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에 읽은 시

시의 공간, 공간의 시

(이 글을 월간 <심상> 12월호에 실려 있습니다)

 

좋은 시인은 평범하고 익숙한 것을 특별하고 낯설게 만들 줄 안다. 그것은 언어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사실 같은 곳을 바라 보아도 다르게 느끼는 인식론적 재능에서 우선 온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시에서 드러나는 시적 묘사의 깊이는 결국 인식과 응시의 깊이에서 비롯한 것이고, 훌륭한 시인은 그 자체로 세계의 담지자이다. 특히 시적 공간을 직조해내는 솜씨를 지켜보면 그들이 왜 훌륭한 시인인지를 알 수 있는데, 그것은 쉽게 포착되지 않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영원 비슷한 것,

이라고 나는 말했다

물에 스며드는 핏방울 같은 것, 설탕 인형의 기억 비슷한 것, 끝이 이어지지 못한 ㅇ자 비슷한 것,

 

뒷부분을 어떻게 마칠지 기억나지 않는 피아노 연탄곡을 치고 있었다

이상하구나,

나는 피아노를 배운 적이 없는데

체르니, 라는 발음을 좋아했을 뿐인데

 

이건 너무 심한 벌이다

내가 태어나기 전에 녹음된 내 목소리가 자막으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제, 옆 사람과 미소를 찡긋 교환하자, 그리고

인사를 하려 했는데

 

청중이 한 명도 없다

눈을 비비고 보니 객석은 흑백의 바다였다

 

천장으로부터 쏟아지는 조명이 우주선의 빛 같았다

이티처럼 느리게 빨려 들어갈 수는 없었다

콜 미 홈

하재연, 「합주곡」, 《문학과사회》, 2015년 겨울호

 

 

꿈이라는 ‘현상’은 인간의 상상력을 끊임없이 시험한다. 얼마나 많은 시인들이 꿈에 기대어 시적 상상력을 확장해 왔는지 굳이 고민해 보지 않아도 무수한 사례를 이미 우리는 읽어 왔다. 어쩌면 궁극의 시가 가 닿을 곳은 결국 꿈의 자리일지 모르는데, 이 시인은 흥미로운 한 장면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시인은 “영원”이라는 말을 던져 놓는다. 시인이 생각하는 “영원”은 아주 희미하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것, 끝내 미완으로 남을 어떤 것을 의미하는 듯 하다. 그 “영원 비슷한 것”을 시인은 꿈에서 경험한다. 사실 시인이 그려내는 꿈의 장면들은 흔한 방식이다. 피아노를 배운 적이 없는 ‘나’가 무대에서 연주를 하고 있고, 객석이 텅 비어 있는 당황스러운 장면들. 그러나 “체르니, 라는 발음을 좋아했”던 기억, “내가 태어나기 전에 녹음된 내 목소리”, “흑백의 바다”인 “객석”, “우주선의 빛” 같은 “조명” 등의 구절이 시인이 얘기한 어떤 “영원”을 상상하게 만든다. “이티”를 언급하며 “콜 미 홈”으로 마무리되는 부분이 썩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시인이 그려낸 꿈의 ‘공간’은 머릿속을 계속 맴돌게 하는 여운을 준다.

 

 

 

모친구의 잠과 이 마당은 낯설고 하수구 냄새를 만든다

 

세탁기가 돌아가는 일요일

친구의 약을 얻어먹고 오후를 넓히는 데 집중한다

 

친구의 티셔츠처럼 친구는 조금 크고 조금 길고

이 집에서 나는 노력 없이 노력한 것보다 더 작아진다

 

친구,

너는 왜 고아가 아닐까 건조대에 빨래집게가 가득 매달려 있다

 

친구는 약을 먹으면서 많이 좋아져서

이제는 약을 먹지 않을 때만 깨어 있다 친구의 선생님은 대문과 현관문 사이를 마당이라고 부른다

뭔가 키워 보라고 권한다

 

다이빙 선수가 가진 어두움,

수면에 비친 그림자가 확 튀어 오른다

 

빨래가 끝났다 마당에 비가 올지도 모른다 친구의 앞날을 빈다 뺨에 난

베개 자국을 손으로 문지르면서

 

