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견의 시인이 된다는 것

 

(이 글은 계간 <시와사상> 2015년 겨울호에 실려 있습니다)

x9788937408311

 

의 세계, ··

– 함기석, 『힐베르트 고양이 제로』, 민음사, 2015

 

‘언어 예술’이라는 시의 세계에서 어떤 시인들은 ‘언어가 아닌 무엇’으로 시적 실험을 보여주기도 한다. 물론 언어가 아닌 무엇이 결국은 언어가 아닐 수 없다는 점이 이들의 한계이자 성취일 것이라고 봐야 할 것인데, 그 독특한 행렬에 함기석이라는 시인이 서 있다. 잘 알려져 있듯 그는 수학적 혹은 기하학적 상상력이라 명명할 수 있을 시적 기법으로 자신만의 시 세계를 열어젖혔으며, 『오렌지 기하학』(문학동네, 2012) 등을 비롯한 몇몇 시집은 그것이 꽤 성공적인 여정이었음을 증명하고 있다. 그러나 그 특징은 곧 시인을 가두는 ‘감옥’이기도 해서, 수학과를 졸업하고 수식을 즐겨 쓰는 특이한 시인으로만 함기석은 기억될 수 있다. 그것은 독자나 비평가의 측면에서 중요한 것이 아니라 창작자인 시인 자신에게 더 긴요한 문제일 것이다. 그래서인지 이번 시집 『힐베르트 고양이 제로』에서 우선 주목되는 것은 시인이 그러한 부담감으로부터 상당히 자유로워졌다는 인상이다. 자신만의 시적 상상력이나 기법은 유지하면서도 그것에만 골몰해 시성(詩性)을 놓치지 않는, 이른바 ‘중견’ 시인의 원숙함에 도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일상과 비일상, 현실과 초현실, 언어와 비언어의 경계를 굳이 나누지 않고 시인 자신의 주변으로부터 시적 사유를 확장해나가고 있는 모습이 독자로 하여금 미덥다는 느낌을 가지게 한다.

구체적으로 시를 살피면, 시집의 구성에 예민하게 공을 들였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 4부로 이루어진 이 시집은 각각 열다섯 편의 시로 구성되어 있으며 소주제에 걸맞은 작품들로 선별되어 있다. 그리고 그 시편들은 다시 “힐베르트 고양이 제로”라는 제목 아래 모여든다. “고로쇠나무가 흘리는 수액은 / 고로쇠나무의 피고 사상이고 가설이고 수식이다”(「힐베르트 고양이 제로와 발발이 π」, 21면)라는 구절로 대변되는 함기석 특유의 세계관이 응축된 제목이다. 그러나 이를 섣불리 세계의 수식화라고 이름 붙여서는 곤란하다. 함기석의 작업이 의미를 갖는 것은 단순히 인간이나 자연을 수(數)와 식(式)으로 독특하게 변형시켜 표현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치환 과정에서 생기는 어떤 낯섦이 여타의 시에서 발견하기 어려운 시적 효과를 주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시인이 생경한 언어를 붙잡아 끝내 삶의 어떤 순간을 건져 올리는 일과 같아서 묘한 감각적 울림을 갖게 한다.

1부에서 시인은 세계가 하나의 거대한 음악임을 보여준다. 「오르간」, 「어느 악사의 0번째 기타줄」, 「밤의 실내악」, 「죽은 새를 위한 첼로 조곡」 등의 시편은 음악이 새삼 기호들의 향연임을 상기시키면서 시(詩)와 수(數)와 음(音)이 결국 율(律)의 세계를 형성하는 다른 이름임을 보여준다. 이어지는 2부는 지극히 개인적인, 담담하면서도 뜨거운 시편들로 구성되어 있다. 아이(의 세계)에 대한 시인의 애정, “단 한 사람”을 향한 마음 같은 것들이 때로는 따뜻하게, 때로는 먹먹하게 그려진다. “나는 언제쯤 / 지폐로 접은 종이잠수함 타고 / 저 깊이를 알 수 없는 연못 바닥에 닿아 / 환한 오렌지 달 달아 주고 / 어린 새우들과 하하하 놀 수 있을까”(「찡찡공주가 잠든 봄밤」, 66-7면)와 같은 구절은 얼마나 많은 의미를 담고 있나. 「첫 데이트」에서 4시라는 시각을 활용하는 방식도 흥미롭다. “네 시”는 세 시와 다섯 시 사이의 시각이지만 그것은 동시에 ‘너의 시간’으로도 읽히고, 당신의 시(詩)로도 읽힐 수 있기 때문이다. 3부를 구성하는 주요 이미지는 ‘무덤’, ‘피’, ‘할머니’, ‘밤’, ‘눈’ 등이다. 개별 시편에서 반복되는 이 이미지들은 느슨하지만 확실히 연결되어 있어, 한 호흡에 시를 읽어 내려가게 만든다. 그러면 우리는 “핏덩이 낙태아”와 “콘크리트 담 아래 맨드라미”가 공존하는 기묘한 세계를 떠다니게 될 텐데, 그속에서 도저한 ‘죽음’의 그림자를 발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4부에서 시인은 그 죽음의 세계에 관해, 혹은 죽음이라는 절차에 대해 그리고 있다. 무엇보다도 죽음에 대한 인식이 구체적이어서 눈에 띈다. 「하나병원 장례식작 뒤편 소각장」, 「백 년 후에 없는 것들」 등이 특히 그러한데, 이런 구체성이야말로 따로 돌려 말하지 않는 수식의 방식이 아닐까 생각되기도 한다. 시인은 흑조(黑鳥)를 내세워 세계의 ‘끝’을 묘사하고 있는데 그것이 무(無)가 아님에 주목한다면 우리는 시인의 말, 즉 “나는 ( )다”라는 단 한 문장의 진술에 관해 곰곰이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나’는 텅 비어 있지만 역설적으로 괄호가 ‘있음’으로 인해 그것은 증명된다. 나아가 괄호라는 기호가 수식에서 늘 가장 먼저 계산된다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함기석이라는 시적 주체가 쉽사리 허무나 절망의 세계로 함몰되지 않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x9788932027654

