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경, 『게스트 하우스』, 실천문학, 2015

x9788939207424

소설의 시간, 시간의 소설

 

소설에 관해서라면 우리는 여러 관점에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이야기를 움직이는 어떤 사람에 대해 말할 수도 있고, 그 사람이 처한 어떤 상황이나 사건에 대해서도 함께 고민할 수 있을 것이며, 그 이야기 자체에 관해서도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한 편의 소설을 읽고 대화를 나눈다는 것은 그 소설 속의 시간을 함께 보냈기 때문에 가능해지는 것이다. 삶에서의 소중한 추억 한 가지를 다른 사람에게 그저 전달하는 일과 그 추억을 함께 경험한 사람과 그때의 이야기를 공유하는 일은 완전히 다른 차원의 소통임을, 일일이 언급하지 않아도 어떤 차이가 있는지, 우리는 모두 단박에 알 수 있다. 소설을 같이 읽는다는 것은 바로 이런 방식의 경험을 의미한다. 이러한 소통은 서로의 기억을 함께 채워주면서 각자의 경험을 더 풍부하게 만들고, 상대방과 같이 느끼면서 또 다르게 생각하기도 한다는 것을 흥미롭게 알게 되는 과정이다. 소설을 읽는 가장 큰 즐거움이면서도 결코 쉽지 않은 일 중 하나가 그렇게 독후(讀後)의 시간을 함께 채워나가는 경험일 것이다.

아마도 우리는 진보경의 소설들을 통과해 여기에 도달했을 것이다. 나는 이곳에 함께 있는 사람이 대단히 많을 것이라 생각지도 않고, 작품의 뒤에 어색하게 붙어 있는 이 글에서 우리가 꿈꾸는 소설적 소통이 쉬이 가능하리라 여기지도 않는다. 다만 같은 시간을 통과한 우리가 이곳에서 소박하게나마 함께 대화를 나누고, 같으면서 다른 서로의 이야기들을 떠올리는 경험이 얼마나 소중한지에 관해서는 일종의 믿음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 거창한 말로 포장할 것 없이 이 소설들의 시간에 관해 몇 마디 나눌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 좋은 일이 아닐까 생각한다.

여기 세 가지의 시간이 있다. 2009년에 등단해 6년 간 급하지도, 느긋하지도 않게 꾸준히 작품을 써온 진보경의 시간과 그 작품들을 우리가 함께 읽어낸 시간, 그리고 작품 속의 인물들이 살아낸 시간들이 그것이다. 나는 이 세 가지 시간들을 모두 이야기하고 싶지만, 그리고 이 작가가 보냈을 6년의 시간이 가장 궁금하지만, 그것은 알아낼 재간이 없기 때문에(그래서 “작가의 말”이 필요한 게 아닐까 생각한다) 남은 두 가지 시간에 관해 천천히 톺아보며 대화를 시작해보려 한다.

 

 

과거: 두 개로 흐르는 시간

 

이 소설집에 실린 아홉 편의 작품 중 어떤 작품을 가장 인상 깊게 읽었을지 잘 모르겠다. 다만 몇 가지의 베스트를 꼽는다면 「금성의 시간」은 들어가지 않을까 조심스레 짐작해본다. 다시 언급하건대 이 소설집의 테마를 굳이 내세워야 한다면 그것은 ‘시간’일 것이고, 그 시간에 대해, 특히 지나가버린 어떤 순간의 시간에 대해 끈질기게 이야기하는 작품이 「금성의 시간」이기 때문이다.