비 냄새가 나면 다시 세탁기를 돌려야지,

친구는 나를 키우다 죽게 된다 그래도 된다

 

김복희, 「잉어 양식장」, 《세계의문학》, 2015년 겨울호

 

 

집과 마당이라는 평범한 공간을 낯설고 특별하게 만드는 시인의 솜씨가 돋보인다. 그것은 아마도 “친구”라는 알 수 없는 존재 때문일 텐데, 병에 걸려 약을 먹으며 점차 ‘죽어 가는’ “친구”는 차라리 실재한다고 보는 편이 나을 것 같다. 그 기묘한 공간에서 ‘마당’이라고 부르기는 애매한, “대문과 현관문 사이”에 ‘잉어 양식장’을 상상해 보는 시적 주체의 마음은 쓸쓸하지만 단단하고, 예민하면서도 끝이 뭉툭하게 잘 다듬어져 있는 느낌이다. “친구의 약을 얻어먹고 오후를 넓히는 데 집중한다”, “친구의 티셔츠처럼 친구는 조금 크고 조금 길고 / 이 집에서 나는 노력 없이 노력한 것보다 더 작아진다” 등은 공간을 묘파하는 시인의 감각이 돋보이는 구절이다. “세탁기가 돌아가는 일요일”의 풍경은 아무리 절망적인 삶이라도 끝내 “그래도 된다”라고 덤덤하게 마음을 먹을 수 있게 하는, 일상의 반복이 가져다 주는 순간의 안일함일 것이다.

 

 

 

내 안에 손을 넣어 바람이 만져지면 해발 오천 미터

현기증은 높이에의 연민이다

그 높이라면 살이 문드러져도

시선은 또렷해진다

높이는 또한 허공이라는 지루한 넓이를 생각한다

호수의 미열만큼 햇빛도 고인다

예감도 미래도 퇴적하는

그 높이에서도 산이라 불리는 험지가 있어

바람의 힘줄이 슬며시 탱탱해진다

거기, 사원이 있는 지점이다

더이상 나무이고 싶지 않은 심심한 감정이 머물고 있다

바람의 육신은 오직 눈 위에서만 발자국을 남기지만

애써 형상이 없기에

바람은 사원의 귓바퀴 노릇을 한다

몸을 원하는 메아리가 그곳에 있다

노대바람의 되풀이로

엷은 소금기마저 희미해지는 중이다

바람의 끈을 따라하는 가건물이

세워졌다 다시 허물어진다

국경 고개 근처

바람의 심해어에 손을 넣으면

인(燐)이 전부인 답장을 잡을 수 있다

 

송재학, 「성긴 것을 소(疏)라 하고 빽빽한 것을 밀(密)이라 하니 바람에도 해당되는 성질이다」, 《창작과비평》, 2015년 겨울호

 

 

뛰어난 시들은 대부분 훌륭한 구절 몇 군데를 품고 있지만 위대한 시는 모든 구절이 완벽하다. 제목부터 눈길을 끄는 이 시는 ‘바람’에 관한 무수한 시 중에서 가장 인상 깊게 읽혔다. “내 안에 손을 넣어 바람이 만져지면 해발 오천 미터”라는 첫 구절에서 시인은 단숨에 우리를 고산(高山)으로 데려 간다. 그리고 그 “높이”에서는 “살이 문드러져도 / 시선은 또렷해진다”고 시인은 말한다. 이때 시인에 의해 우리에게 생성된 ‘공간’이 시를 이끌어 가기 시작한다. 산을 넘는 바람이 “힘줄이 슬며시 탱탱해진다”와 같은 구절에서 실감을 얻고, 우리는 바람을 따라 자유롭게 산세의 곳곳을 누빈다. 특히 이 시는 공간에 관한 예리한 감각이 돋보이는데, “높이는 또한 허공이라는 지루한 넓이를 생각한다”라든지 “바람의 육신은 오직 눈 위에서만 발자국을 남기지만”과 같은 표현은 심상하기만 했던 풍경을 새롭게 바라보게 한다. “인(燐)이 전부인 답장을 잡을 수 있다”는 마지막 구절은 어떤 의미인지를 끊임없이 고민하게 만드는데,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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