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용준, 『우리는 혈육이 아니냐』, 문학동네,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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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성을 회복하는 방법

 

(이 글은 계간 <문학의 오늘> 2015년 겨울호에 실려 있습니다)

 

몇몇 사건으로 인해 문학에 관한 논의가 활발해서인지 ‘문학’이란 대체 무엇인가 자주 고민하게 된다. 이야기도, 소설도 아닌 문학이란 무엇일까. 문학적이라는, 혹은 문학성이라는 말은 어떤 의미일까. 그냥 이야기가 재미있다거나 소설이 흥미롭다는 것이 아니라 문학성이 있다고 굳이 말하게 되는 이유는 대체 무엇일까. 답을 내리기 어려운 질문이지만, 아마도 언어로 구성되어 있는 하나의 단위가 결국 독자에게 어떤 ‘변화’를 가져다 줄 때, 그것을 문학적인 순간이라 부를 수 있지 않을까. 그게 세계에 대한 통찰력이든, 새로운 경험을 하게 해주는 놀라운 상상력이든, 놀랍도록 디테일한 재현이든 말이다. 여기 그 ‘변화’의 가능성을 믿는 작가가 있다.

이제 세 번째 책을 내는 정용준은 ‘작가의 말’에 “소설이 좋다”고 쓰면서, “소설이 세계를 바꿀 수는 없겠지”만 “쓰는 자”와 “읽는 자”, 즉 “사람은 바꾼다”고 말했다. 맞는 말이고, 멋진 말이라서 조금 비틀어 보고 싶다. 겨우 소설이 당연히 세계를 바꿀 수 있을 리 없다. 그러나 사람은 바꾸기 때문에, 그 사람이 바라보는 세계는 바뀐다. 그리고 쓰는 자와 읽는 자는 다르게 바뀐다. 소설을 통해 우리는 누구나, 그게 뭐가 됐든 바뀌게 되지만, 그 변화의 양상은 누구도 같지 않다. 이런 변화를 둘러싼 풍경들이 문학의 자리이고, 결국 문학이 도달해야 하는 방향은 인간으로 하여금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되었다고 여기게끔 만드는, 그걸 정확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어딘지 모르게 조금은 변한 듯한 기분”(<해설>, 252면)이 들도록 하는 쪽이 아닐까.

『우리는 혈육이 아니냐』에 실린 이야기들과 문장을 통해 누구보다도 먼저 변했던 것은 정용준 자신인 것 같다. 유달리 공을 들인 게 느껴지는 이 소설집에서 평범한 인물은 등장하지 않는다. 고통과 상처의 늪에 빠져 있는 인물들이 얼마나 힘겹게 생을 버티고 있는지 작가는 시종일관 세세하게 그려낸다. 그러면서도 그 인물들을 바라보는 시선에 ‘애정’이 깃들어 있다. 현실은 대체로 끔찍하고, 사건은 충격적이며, 삶은 피폐하기 그지없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살아낸다.’ 오로지 슬픔과 절망으로 삶이 가득 차 있다면 어떤 인간이 이를 버틸 수 있을 것인가. 끔찍한 경험을 가진 삶에도 기어코 빛나는 순간이 있다. 그건 용서나 화해 같은 극적인 변화이기도 하지만, 대부분 사소한 공감, 하찮은 것에 대한 애정 같은 데서 비롯된다. 정용준은 그 미묘한 ‘희망’의 순간을 티 나지 않게, 그렇지만 희미하게 알 수는 있게 쓴다. 그건 아마도 미리 기획되고 예정된 것이 아니라 쓰면서, 쓰는 자로서, 쓰는 사람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갖게 된 애정에 기반하고 있는 것 같다.

