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기만, 『발 달린 벌』(문학동네, 2015)

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9546394

발로 걷는 지독한 취미

(이 글은 계간 <문학동네> 2015년 겨울호에 실려 있습니다)

 

시인은 만들어지지 않고 태어난다. 그들은 세계를 거닐며 시를 쓴다. 목적은 없다. 언어로 그려내지 않으면 견디지 못할 뿐이다. 어떤 시인에게서는 새로운 감각이 발견되고, 또 어떤 시인에게서는 분명한 방향이 느껴지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평범한 시인들은 그저 쓴다. ‘평범’하다고 했고, ‘그저’ 쓴다고 했지만 쉬운 일은 아니다. 특출한 시인들은 성공하거나 실패한다. 평범한 시인들은 성공하거나 실패하지 않는다. 다시 강조하건대 그들은 끊임없이, 계속해서, 끝까지 쓴다.

시인의 실패는 못쓰는 것이 아니라 쓰지 못하는 것에서 온다. 그러므로 시인은 우선 지치지 않아야 한다. 방법은 두 가지인데, 자신의 삶 자체를 시로 만들어 생활과 예술의 간극을 없애버리거나 부지런히 사방을 두리번거리면서 시를 발견해내는 것뿐이다. 어떤 방법이 더 쉽다고 혹은 효과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분명한 것은 권기만이 후자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그에게는 오로지 시만이 세계로부터 자신을 버티게 해준다는 식의 절박함이나 비장함이 없다. 그렇다고 시적인 어떤 전통을 부정하면서 역설적으로 시의 무용(無用)적 유용(有用)함을 한껏 드러내는 전위적 발랄함이 있는 것도 아니다. 권기만에게서 발견되는 것은 시를 쓰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일종의 강박이다. 그것은 자신이 시인이라는 자각이나 현실에 관한 통렬한 인식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약간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그에게는 시가 ‘지독한 취미’이다.

나는 최근에 읽은 시집 중에 ‘나는 시인이다’ 혹은 ‘나는 시를 쓴다’는 관념을 이토록 철저하게 배제하는 사례를 거의 보지 못했는데, 이 시인이 지독하게 쫓아다니는 것은 세계의 풍경이다. 그것은 자신의 얼굴이기도 하고 꽃이거나 나무이기도 하며 사람이나 동물, 어떤 장소이기도 하다. 그는 언어를 앞세워 풍경을 거기에 종속시키지 않고 풍경에 가 닿아 언어를 기다리며 만지작거리는 시인이다. 동시에 그 앞에서 어쩔 줄 몰라하며 살짝 조급하게 언어를 뱉어내는 시인이다. 그러므로 그는 “그들을 따라가느라 / 내 언어의 발끝은 부어 있다”(‘시인의 말’, 5쪽)고 말한다. “벌에게는 날개가 발”인 것처럼, 그곳이 허공이든 지상이든 “생의 몸짓”은 “질기게 걸어야 하는 것”이라고 시인은 생각한다.(「발」, 60쪽) 이때 “발”이라는 시어는 이 시집을 관통하는 핵심적인 이미지인데, 시인은 정말이지 “질기게” 걷는다. 자신이 거주하는 이십오층 아파트라든가(「휴일 오후 아파트 놀이터에 쌓인」, 46쪽) 근무지인 “공장 직판 가구마을”까지 이어지는 간판들의 풍경(「광고로 깨어나는 아침」, 66쪽)부터 시작해 “주남 저수지”, “고란사”, “황룡사”, “소래포구”, “욕지도”, “7번국도”까지 그의 발은 쉬지 않는다. 흥미로운 것은 시인의 눈길이 끝내 오래 머무는 곳은 “발이 아니라 몸”(「바이칼 1」, 78쪽)을 원하는, “지표상에 있는 담수의 1/5을 수용하는 아라사와 중원 대륙에 걸쳐 있는 세계 최대의 호수” 바이칼이라는 점이다(「바이칼 2」, 79면). 시인은 그곳에서 단순히 ‘당도’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한, 몸을 던지지 않으면 안 되는 어떤 거대함을 본다. 그리고 시인에게 그것은 ‘어머니’로 표상되는 위대한 시원의 모성을 떠올리게 한다. 시가 그런 ‘깊이’에는 결코 도달할 수 없음을, 시인이란 그저 묵묵히 세계를 걸어다니며 ‘관찰’할 수 있을 따름임을 권기만은 깨달은 것으로 보인다. 이렇듯 언어를 앞세우지 않는 시인의 태도는 때때로 답답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언어로 세계를 만들어내는 것이 시인의 궁극적 지향이 아니라면 시는 무엇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하지만 시인은 질기고, 지독하게 스스로를 제어한다. 그는 결코 자신이 시인임을, 이것이 시임을 작품 속에서 드러내지 않지만 오히려 그렇게 함으로써 단단한 시인이 지닐 수 있는 하나의 시적 지향을 고수한다.

권기만의 역설적인 절제가 시적 태도의 핵심이라면, ‘어둠’에 대한 애정은 그의 시가 체념의 정서로 귀결되지 않도록 만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이 시집의 시편들에서는 도저한 어둠의 이미지가 무수히 발견되는데 놀랍게도 그것은 일관되게 긍정적이다.

「어둠의 회랑」에서 시인은 어둠이 열어주던 그 “교신”의 회랑에 관해 이야기한다. 밤이 어둑해지고 별빛이 저 멀리 보일 때까지 시인은 그것을 천천히 지켜보다가 우주와 악수하며 “손안이 화안해”지는 경험을 하는데(「어둠의 회랑」, 20쪽), 그런 시인에게 어둠은 누구도 “모두 읽은 사람은 없”는 “아주 두꺼운 교과서”이다(「야간 학교」, 34쪽). 동시에 밤은 두렵고 무서운 것이 아니라 꽃이 피고 달이 뜨는 “빛의 터널”이다. “무엇을 두드려 단번에 열렸나 / 내 눈의 벽면을 채색한 어둠 / 풍경으로 돌아앉는 밤이면 / 뼈와 힘줄 사이에도 달이 떴다”(「이팝 2」, 37쪽)라는 구절은 어둠에 대한 시인의 인식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밤의 시공간이 선사하는 응시의 상태야말로 이 시인이 온몸을 맡길 수 있는 순간인 듯하다. 그 순간에야 시인은 언어의 빗장을 열고 조금은 자유로워진다.

이 시집의 4부는 시집 전체로 보면 꽤나 이질적이다. 릴케와 카프카, 랭보와 이상이 등장하고, 「도서관」 연작에서 보듯 ‘텍스트’에 대한 시인의 인식이 폭넓게 드러난다. 거기에 타클라마칸과 몽마르트 등의 이국적 풍경을 바라보는 시인의 눈도 읽을 수 있는데, 어쩌면 이것이 권기만의 다음 행보를 암시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어떤 풍경에서 축적된 시간을 읽어내는 것, 그러니까 현재로부터 과거를, 과거로부터 현재를 “발굴”하는 작업이 그가 서서히 확보하기 시작한 새로운 시적 깊이가 아닐까. “발굴은 창조라고 다시 고쳐쓴다”(「발굴」, 81쪽)라고 적은 시인에게 그러나, 여전히, ‘말’보다는 ‘발’이 중요해 보인다.

 

오랫동안 사람을 떠돌아다닌 언어가

나를 거처로 삼고 들락거린다

비쩍 마른 구두가 벌레 흉내를 내는 여름이 오면

인간의 어떤 말보다 달콤한 포도가 익는다

 

「포도 벌레 구두」, 7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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