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지 않는 ‘한국’소설, 읽지 않는 한국‘소설’

(이 글은 계간 <세계의 문학> 2015년 겨울호에 실려 있습니다)

 

삼조    늙은이들은 누구나 없이 그런 소리를 하시죠. 그러나 그 다 소용없어요. 장가가 다 뭐예요. 집이 다 뭐예요. 죽어라 농사를 지어서 입에는 거미줄이 치는 세상입니다. 대체 조선에 나오면 뭘 해먹고 삽니까? (중략) 말 마세요. 산지옥이에요.

유치진, 「토막」 중에서

 

최근 국립극단에서는 ‘근현대희곡의 재발견’ 시리즈의 일환으로 유치진의 「토막」(1932)을 상연했는데, 처참한 비극적 서사와는 별개로, 무대 위에서 재현되었던 이 장면에 대부분의 관객들은 씁쓸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이미 수십 년 전에 이 땅이 지옥이라고 외치고 있었다는 점도 그렇지만 2015년 한국의 현실과 1932년 일제시대의 조선이 어떤 거리감도 없이 청년 세대의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다는 점이 무엇보다 놀라운 일이었다. 나는 이 대사가 너무도 정곡을 찔러 혹시 대본을 약간 수정한 것이 아닌가 생각했었는데, 유치진의 원작은 그 언어 그대로, 토씨 하나 다르지 않고 고스란히 실려 있었다.

헬조선 담론이 횡행하는 지금 한국 사회에 대한 총체적 불신, 즉 혐오는 그러나 어느 시대와도 비교 불가해 보인다. 한국 사회의 병폐와 구조적 모순이 문제된 것이 어제오늘 일은 아니지만 적어도 지향해야 할 어떤 목적과 가치가 남아 있었던 지난 시대와 달리 현재의 한국은 단호하고 용기 있게 떠나 버리는 것만이 그나마 ‘나’를 지키는 일이 되었다. 거대 담론이 사라지고 미시적 개인의 문제가 중요해진 시대라고는 하지만 여전히 정치와 경제, 폭력과 자본 등 삶을 위협하는 구조는 더욱 공고해졌고 그나마 남아 있는 사적 영역에서 특히 청년들은, 생존을 건 투쟁 중이다. 한때 문제의 원인을 ‘신자유주의’로 돌려 저항의 구심점으로 삼았던 시도도 있었지만, 그마저도 잠깐의 ‘점령’에 그쳤을 뿐이다.

‘못 살겠다’고 말하면 ‘그래도 굶어 죽지는 않잖아’라고, ‘아프다’고 말하면 ‘그게 청춘’이라고, 어른이 되려면 ‘천 번’은 흔들려야 한다고 얘기하는 기성세대들에게서 청년들은 더 이상 아무런 위로도 받지 못한다. 이제 그들은 ‘열정’이나 ‘노력’ 같은 수사가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를 감추고 그것을 개인의 책임으로 교묘히 전가하는 어휘라는 것을 눈치채고 있다. 그러나 이 공고한 21세기 한국 사회는 청년들을 위한 틈을 결코 허용하지 않는다. 때때로 타오를 듯한 분노가 표출되기도 하지만 사회가 끼얹는 찬물에 금세 식어버리고, 그들은 다시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며 그저 자조와 체념의 시간을 보낸다. 그 무기력한 반복 속에서 그들에게 남은 유일한 가능성은 ‘탈조선’을 상상하며 버티는 것이다. 그들은 꿈을 위해 ‘열정’이 필요하다는 것도 알고, 아직 자신들이 원하는 삶을 살아가기에는 스스로의 ‘노력’이 부족하다는 것도 안다. 그러나 동시에 뼈저리게 알게 된 사실은 이 땅에서는 아무리 노력해도 꿈을 이루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들은 답을 모르는 세대가 아니라 문제가 무엇인지 몰라 허둥대다가 그게 한국이라는 사회 자체임을 발견한 세대인 것이다.