첫 번째 소설집인 『가나』(문학과지성사, 2011)를 발간한 후 4년 만에 나온 이 소설집은 작가의 그간 왕성했던 활동들을 감안하면 이른 편이 아니다. 또한 이 소설집에 ‘선별’된 작품들을 찬찬히 살피면 작가가 무심하게 작품들을 모으지 않았음을, 오히려 지나치게 고민하고 망설였음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여기 실린 작품들 대부분이 발표할 당시의 제목과 퍽 다르다는 점이 우선 그러하다(그래서 작품의 최초 발표 지면을 소설집 말미에 수록하는 일반적 관행을 굳이 따르지 않았던 것 같다). 또한 소설집의 테마에 맞게 작품들을 그러모으면서 문장들도 깊이 고심해 새로 손본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그 선별과 수정 과정이 결과적으로 만족스러웠는지는 모르겠다(「위대한 용사에게」는 「이국의 소년」으로 바뀌었는데, 몇 번을 생각해도 원제가 매력적인 것 같다).

정용준은 소설집이 단순히 단편들의 집합이 아니라 한 권의 ‘책’으로서 의미를 가지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어서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 그러나 그러한 지향이 어떤 도식성에 빠질 위험은 늘 존재하는 것 같다. 이를테면 표제작인 「우리는 혈육이 아니냐」에서 증명되듯 이 소설집을 감싸는 문제의식은 ‘피’, ‘혈연’, ‘가족’ 등인데 그것이 주인공의 직업을 통해 “투석기”라는 소재로 표현될 때, 핵심은 간명해지지만 “몸속에 남아 있는 피를 투석기에 모두 돌리면 나는 그와 아무 상관없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61-2면)와 같은 문장은 충분히 예측 가능해진다. 요컨대 독자인 우리는 작품에서 만나는 어떤 흥미로운 인물에 대해 결국 문제는 ‘혈연’일 것임을 너무 일찍 알아버린다.

「474번」이 그렇다. 이 작품은 어떠한 감정의 기복이나 표졍의 변화 없이 어린아이까지도 무참히 살해하는 연쇄살인범을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모든 혐의를 인정합니다. 공범은 없습니다. 개인적인 원한도 없고 그 어떤 정치적 의도도 없습니다. 이렇게 하면 사형을 선고받을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저는 사형을 원합니다. 집행해주세요.”(13면)라고 단호하게 말하는 인물, 그래서 전 국민적인 여론으로 사형을 집행하는 것이 “아이러니하게도 우리 모두가 합심하여 그를 돕는 것”(24면)처럼 느껴지게 만드는 이 인물이 끝내 혈연의 굴레로 다시 돌아오고 마는 것은 무척 아쉽다. 누나이자 엄마인 여자로부터 홀로 버림받아 “유령”으로 살아온 사연이 밝혀지는 순간 서사의 박진감은 어쩔 수 없이 떨어진다. 나는 “474번”이 소설의 마지막 장면에서 꽃게를 먹은 뒤 교도관을 죽이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는 ‘반전’을 상상했는데, 정용준이라면 그럴 리가 없다는 생각도 동시에 들었다.