어린 동생을 잃어버린 ‘나’의 사연은 그 자체로는 상실의 역사이다. “잃어버린 동생, 유년의 골목, 훼손된 간판, 따뜻한 가족”(p) 등은 결코 “복원”될 수 없는 것들이며, 그 시간 이전의 ‘나’로 돌아가기란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 시간은, 동생을 제대로 돌보지 못하고 고무줄 놀이에 빠져서 친구를 뒤쫓아 가던 그 순간은, 언제나 또렷이 남아 있다. 그때 어떤 아이와 짝이 되었는지, 무슨 노래를 불렀었는지, 동생은 무얼 하고 있었는지, 어떤 단계에서 고무줄 넘기에 실패했는지, ‘나’에게는 생생하다. ‘나’는 동생을 잃고, 시간을 얻었다. 이 간단한 문장은 엄청난 고통을 수반한다. 무언가를 상실할 때, 우리는 상실의 기억이나 시간까지 상실하지 못한다. 오히려 그 시간을 획득하고, 늘 그 시간에 함께 머문다. 기억은 점차 선명해지고, 현재가 아니라 과거를 살아가게 된다. ‘나’뿐만이 아니라 그 시간에 연루된 사람들 모두가 그렇다. 아버지는 동생이 간판의 글자를 이미지로 기억하고 있을 테니 가게가 문을 닫아도 간판만은 원래의 형태 그대로 두어야 한다며 아파트 벽에 간판을 걸어 놓는다. 어머니는 그 곁에서 모든 것들을 묵묵히 감당하고 있으며, ‘나’의 첫사랑이었던 준 역시 동생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나’와 정상적인 관계를 유지하지 못한다. 이처럼 단 한 순간의 상실은 역설적이게도 이들에게 영원한 시간을 갖게 한다.

 

깜깜한 하늘을 올려다본다.

동쪽 하늘에 가장 밝게 빛나는 샛별. 그곳에서의 하루는 1년과도 비슷하다고 했다. 두터운 침묵에 휩싸여 정지한 듯 느리게 흐르는 시간. 어쩌면 아버지에게는 동주를 잃은 시간이 고작 엊그제처럼 느껴졌을지 모른다. 아마도 금성의 시간이 아니었다면 견디기 힘들었을 아버지의 시간.

무언가를 상실한 우리들에게 지구의 시간은 너무 빠르다.

 

지구의 시간이 너무 빠른 것은 아이를 잃은 이 가족들이 늘 두 개의 시간을 동시에 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에게 시간은 항상 이중으로 흐르고, 과거에 잠깐 머무르면 현재는 훌쩍 지나있다. “금성양복점”이라는 상호를 가진 아버지의 가게가 재개발로 인해 사라지고 준에 의해 간판이 훼손되는 장면들은 기억을 잊게 하려는 외부의 폭력이자, 기억을 지워버리고 싶은 내부의 저항이다. 그러한 상실에의 시도에 무너지지 않고 끝내 이들을 붙잡아 둔 것은 “금성”이라는 상징일 것이다. 현재도 과거도 아닌, 완전히 다르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동쪽 하늘의 저 별과 같은 곳에 동생이 살고 있을 거라는 믿음(東住)이 그 속에 담겨 있다. 작가는 이 가족의 고통스러운 시간들을 평범하게 그리지 않는다. 아이를 잃은 가족이 행방을 찾기 위해 얼마나 애를 태웠는지, 동생은 어디로 간 것인지 전혀 말하지 않으면서, 그저 이들이 살고 있는 시간을 천천히 보여줄 뿐이다.

이처럼 진보경의 작품들은 아주 특별한 이야기를 내세우지 않는다. 개개의 작품에 담긴 문제의식은 가볍게 여길 것들이 아니지만, 이야기의 사건과 소재는 오히려 너무도 익숙한 것들이다. 그런데 그 익숙함이 진부함이나 평범함, 혹은 감상적인 차원으로 떨어지지 않는 것은 마땅히 서술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뻔한 문장들이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것은 어떤 결핍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우리는 소설의 시간을 통과한 후, 다시 그 시간들을 되짚을 때 비로소 그 빈자리를 목격하게 된다. 이를테면 「맹그로브」에서 태국 출신의 엄마와 한국에서 혼혈로 태어난 딸이 겪었을 무수한 사연들은 별로 이야기되지 않는다. 다만 바다 위를 떠다니다가 해안가에 뿌리를 내려 싹을 틔우는, 그리고 다시 줄기에서 아기 나무가 바다로 떨어져 항해를 시작하는 맹그로브라는 식물에 그들의 사연을 의탁한다. 이를 통해 그들은 자신들의 뿌리에 다가간다. 그것은 주인 대신 일을 봐주면서 기거하는 모텔의 좁은 카운터 방에서 시작되는 것이지만 에메랄드 빛 바닷가에 숲이 무성한 엄마의 고향에까지 다다른다. 근원의 기억은 이들의 삶을 옥죄는 족쇄로 작용하면서도 현재의 시간을 견디게 하는 유일한 힘이기도 하다. 이처럼 과거의 시간은 언제나 양가적으로 작동한다. 「러닝타임」에서 다니던 회사가 파산에 이르고 남자친구와는 헤어져버린 상태에서 낙태수술을 받으러 간 ‘나’의 삶은 이미 끝자락에 와 있는 듯하다. 그러나 그녀는 “러닝타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말한다. 파국을 향해 치닫던 서사가 돌연 이런 방식으로 마무리될 때 우리는 허둥대면서 이야기를 다시 복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면 아마 이 장면을 다시 읽게 될 것이다.