 

도스가 윈도가 되고 보석글이 아래한글이 되고 유닉스 기반의 PC통신이 인터넷으로 발전해 가는 것을 몸으로 겪었고 그 모든 운영체제 프로그램을 대부분 능숙하게 다룰 수가 있다. 예전이라면 전문 사진사나 찍을 법한 사진도 우리는 몇십만원짜리 카메라로 척척 찍고 과거엔 방송국에서나 하던 동영상의 촬영과 편집도 간단하게 해치울 수 있다. 한마디로 우리는 우리 윗세대와는 완전히 다른 나라에서 자나랐고 이전 세대에 비하자면 거의 슈퍼맨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후진국에서 태어나 개발도상국의 젊은이로 자랐고 선진국에서 대학을 다녔다. 그런데 지금 우리에겐 직업이 없다. 이게 말이 돼?

김영하, 『퀴즈쇼』(문학동네, 2007), 194쪽

 

사실 헬조선의 ‘전조’는 풍요가 몰락하던 20세기 끝자락을 지나 2000년대에 다다르자 조금씩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지금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음을 알 수 있다. 김영하가 “20대라는 존재에 대해 생각”하며 쓴 이 소설에서 위와 같은 대목은 스스로의 ‘능력’이 부족하다고만 여겨 왔던 청년 세대에게 일종의 통쾌함을 안겨다 주었다. 그리고 그것은 그들에게 ‘능력’이 아닌, 사회 구조적인 어떤 문제가 자신들의 안정된 삶을 가로막고 있음을 알게 했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그들 모두 ‘88만원’으로 살아가야 할지 모른다는 불안이 한국 사회 자체에 대한 혐오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국의 청년들은 이 사회가 새로운 계급 사회로 진입하고 있으며, ‘능력’이라는 것도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세습’이라는 철 지난 어휘가 부의 이동을 묘사하고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야만 성공이 가능해지는 시대는 이미 자본주의 따위가 문제가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한국이라는 사회 자체임을, 2015년을 살아가고 있는 인터넷 세대가 알아채지 못할 리 있겠는가.

 

내가 여기서는 못 살겠다고 생각하는 건…… 난 정말 한국에서는 경쟁력이 없는 인간이야. 무슨 멸종돼야 할 동물 같아. 추위도 너무 잘 타고, 뭘 치열하게 목숨 걸고 하지도 못하고, 물려받은 것도 개뿔 없고. 그런 주제에 까다롭기는 또 더럽게 까다로워요. 직장은 통근 거리가 중요하다느니, 사는 곳 주변에 문화시설이 많으면 좋겠다느니, 하는 일은 자아를 실현할 수 있는 거면 좋겠다느니, 막 그런 걸 따져.

장강명, 『한국이 싫어서』(민음사, 2015), 11쪽

 

한국을 떠나 끝내 호주로 향하는 “계나”의 이야기를 그린 이 소설은 최근 청년들의 문제를 에두르지 않고 ‘직접적’으로 드러내 많은 독자들의 호응을 받았다. “계나”가 무작정 한국을 떠나 호주에서 이상적인 삶을 살아갔다면 이 작품은 흔한 ‘이민 스토리’에 그치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호주와 한국을 오가며 ‘내가 한국에서 살아갈 수 있을까’를 끊임없이 고민하는 “계나”의 모습이 독자로 하여금 이 이야기를 결코 심상하게 읽어 갈 수는 없도록 만들었다. 결국 ‘행복’을 찾기 위해 호주행을 결정한 “계나”의 선택에 모두가 동의하지는 않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오히려 “계나”의 일견 단순한 행복론에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사회를 떠날 수 없는 이유를 끊임없이 고민한 사람이 더 많았을 지도 모른다. 어찌 되었든 이 소설이 한국 사회의 청년들이 당면한 고민에 대해 꽤나 핍진하게 접근했음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동시에 이 소설이 한국이라는 사회가 지닌 무수한 문제들에 대해 ‘일부’만 말했을 뿐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자. 이쯤 되면 궁금한 것이다. 도대체 다른 한국소설들은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일까.