이처럼 그의 소설들은 처참하면서 동시에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따뜻하다. ‘따뜻하다’라고 썼지만 정말로 따뜻한 것은 아니어서, 아주 희미한 이 긍정의 기운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는 모르겠다. 이 소설집에 실린 작품들에서 ‘죽음’이 등장하지 않는 작품은 없다. 아니 오히려 너무 쉽게, 그들은 ‘죽임’을 당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용준의 소설이 지옥의 풍경을 보여주지 않는 것은 어쩌면 시간의 힘 덕분이 아닐까 싶다. 이 소설집에서 그의 작품들은 “사건 이후의 삶”(<해설>, 266면)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무엇이 문학적이냐고, 문학성을 담보할 수 있냐고 물었을 때, 정용준은 ‘사건’이 아니라 ‘시간’이라고 여기는 것 같다. 문학적인 사건이 있을 수 있지만, 그래서 그 사건을 문학화하는 것은 너무 쉬운 방법이라고 그는 생각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는 오히려 문학이 주목해야 하는 것이 사건이 벌어진 이후 끝내 지속되는 남은 자들의 삶이라고, 그것도 아주 오랜 시간동안 그 사건을 기억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에 관한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그러한 방식이 사건의 의미를 축소시키거나 사태의 실감을 감소시킬 수 있음은 언제나 염두에 두어야 한다. 정용준은 「내려」와 「이국의 소년」에서 ‘다른 목소리’를 등장시켜 이를 해결하는데, 뻔한 서사를 뻔하지 않게 만든 훌륭한 전략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이라는 것은 단편소설에서 감당하기 쉬운 성격이 아니다. 「미드윈터-오늘 죽는 사람처럼」은 전형적인 단편소설의 형태를 갖추고 있으면서 동시에 그래서 가질 수밖에 없는 한계를 잘 보여준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독특한 성격을 지닌 인물이 등장하고, 그 인물의 곁에 좀처럼 그를 이해하지 못하는 또 다른 인물이 등장하며, 끝내 그들의 사연이 밝혀지면서 서로를 이해하게 되는 서사. 그리고 거기에 예술이나 국적, 언어 등 무거운 질문과 진지한 사유들을 덧칠하면 매끈한 한 편의 소설이 탄생한다. 하지만 이 매끈함은 이들의 사연이 가진 시간의 결을 충분히 더듬지 못한다. 때때로 소설의 매력은 약간의 모자람이나 넘침에서 오기 때문이다. 그 지점에서 주목되는 것은 「안부」이다. ‘문학적’으로 사건을 풀어내고, 켜켜이 쌓인 시간들을 길지 않은 문장들로 깊이 살아내게 하는 것은 역시나 디테일이 담보된 진심이다. 군대에서 의문사를 당한 아들의 억울함을 풀기 위해 6년 간 싸워 온 “엄마”의 시간들은 사려 깊고 적확한 문장 속에서 오롯이 살아 있다. 그 시간들을 거쳐 “내게 더는 안부를 묻지 말기를. 나는 아직 괜찮다.”(184면)라는 마지막 문장에 도달했을 때 어쩔 수 없이 감동적이다. 괜찮다는 말이 진심이라는 것을 알지만 동시에 우리는 “엄마”가 영원히 괜찮지 않을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이제 「개들」에 관해 이야기해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이 소설집에서 단연 이채를 띠는 것이 「개들」이라는 작품인데, 이는 다른 작품들과 달리 삶에 육박하면서 사건 그 자체를 강렬하게 그려내고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이 작품은 폭력과 고통에 관한 인상적인 서사이면서 인간의 몸에 대한 집요한 탐구서다. 사실 정용준이 인간 근원의 존재론적 탐색을 지속하는 여러 작가들과 변별되는 중요한 지점이 바로 ‘몸’이라는 실체에 대한 꾸준한 관심이다. 훼손된 신체, 선천적 장애, 육체적 폭력 등은 정용준이 초기부터 밀고 나간 문제의식이었고 장편 『바벨』(문학과지성사, 2014)에서도 말(언어)이라는 관념만큼이나 중요하게 다루어지던 것이 입(혀)이라는 신체였다. 이 소설에서 작가는 육체를 가진 동물이 몸을 결박당하고, 구타당하며, 끝내 고통 속에 죽어가는 존재임을, 핍진하고 섬뜩하게 묘사되는 ‘개들’의 사육 및 도살 장면을 통해 보여준다. 그리고 그 서사를, 정용준답게,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인물을 등장시켜 이끌어 나간다. ‘통각’이 핵심적인 문제라면 그것을 이리저리 돌려 말하지 않고 인물에 그대로 투영하는 정직한 방식이다. 나는 이것이 정용준이 가진 장점이자 단점이라고 생각하는데, 그에게는 문학적인 것에 대한 모종의 ‘강박’ 같은 것이 느껴진다. 그것은 때때로 훌륭하고 깊이 있는 서사를 만들어내기도 하지만 전형적이고 도식적인 이야기로 귀결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정용준을 지지할 수 있는 것은 끝내 그가 묘한 울림이나 먹먹함을 만들어내는 작가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소설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작가의 태도로부터 온다. 그 태도와 집요한 존재론적 사유가 만나 거대한 문학적 성채를 이루었던 이청준의 사례를, 나는 정용준에게 자꾸 대입해 보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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