 것 같다. “나는 숨을 거두었다”로 시작하는 이 시는 의심의 여지없이 ‘죽음’을 다루는 것으로 보인다. ‘나’는 누구도 의심하지 않는 죽음, 그러니까 비로소 완벽한 멸(滅)이 되기를 ‘바라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쉽게 달성되지 않는다. “신체”가 “훼손되지 않”은 채 맞이한 죽음이란 결국 “누군가의 눈이 되고/ 심장이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시인의 전위적인 상상력, 즉 죽음에 이른 육체를 타인의 것으로 전이시키는 과정을 지나 “나는 볼 수 있었다”라는 구절에 다다랐을 때, 우리는 어떤 의아함을 느끼게 된다. 죽은 육체를 가진, 장기의 일부가 빠져나간 존재가 ‘나’인가, 아니면 자신의 육체가 옮아가 “볼 수 있”고, “숨을 쉬”고 있는 존재가 ‘나’인 것일까. 시인은 “누군가에게 한 번 더 이식을 해도 될 것 같다”라는 구절로 시를 끝맺는데, 이것은 곧 ‘나’와 ‘너’의 경계를 무화시키는 시인의 전략이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죽음에 당도한 어떤 존재가 다시 다른 존재가 되어서 끝내 모두가 ‘나’가 되는 세계를 상상하면, 그제야 제목인 “Passport”가 눈에 들어온다. 시인은 생과 사를 오가며 존재들 간의 ‘통행’을 언어로 가늠해 보고 있는 것이다.

 

 

그래,

쑥스럽지만

 

나는 조금 친해지기로 했다.

 

나는 네게

조금 더 다가가기로 했다.

 

실컷 보고 나서 인사해도

늦지 않겠지.

 

오늘 밤 파티에

그를 초대하는 건 어떨까.

 

샴페인을 한 병 까고

서로의 잔에 따르고

 

분위기가 무르익어 당신이 술에 취하면

 

본 적 있지 않아요? 악수를 청해야지.

 

우리는 자기 손을 맞잡고 기도하는 심정으로

 

와인글라스에 묻은 시끄러운 입술을 닦고서 침대로 가자.

 

윗옷을 벗기고 가슴 아래

내 심장을 만진다.

 

동이 틀 때까지 성호를 긋는다.

 

민구, 「이식」, 《시인수첩》, 2015년 가을호

 

이어지는 시의 제목인 “이식”인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 모른다. 앞선 작품의 시적 정황을 상기한다면 두 ‘나’가 만나는 장면이야말로 “이식”의 순간이기 때문이다. “쑥스럽지만” ‘나’와 조금 친해지기로 결심한 ‘나’는 누구일까. 여기에 이르면 ‘나’와 ‘너’의 구분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나’는 여러 개의 ‘나’로 이루어져 있고, 또 ‘너’와 같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저 하나의 인간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친해지고, 다가가고, 인사하고, 악수를 청해야 한다. 그것이 인간의 숙명이라고 시인은 생각하는 듯하다. 같은 존재이지만 그 같음을 끊임없이 확인해야만 하는 굴레 속에 우리는 갇혀 있다. 이 같음을 가장 극적으로, 직접적으로 인식하는 방법이 탄생과 죽음일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태어나고, 죽는다. 그리고 그것을 익숙해질 정도로 ‘서로’ 지켜본다. 아마도 핵심은 ‘서로’라는 말에 있을 것이다. 내가 바라보는 것은 너이지만 결국 ‘너’가 ‘나’라는 인식이 그것이다. “우리는 자기 손을 맞잡고 기도하는 심정으로”라는 구절이 이를 잘 보여준다. 맞잡은 손은 ‘나’의 것이 아니라 ‘너’의 것이기도 하다. 침대로 향한 그들은 “윗옷을 벗기고 가슴 아래 / 내 심장을 만진다.” 마치 “성호를 긋는” 행위처럼, 결국 만지는 것이 나의 심장이라는 이 구절은 끝없이 ‘우리’이기를 희구하지만 끝내 ‘나’일 수밖에 없는, 성(性/聖)스러운 장면으로 읽혀서 인상적이다.

 

 

나라는 말, 어색하지

 

내가 나나나 발음하면

마른 묵밭으로

빗방울이 세 번

똑똑똑 떨어지는

 

물 한 잔 그리고 한 스푼의 올리브유

태양과 달, 천천히 비껴가는

빨강 검정 수은구슬

 

우리는 만난다

하지만 어색하지

우리는 누군지 모르는 사이

 

우리는 동시에 태어났다

너는 밖으로 가고 나는 여자의 배 속에 남아서

처음 눈을 뜬 당신을 보며 까르르 웃는다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를 때

나는 아주 조그만 씨앗

 

기진맥진해진 여자의 소변에 섞여

크레바스 밑으로 추락한다

 

희번덕거리는 광물이

무심하게 빛나는 땅속,

빛에게 손 벌리지 않는 여기는 지하세계

 

민구, 「入棺」, 《시인수첩》, 2015년 가을호

 

여전히 앞선 시들과 맞닿아 있는 작품이다. “입관”이라는 제목은 당연히 죽음을 연상시키지만 주지하듯 이 시인에게 그것은 탄생과 같은 의미를 가진다. 시인은 이 시에서 예의 그 독특한 상상력을 발휘하는데, “우리는 동시에 태어났다 / 너는 밖으로 가고 나는 여자의 배 속에 남아서 / 처음 눈을 뜬 당신을 보며 까르르 웃는다”라는 구절이 그렇다. 시인은 한 인간이 탄생하는 동시에 한 인간의 죽음을 보여준다. 아니 그것은 인간이라고 부르기는 어렵고 차라리 어떤 존재라고 해야 할 것이다. 탄생과 동시에 죽음을 안고 있는 존재에게 “나라는 말”은 당연히 “어색하”다. 그가 ‘너’를 만나는 것은 죽음을 인식한 뒤의 일이다. “아주 조그만 씨앗”인 ‘나’는 어쩌면 인간 이전의 존재일지도 모르겠다. “기진맥진해진 여자의 소변에 섞여 / 크레바스 밑으로 추락한다”는 구절로 추측건대 유산이나 사산의 상황을 모티브로 삼은 듯도 하다. 어찌 되었든 중요한 것은 그 죽음이 빛이 들지 않는 “지하세계”에 도달한다는 것이고, 그것은 관에 누워 “땅속”에 묻히는 일과 다르지 않다. 무수히 죽어 있는 ‘나’를 만날 때, 그제야 우리는 ‘나’를 자각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 시인에게 그 깨달음은 존재의 ‘초라함’으로 귀결되는데, 이 때의 초라함이란 부정적이거나 비극적인 의미가 아니며 외로움이나 쓸쓸함과도 달라서 이 시인 특유의 정서로 자리매김하기에 더없이 적절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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