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에 읽은 시

여름, 노인, 해변 그리고 시의 첫

(이 글은 월간 <심상> 10월호에 실려 있습니다)

 

시를 골라내기 위해 근작들을 일별하다 보면 마치 기획된 것처럼 묘한 공통점을 가진 작품들이 발견된다. 그 작품들을 모아 두고 찬찬히 살피면 여간 흥미로운 것이 아니다. 각각의 시들이 보여주는 정서적·감각적 차이도 그렇지만 미묘하게 감지되는 어떤 유사성이 특히 그렇다. 가을에 발표되는 시들 중 꽤 많은 작품들이 ‘여름’을 그리고 있는데, 이처럼 생산의 계절과 수용의 계절이 다른 상황은 사실 일반적인 것이지만 그 어긋남에서 오는 아련함과 애틋함은 항상 다르게 다가온다. 누구에게나 지나온 시간들은 마음 한 구석에 조용히 자리잡고 잊혀진 듯 숨겨져 있다가 어느 순간에, 그러니까 그야말로 시적인 상태에서 갑자기 솟아 오른다. 그리고 그것은 대체로 시의 첫 구절에서 온다.

 

 

늙은 아내를 치매 요양원으로 보내고

발자국을 깊이 묻으며 노인은 노상에서 울고 있다

발자국에 오목하게 고인 것은

여름을 먹어치우고

잠이 든 초록

 

가지 못하는 길은

사레가 들려

노인의 목덜미를 잡고 있다

 

내가 너를 밀어내었으냐,

아니면 니가 나를 집어삼켰느냐

아무도 모르게 스윽 나가서

저렇게 설설 끓고 있는 설탕길을 걷느냐

 

노인은 알 수 없는 나날들 속에서는

늙은 아내가 널려 있는 빨랫줄 위로 눈이 내린다고 했다

당신의 해골 위에 걸어둔 순금의 눈들이

휘날리는 나라에서

 

이렇게 사라지는 것이 이상하지만은 않아서

오래된 신발을 벗으며

여름 속 밝은 어둠은 오한을 내며 운다

 

허수경, 「설탕길」, 《문학과사회》, 2015년 가을호

 

 

허수경의 시는 늘 폐부를 찌르는 듯한 예리함과 아찔함을 선사하는데, 늙은 아내를 치매 요양원으로 보낸 노인의 모습을 그려낸 이 시는 특히 그러하다. “늙은 아내를 치매 요양원으로 보내고 / 발자국을 깊이 묻으며 노인은 노상에서 울고 있다”로 시작하는 첫 구절은 간결하면서도 적확하게 시적 상황을 보여주면서 단숨에 독자를 장악한다. 뒤이어 그 “발자국” 속에 “여름을 먹어치우고 잠이 든 초록”이 “오목하게” 고여 있다는 표현 역시 절묘하게 노인의 감정과 결합한다. “노인의 목덜미를 잡고 있다”는 다음 연의 상황은 이 노인이 한 모종의 결심을 암시하는데, 그것은 곧 “설탕길”이라는 이미지로 이어진다. 설탕길은 여러모로 시적 상상력을 자극하는 좋은 소재라 생각되는데, 여기서는 아내가 떠나간 ‘달콤한’ 길로 여겨보고 싶다. 치매라는 질병은 주변을 지옥으로 만들지만 당사자에게는 일종의 천국행이 아니던가. 물론 노인에게야 설탕길은 “설설 끓고 있는”, 발이 푹푹 빠지는 “가지 못하는 길”일 것이다. 그 설탕길의 세계, 그러니까 이 노인에게 이제 아내와의 세계는 “알 수 없는 나날들”이며 “당신의 해골 위에 걸어둔 순금의 눈들이 / 휘날리는 나라”이다. 따라서 “이렇게 사라지는 것이 이상하지만은 않”고, 노인은 마지막을 선택한다. “여름 속 밝은 어둠은 오한을 내며 운다”로 끝나는 마지막 연은 말할 수 없이 슬프고 아름답다.

 

 

여보, 우리에게도 그런 시간이 올까 한여름으로 치닫는 해안 철길을 달리는 기차에 앉아 두 손을 배 위에 올려놓고 차창 너머 튜브를 타고 깔깔거리는 연인들을 바라보는 노부부의 고요한 시간들

 

기차가 지나갈 때마다 알몸의 아이들은 손을 흔들어대고 이국의 파도가 해변의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지고 있어 언젠가는 우리도 모래의 얼굴처럼 허물어지겠지 눈 깜짝할 사이 얼굴선이 흘러내리고 침침해진 눈으로 서로의 얼굴을 더듬거리다 스르륵 두 눈을 감겨주겠지

 

여보, 그때쯤 우린 얼굴을 할퀴고 달아난 사람들을 용서할 수 있을까 왼쪽 뺨을 맞으면 오른쪽 뺨도 내밀 수 있을까 시퍼렇게 질려 뒷걸음질 쳤던 가로수의 상기된 표정을 이해할 수 있을까 과자 부스러기가 묻은 아내의 주름진 입가를 털어주는 한쪽 다리가 없는 저 은발의 노인처럼