 

 

 

오늘날 한국소설은 독자가 없다고 아우성을 치지만 독자들은 한국소설에 ‘한국’이 없다고 불만을 토로할지 모른다. 한국소설에 대한 무수한 편견에도 불구하고, 끝내 한국소설을 읽으려는 독자가 있다면 그것은 어떤 이유에서일지 곰곰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한국어로 구성된 아름다운 문장을 읽고 싶다면 시를 택하는 편이 낫고, 이야기의 만족도를 찾자면 이미 해외에서 그 가치를 검증받은 외국 소설이 나을 것이다. 그럼에도 한국소설을 읽는 독자는 누구인가. 나는 개인적으로 열에 여덟은 소위 ‘순문학 덕후’이고, 그나마도 이들은 직간접적인 문학 관계자일 가능성이 높으며, 겨우 둘 정도의 독자가 새롭게 관심을 갖고 ‘한국’소설을 들여다 볼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데 지금 한국소설은 다수의 마니아 독자와 소수의 신규 독자를 모두 놓치고 있다.

물론 한국소설은 대체로 한국에 관해 이야기한다. 그러나 이때의 한국이란 중요한 사적(史的) 배경으로 서사를 ‘지배’하거나 소설이 그려 내고자 하는 관계나 감정의 단순한 ‘후경(後景)’ 정도에 그치는 사례가 대부분이다. 전자는 주로 장편에서, 후자는 주로 단편에서 드러나는 특징인데, 최근 주목받은 성석제의 『투명인간』(창비, 2014)이나 이기호의 『차남들의 세계사』(민음사, 2014), 권여선의 『토우의 집』(자음과모음, 2014)이나 김도연의 『마지막 정육점』(문학동네, 2015), 혹은 최민석의 『풍의 역사』(민음사, 2014)와 손아람의 『디 마이너스』(자음과모음, 2014) 등 몇몇 장편을 떠올려 보기만 해도 한국소설에서 ‘한국’이라는 배경이 어떻게 활용되고 있는지 쉽게 알 수 있다. 과거의 사건을 다른 관점으로 조망하거나 실험적인 형식을 동원해 새롭게 그려내는 기법은 그 자체로 의미 있는 것이지만 거개의 한국소설이 현재를 외면하고 과거로 달려가는 점은 아쉽다고밖에 말할 수 없다. 물론 현재와 씨름한 몇몇 작품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 성과는 사실 미미했음도 지적할 수 있겠다.

단편의 경우 상대적으로 지금, 여기의 세태를 순간적으로 포착해 예리하게 제시하는 작품이 종종 있지만 이는 문예지에 발표된 당시에 그러할 뿐, 소설집으로 묶여 나올 때는 이미 시차가 꽤 벌어져 있는 상태일 수밖에 없다. 김채원의 『쪽배의 노래』(문학동네, 2015), 함정임의 『저녁식사가 끝난 뒤』(문학동네, 2015), 이장욱의 『기린이 아닌 모든 것』(문학과지성사, 2015), 구병모의 『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문학과지성사, 2015), 박성원의 『고백』(현대문학, 2015), 전성태의 『두 번의 자화상』(창비, 2015), 김중혁의 『가짜 팔로 하는 포옹』(문학동네, 2015), 김종옥의 『과천, 우리가 하지 않은 일』(문학동네, 2015) 등의 소설집은 문단의 주목을 받았고, 뛰어난 작품들을 몇몇 품고 있기도 하지만 이런 관점에서 선뜻 내세울 만한 작품이라고 하기는 쉽지 않다. 이 ‘다이나믹 코리아’에서 멀게는 3~4년 전의 작품들부터 근작까지 그러모은 소설집이 당대에 육박한다는 느낌을 주지 못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한계이기도 할 것이다.