 

이렇게 죽는 거구나. 내 몸은 점점 잔잔해졌다. 부유하던 물질들이 가라앉으며 눈앞에 말개졌다. 수면 아래 햇빛이 일렁이고 있었다. 식어가는 내 몸을 따뜻하게 감싸주기라도 하듯이. 이상하게 마음이 평온해졌다. 살고 싶다는 생각도 억울하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이제 곧 끝이다. 나는 남은 시간이 얼마정도일까 가늠해보았다. 이십 초, 아니 십 초…… 의식이 몽롱해지는 와중에 아득하게나마 떠오른 생각이었다. 앞으로 내게 남은 시간은 기껏해야 십여 초 정도일 거라는, 그만큼의 시간이 지나고 나면 나는 아주 편안해질 거라는 생각이. 일, 이, 삼…… 스르르, 눈이 감겼다. 사, 오, 육…… 몸과 함께 의식마저 저 아래 깜깜한 곳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칠, 팔, 구……

 

죽음 직전을 경험한 유년의 기억과 생명을 없애기 위해 마취에 들어가는 소설의 마지막 장면은 이렇게 겹쳐진다. 열을 세면 끝나는, 엄연히 시한이 존재하는 인간의 삶은 결국 죽음을 향해 가는 카운트다운이다. 시간이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조건임은 이 때문이다. 우리는 누구도 현재를 살지는 못한다. 의식하는 순간 모든 시간은 과거가 되어버린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지금 여기에 분명히 존재하고 있다. 따라서 인간에게 시간은 언제나 두 개로 흐른다. 진보경은 그것을 이야기의 차원에서 풀어낼 줄 안다. 또한 그렇게 꼬인 시간의 매듭은 결코 풀 수 없다는 것도 이 작가는 알고 있는 듯하다.

 

 

현재: 지금, 떠나는 사람들

 

어떤 기억에 사로잡혀 끊임없이 그 속에서 살아야 하는 인물이 있었다면, 새로운 시간을 향해 떠나는 사람들도 있다. 지금 여기의 공간에서 힘겹게 내몰린 이들의 이동에는 공간이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들이 선택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떠나야만 하는, 떠날 수밖에 없는 이들에게는 삶이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인식 자체만이 남아 있다. 「세 번째 토끼」의 모녀는 마치 “맹그로브”처럼 떠다닌다. 회사 부도로 인해 엄청난 빚을 진 아빠는 쫓기는 신세가 되어 결국 감옥에 갔고, 모녀는 사람들을 피해 도망 다닌다. 모녀는 서로에게 다른 일을 한다고 둘러대지만 모두 몸을 판다. 합법적인 수입은 불가능하고, 막다른 골목에 몰린 상황이니 도리가 없었을 테다. 이 모녀에게 보금자리를 내어준 또 다른 모녀 역시 비슷한 상황에 처해 있다. 남성의 부재가 곧바로 여성의 타락으로 이어지는 서사는 조금 문제적인 것으로 보이지만, 이 이야기의 핵심인 열여섯의 ‘나’와 일곱 살의 ‘다은’이 이루는 묘한 대비로 바로 접근해 보자.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엔 계수나무 한 나무 토끼 세 마리.”

“한 마리라니까.”

“세 마리야.”

“누가 그래?”

“한 마리는 지져 먹고 한 마리는 볶아 먹고.”

나는 걸음을 멈추고 서서 아이를 돌려세웠다. 내 손을 뿌리친 다은이가 마지막 소설을 부르며 앞으로 뛰어갔다.