 

한세정, 「해변의 엽서」, 《현대문학》, 2015년 10월호

 

 

“노부부의 고요한 시간들”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는 이 시는 “해변의 엽서”라는 제목이 풍부하게 읽힐 여지를 준다. 시적 화자는 엽서를 쓰고 있는 것일까, 엽서를 바라보고 있는 것일까, 혹은 자신이 엽서의 인물일까. 이런 상념 속에 시를 읽어 내려가다 보면 “한여름”의 해변 풍경이 자연스럽게 눈앞에 펼쳐진다. 마치 액자소설의 구성처럼, “우리”에게서 “해안 철길을 달리는 기차”의 “노부부”에게로, 다시 그 창밖의 “깔깔거리는 연인들”로 시선이 옮겨가는데, 이것이 순식간에 시적 상황을 형성해 어렵지 않게 시로 접어들게 만든다. 이 시인은 익숙한 이미지들을 수식의 디테일을 통해 신선하게 살리는 능력을 갖춘 듯한데(마치 시조를 연상케 하는 형식도 흥미롭다는 생각이다), 이를테면 그냥 창 밖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두 손을 배 위에 올려놓고” 바라본다고 표현한 것, “과자 부스러기가 묻은 아내의 주름진 입가를 털어주는” 노인이 “한쪽 다리가 없는” “은발”이라는 구절들이 그렇다. 그 디테일들이 자칫 뻔해 보일 수 있는 시적 상황이나 정조들을 풍부하고 새롭게 만드는 원동력일 것이다. 그 덕분에 이 시의 “용서”라는 단어가 여운을 많이 남긴다.

 

 

해변에 버려진 것 중엔 내가 가장 쓸모 있었다

버려진 사람들이 잃은 것을 대신해 다시

버려진 사람을 줍는 세계에서

우리의 수도는 어느 쪽이었을까

한 뼘의 파라솔이 그늘을 짓고 우리는

통째로 두고 간 유실물이 되어

하나의 관광지가 된다

 

*

 

파도의 디저트가 되네 하나밖에 모르는 맛으로 사탕처럼 둥글게 앉아 녹아가는 연인들

철썩이는 파도가 핥기 시작하네

발가락부터 녹으며 조금씩 둘레는 잃어가는 사랑이여

사랑한다는 말을 남발하던 연인들이 전투적으로 질투하고 비로소 세계는 달콤해지고 온화해지네

 

*

 

해변이라는 말을 좋아해

물에 젖는 건 싫어하지만 햇볕이 남아 있는 단어들은 아껴 먹으려고 남겨둔 사탕 같은 것

 

*

 

내가 먹어본 사탕 중엔 네가 제일 별로였어

 

너처럼이라는 직유가 가진

설탕과 소금 사이의 결정체

 

*

 

네 말에 끈적끈적해진 나는

입안의 상처들을 혀로 만지작거리며 피가 달다고 생각했다 달콤함을 모르고 조금씩 사라져간다

 

*

 

바다가 범람하는 세계에서

너는 고작

오리발이었어

 

*

 

옷소매의 끝엔 해변이 있어

서툰 세수와 훔친 눈물로 적셔놓은

사탕이 녹을 때까지만 출렁이는 해변에서 나는

말라가지 않는 헤엄을 배워

 

안간힘을 다해서

서윤후, 「사탕과 해변의 맛」, 《문예중앙》, 2015년 가을호

 

이 작품 역시 첫 연을 톺아보지 않을 수 없다. “해변에 버려진 것”, “쓸모”, “잃은 것”, “줍는 세계”, “수도”, “파라솔”, “유실물”, “관광지” 등의 시어들이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결국 “우리”의 문제로 귀결되는 도입부가 인상적이다. 해변이라는 공간은 아마도 “연인”을 상상하기에 가장 적절한 곳 중 하나가 아닐까. 연인들의 ‘달콤함’이라는 상투적인 표현이 “파도의 디저트”가 되어 녹아가는 이미지로 치환되면서 그것이 세계의 온화함으로 이어지는 시적 상상력이 독특하다. 각 연에서 드러나는 시적 화자의 어조도 미묘하게 달라 흥미로운데, 결국은 “내가 먹어본 사탕 중엔 네가 제일 별로였어”, “너는 고작 / 오리발이었어”의 상태에 도달한 것 같다. 매 연, 매 구절이 적재적소에 신선하면서도 정확하게 배치되어 있어 일일이 언급할 필요가 없어 보인다. 이 시를 읽으면 지구가 하나의 사탕처럼 느껴지고 바다는 그 사탕을 꾸준히 핥아먹는 혀 같다. 마지막 연에서 시인이 다시 해변을 소매의 끝으로 가져오고, “말라가지 않는 헤엄”을 “안간힘을 다해서” 배운다는 표현으로 마무리 할 때, 이처럼 자유자재로 시적 이미지들을 움직일 수 있는 시인임을 새삼 곱씹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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