따라서 사실상 2015년의 ‘한국’에 관한 소설은 아주 소수로 존재하거니와 영화나 드라마, 웹툰 등 여타의 서사 장르들이 이를 충분히, 훌륭한 방식으로 다루고 있어 명함을 내밀기조차 쉽지 않다. 그러니 이런 상황에서 『한국이 싫어서』와 같은 작품이 독자의 이목을 끄는 현상은 단순하게 넘길 일이 아니라 한국소설에 대한 어떤 ‘신호’로 받아들여야 할 일인지 모른다. 아직 당대의 서사를 소설이라는 방식으로 접하고 싶어 하는 독자가 제법 존재한다는 긍정적인 신호라고 여길 수도 있겠지만, 더 이상 독자들이 인간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와 성찰, 삶에 관한 통찰력과 세계를 조망하는 거대한 시각 등 소위 ‘순문학적인 가치’를 한국소설에서 기대하지 않는다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어느 쪽이든 문제는 ‘독자’다. 독자를 늘리는 것은 순문학의 입장에서 대단히 요원한 일이고, 사실 썩 갈급하지도 않은 문제라고 생각하지만 독자를 ‘지키는’ 것은 무척 중요한 일이다. 한국소설의 ‘애독자’가 하나둘 사라지기 시작할 때 진짜 위기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신경숙의 표절로부터 아이유의 ‘제제’에 이르기까지 한국 독자들의 문학에 대한 관심이야말로 새삼 대단한 것 같다. 끝내 문학적 아이콘의 몰락을 거부하려던 문단의 권위적 몸부림을 단호하게 심판한 것도, 문학 작품의 해석에 열띤 의견을 제시해 ‘해석과 표현의 자유’에 관한 논의를 이끌어 냈던 것도 모두 독자의 힘이었다. 이를 ‘대중’이라고 묶어 손쉽게 취급해서는 곤란하다. 그들은 대체로 같은 목소리를 내지만 발화의 맥락은 모두 다르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공통점이 있다면 모두 ‘읽은’ 사람들이라는 점이다. 신경숙이 알려진 작가라서가 아니라 그들 모두가 「전설」과 「우국」의 그 대목을 ‘읽었기’ 때문에, 아이유가 싫어서가 아니라 『나의 라임 오렌지나무』를 ‘읽었기’ 때문에 그토록 열렬하게 소리칠 수 있었던 것이다.

지난 여름, 일본에서는 마타요시 나오키(又吉直樹)라는 개그맨이 문예지에 발표한 첫 작품, 중편 『불꽃(火花)』으로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한 ‘사건’이 발생했는데, 한 인터뷰에서 그가 “누구든 백 권의 책을 읽었다면, 그는 반드시 책을 좋아하게 될 것”이라고 했던 말이 여전히 뇌리에 남아 있다. 일견 낭만적으로 느껴지기도 하지만 ‘읽었다’는 행위만이 애정을 보증할 수 있다는 단호한 말로도 들린다.

어떤 영화가 백만 명의 관객을 동원했다면 그것은 그 영화를 본 사람이 거의 백만 명이라는 말과 다름 없다. 그러나 만 권의 책이 팔렸다고 했을 때, 그 책의 독자가 만 명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책을 사 두고 읽지 않는 사람, 몇 페이지만 읽은 사람, 절반만 읽은 사람, 띄어띄엄 발췌해 읽는 사람 등 독서의 형태는 실로 다양하고, 이를 일일이 파악해 낼 방법은 없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독자를 지켜내는 핵심은 소설을 ‘파는’ 것이 아니라 ‘읽게’ 만드는 데 있다.