“한 마리는 도망간다. 지옥의 나라로.”

 

대학생이라고 속이고 남자를 상대하는 ‘나’의 이름은 그곳에서 “엔젤”이다. 아빠와 함께 본 마지막 영화에서 웅장하게 등장한 폭포의 실제 이름이 “엔젤”인 것을 알고 마음속에 담아 두었던 이름이다. 그러나 ‘나’가 “엔젤”이라고 불리는 곳은, 스스로 “나는 엔젤”이라고 끊임없이 각인시켜야 하는 곳은 “지옥”이다. 천진하게 지옥의 나라로 도망가는 토끼 노래를 부르는 다은의 모습을 보며 ‘나’는 다은이 보내게 될 시간에 관해 생각했는지 모른다. 같은 아파트 단지에서도 임대주택동이라는 이유로 철저하게 외면 받는 그 삶에 아이가 눈뜨기 시작할까봐, 자신도 여기에서 또 더 “나가기 시작”하는 게 아닐까 하는, 그 무시무시한 예감에 말이다.

「게스트하우스」의 찬은 신도시의 어학원에서 해고당하고, 여자친구인 혜나에게 버림받은 채로 남쪽의 어떤 나라에 자리한 게스트하우스로 떠나왔다. 게스트하우스라는 공간의 속성이 잘 보여주듯 그곳에는 떠나온 사람들과 떠나갈 사람들이 모여 있다. 그곳의 사장인 하영은 유일하게 머물러 있는 사람이다. 그녀가 연정을 나누는 유부남 정은 늘 잠깐 동안의 시간밖에 함께 보낼 수 없다. 찬은 하영에게 사랑을 느끼고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고백하지만, 여기는 게스트하우스라는 하영의 대답만 돌아온다. 중심에 많이 꽂힌다고 반드시 점수가 높지 않은 다트처럼, 하영은 굳이 정의 중심이 되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다. 찬이 견디지 못하는 것은 바로 그런 태도일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홀로 모든 괴로움을 감당하면서 상대방에게는 전혀 상처를 주지 않겠다는 자세는 늘 떠나는 사람이 아니라 떠남을 당해야만 하는 사람이 힘겹게 체득한 삶의 방식이지 않을까. 이 작품의 앞뒤에 액자식으로 짧게 배치된 정의 서사는 떠나갈 사람의 무심함을 보여주면서 결국 찬도 떠나게 될 사람임을, 그래서 찬의 마음을 지지했던 독자로 하여금 하영의 태도에 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한다.

「퍼즐」의 도현도 마찬가지로 떠나온 인물이다. 연이어 공무원 시험에 실패한 끝에 “본적지 응시 제도”를 이용해 시골 마을로 내려온 도현은 나이로부터, 실패로부터, 서울로부터, 그리고 연인으로부터 떠나온 사람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정착하지 못한 채 방황한다.

 

십오 년 전이면 대학 2학년 때였다. 마음만 먹으면 뭐든 될 수 있다고 믿었던 시기. 그래서 더 막막하고 두려웠던 시기. 서른이 넘는다는 것을 상상조차 할 수 없던 시기. 차라리 훌쩍 나이가 들어 마흔쯤 되었으면, 바랐던 시기. 이후 십오 년을 문제풀이와 시험만으로 보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던 그때. 십오 년, 누군가에겐 오직 기다림뿐이던 세월.

 

도현은 15년 전에 실종된 사람을 찾는다는 현수막을 통해, 범죄자로 살다가 끝내 “무연고시신”이 되어버린 한 사내를 통해, 자신을 돌아본다. 「게스트하우스」의 찬처럼, 도현 역시 떠남을 통해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런 인물들은 진보경의 작품들에서 ‘전형적’이라고도 할 수 있을 텐데, 모두가 어쩔 수 없이 떠나왔다는 점에서 특히 그렇다. 「세 번째 토끼」의 모녀는 말할 것도 없고, 「게스트하우스」의 찬은 직장 해고에 따른 동료의 우연한 제안으로, 「퍼즐」의 도현은 다급하고 불안한 마음에 붙잡은 마지막 기회로 그곳에 도달해 있다. 아울러 「색」에서 주인공 연선의 엄마는 늘 캐리어를 들고 떠나는 사람이고, “딱히 정의 내릴 수 없는 관계”에 있는 지후마저 결국 그녀를 떠나간다.