 

완결성의 미학

– 이기성, 『채식주의자의 식탁』, 문학과지성사, 2015

 

한 편의 시를 ‘완성’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그 시를 ‘완결’짓는 것이다. ‘완성’을 끝의 마침표를 찍는 순간이라 정의할 수 있다면, ‘완결’은 시의 각 요소들이 내적으로 긴말하게 연결되어 더하거나 뺄 필요가 없는 상태를 의미할 것이다. 이 완결성은 개별 시편들에게 우선 적용되는 것이지만 한 권의 시집에도 물론 해당되는 개념이다. 그런데 한 편의 시, 한 권의 시집을 면밀히 ‘완벽’하게 구성한다고 해서 완결성이 갖춰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완결성이란 그러한 시인의 의도와는 별개로 시편들에서 나타나는 공동의 감각, 공통의 인식 등을 통해 독자가 체득해나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를 완벽하게 완성하는 것은 시인의 몫일 수 있지만 시를 완결짓는 것은 결코 시인이 아니다. 이것이 곧 시인의 운명임을, 시의 최종 심급임을 알아채는 것은 5년 남짓의 간격으로 이제 세 번째 시집을 내는 공력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가능해지는 게 아닌가 싶다.

이기성의 『채식주의자의 식탁』은 시인 자신이 결국 손가락으로 노동을 하는 활자 노동자임을 인식하면서 “시인처럼 광활한 백지 위에서 덜덜 떨어야지”(「크리스마스」, 35면)와 같은 구절에서 보이듯 시 쓰기가 얼마나 두려운 일인지를 깨닫고 있음을 곳곳에서 보여준다. 시인을 그것은 ‘채식주의자’라는 상징에 의탁하는데, 기실 시인이란 언어라는 무수한 식재료 중 ‘채식’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을 시어들을 골라 먹는 사람이 아닌가. 이를 식물성의 사유라 해석하는 것은 적절하지만 조금은 지루한 일이 될 수 있다. 오히려 시인이 “채식주의자의 식탁”에 반드시 ‘채식’만 올라올 수는 없다는 사실을, “광활한 모국어의 식탁 위에서” 때로는 “당신의 잘린 목”(「채식주의자」, 15면)을 마주할 수 있음을 알고 있다는 점이 훨씬 더 흥미로운 지점이다. 이 날카로운 시(詩)와 식(食)의 대비는 시집 전체를 관통하면서 메타적 혹은 알레고리적이라고 명명할 수 있을 시적 특징을 구현한다.

채식이나 식탁과 같은 대표적인 이미지들 이외에도 단추, 외투, 소금, 물고기 등 독특한 소재들이 반복되고, 「연애시」, 「육식의 종말」, 「스틸 라이프」, 「단추의 시」 등 제목이 같은 시들이 여러 번 변주되면서 이 시집에 실린 시들이 각각 구별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전체임을 시인은 강조하고 있다. 특히 다수의 시들이 드러내고 있는 형식적인 특징에서 완결성에 대한 시인의 인식을 엿볼 수 있는데, 그것을 산문시라고 단순하게 말할 수는 없을 듯하다.

시집의 편집 체재에서 한 페이지에 들어갈 만큼의 분량, 행을 바꾸지 않는 열 개 내외의 문장들로 이루어진 이기성의 많은 시들은 그것이 적당히 균형 잡힌 형식이어서 인상적인 것이 아니다. 그 형식에서 시인이 보여주고 있는 내적 완결성이 주목되기 때문이다. 이 시인은 어떤 순간을 포착하되, 그것이 동시에 전체를 사유할 수 있게 그려낸다. 이를테면 “개미와 베짱이와 그 모든 것을,”로 시작해 “지구와 개미와 베짱이와 그 모든 것을……”이라는 구절로 끝나는 「말」에서, 파편적으로 등장하는 여러 이미지들은 서로 무관한 듯 이어지지만 그 순간들은 이윽고 전체를 형성해 한 세계를 조망한 느낌을 준다. 그것은 당연하게도 시인의 고심의 결과일 것이고, 쉬이 달성되는 수준이 아니다. 때때로 이기성의 시들은 사유를 멈추게 하고 그저 시의 흐름에 몸을 맡기게 하는 순간이 있는데, 그러한 순간이야말로 주체가 하나의 세계, 즉 전체가 되는 완결성의 지점이 아닐까 생각된다.

 

 

 

 

 

 

 

답글 남기기

아래 항목을 채우거나 오른쪽 아이콘 중 하나를 클릭하여 로그 인 하세요:

WordPress.com 로고

WordPress.com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Google photo

Google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Twitter 사진

Twitter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Facebook 사진

Facebook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s에 연결하는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