그러나 독자에게 읽기를 권장하는 문단의 방식은 판매에만 초점이 가 있으며 그마저도 너무 관습적이다. 각종 문학상은 그토록 내홍을 겪으면서도 여전히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 ‘난립’하고 책마다 의례적인 추천사와 과도한 상찬은 빠지지 않고 여기저기 ‘난무’한다. 그러면서 동시에 보도자료를 돌리고 사인회나 낭독회를 준비하며 각종 ‘굿즈’로 사전 마케팅에 열을 올린다. 그러나 독서가 철저히 개인적인 활동이고, 결국 담론의 장이라는 것은 ‘읽은 후’에야 마련된다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사실 독서를 둘러싼 모든 ‘기획’은 사후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현재 한국 문단의 비극은 이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에서 우선 온다.

읽지 않기 때문이다. 애독자들은 서사가 아니라 ‘책’을 소비하기 시작한다. 비평가들은 청탁을 기다리다가 서평이나 리뷰를 ‘써야 할’ 책만 읽고 있다. 그러니 읽고 쓰는 것에서 나와야 할 ‘문학권력’이 엉뚱한 곳에서 나타난다. 한국소설의 서사가 얼마나 다양한지 극소수의 독자를 제외하면 대다수는 알지 못한다. 꽤나 주목을 받고 문학상까지 받은 작품 중에서도 고작 수십 명의 독자를 확보했을 뿐인 책이 수두룩할 것이다. 문단의 동력이 읽고 쓰는 것에서 나오지 않고 구조적인 관행에 의해 위태롭게 유지될 때 많은 작품들은 책장 속으로 그냥 사라져 버린다.

재차 강조하건대 놀랍게도 한국소설 독자들은 읽지 않아도 되는 상황에 내몰린다. 다르게 말하면 ‘순수 독자’가 거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한국소설의 애독자들은 발간되는 책들을 고심하며 골라 보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띠지와 수상작, 출판사 등에 영향 받는다. 그리고 그 책을 사는 순간 읽는 것은 잠시 뒤로 미룬다. 이미 그 책과 관련된 충분한 ‘경험’이 서사를 별로 궁금하지 않게 만들기 때문이다. 게다가 애독자라면, 한국소설의 이야기는 충분히 예측 가능하다고 느끼고 있을 것이며, 그 책이 꼭 읽어야 되는 책이라면 누군가 알려줄 것이라기 믿는다.

문제의 원인은 복합적이고, 해결도 요원해 보인다. 그러나 결국 읽지 않아도 되는 이유는 단 한 가지밖에 없다. 소설을 읽어도 그것에 관해 이야기할 일이 없기 때문이다. 대다수의 작가들은 작품을 써도 단 한 줄의 평도 얻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며, 대부분의 독자들은 많은 작품을 읽어도 그에 관해 누군가와 즐겁게 소통하는 일이 드물다. 그 공허함 속에서 순문학의 세계는 점점 쪼그라들고 있다.

한국 문단은 ‘그들만의 리그’가 맞다. 그러나 한국 문단의 문제는 그것이 그들만의 리그라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이 안에서 우리끼리 재미있게 놀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제 문학이라는 것이 어떤 총체적 관념이라는 믿음을 버리고, 순문학을 하나의 ‘장르문학’으로 여겨야 될 때가 온 것이 아닐까. 그 ‘독서 공동체’에서 수많은 독서 경험들이 공유되고, 읽음을 바탕으로 한 교류가 계속될 때 그나마 이 세계가 지속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변화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각종 팟캐스트를 통한 소통, 소설리스트(sosullist.com)와 같은 시도, 《analrealism》이나 《더 멀리》, 울리포프레스 등의 독립출판, 「비밀독서단」과 같은 방송 프로그램이 그러한 사례일 것이다.

피에르 바야르가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여름언덕, 2008)에서 강조했던 것은 ‘읽지 않은 책’이 아니라 ‘말하는 법’이었다. 누구도 읽지 않고 말할 수는 없다. 이제 ‘읽기’를 위한 완전히 새로운 형태의 문학 운동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그리고 바로 지금이 바야흐로 고민이 시작될 적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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