이렇게 절망과 좌절에 빠진 사람들에게도 시간은 무섭도록 정확하게 흘러간다. 떠난다는 것은 그 시간의 결을 변화시킬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지만 여전히 같은 방식으로 흐르는 시간 앞에서 체념을 습득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이 작품들이 절망과 희망, 비관과 낙관의 중간쯤에서 끝을 맺는 것은 그러한 시간의 속성 때문일 것이다.

 

 

미래: 예측 가능해서 막막한

 

그래서 이 인물들의 미래는 막막해 보인다. 문제는 해결되지 못하고, 계속 ‘돌아온다.’ 「호모 리터니즈」의 서사가 이를 잘 보여준다. “인생의 판을 새로 짜고 싶었”던 ‘나’에게 산 속에서 발견된 변사체는 완전히 새로운 시간을 가져다줄 듯 보였다. ‘나’는 신분증을 바꿔 자신을 죽이고, “정현수”라는 인생을 살기로 결심한다. 얼마간의 타인 행세 후 이 이야기가 결국 “다시 나로 돌아가 내 삶을 찾는 것이 방법일 거야. 나는 그저 나일 뿐이더라구.”(p)의 형태로 마무리 되었다면 그저 그런 작품으로만 남았을 것이다. 하지만 다시 신분증을 돌려놓기 위해 산을 찾았을 때, 제3의 신분증이 다시 꽂혀 있는 소설의 마지막 장면에서 작품의 의미는 비약적으로 상승한다. 누구의 시간을 살아가든 시간은 흐르고, ‘나’라는 인간은 얼마든지 대체될 수 있다는 인식이 강렬하게 제시되는 것이다.

 

무릎이 꺾이듯 나는 자리에 털썩 주저앉는다. 그의 지갑에 넣어두었던 내 신분증이 어디로 사라졌단 말인가. 정현수가 보관하고 있어야 마땅할 내 물건. 대체 누가 나와 똑같은 짓거리를 한 걸까. 여기 이렇게 얌전히 엎드려있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나는 거칠게 그를 뒤집어 가슴팍을 움켜 일으킨다.

손에 들린 파란 등산복 밑으로 우수수, 무언가 떨어져 내린다.

 

시간 앞에서는 어떤 삶도 실체를 가질 수 없음을 이 작품은 잘 보여준다. 큰 틀에서 보자면 인간의 삶이란 그저 계속 돌아오는 것일 뿐이다. 그것이 내가 아니고 다른 사람일 테지만, 결국 누군가가 죽고 또 누군가가 태어나며, 늘 “호모 리터니즈”만이 세계에 존재한다. 그러므로 그 세계에서 사라진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지독한 불면증을 앓고 있는 「그녀가 잠들 때까지」의 리나가 항상 “잠”을 갈구하는 모습은 이 세계에서 사라지고 싶다는 욕망의 반영이지만 그 욕망의 끝은 죽음이어서 끝내 실현되지 않는다.

인간에게 미래는 예측 가능하지만 막막하다. 그 막막함의 시간에 관해 이 작가는 어설픈 위로나 위무의 서사를 제공하지 않는다. 그저 해야 할 이야기를 묵묵히 밀고 나갈 뿐이다. 또한 이 소설들에는 위선도 위악도 없다. 모든 인물과 사건들은 놀랍도록 중립적이어서 일방적인 판단이 어렵다.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제 속도를 유지하는 이 작가의 소설은 그래서 그 자체로 시간을 닮아 있다. 그 시간성을 다시 소설로 돌렸을 때, 그러한 소설이 가질 수 있는 최대의 미덕은 ‘정직함’일 것이다. 그리고 그 정직함은 소설가에 대한 신뢰를 담보한다. 진보경의 작품들이 일견 쉽게 씌어진 듯 하면서도 읽고 나서 곧바로 책장을 덮지 못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답글 남기기

아래 항목을 채우거나 오른쪽 아이콘 중 하나를 클릭하여 로그 인 하세요:

WordPress.com 로고

WordPress.com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Google photo

Google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Twitter 사진

Twitter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Facebook 사진

Facebook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s에 연결하는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